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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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대여와 반납만 하고 쏜살같이 튀어나오던 도서관을 요즘은 그래도 꽤 자주 휘~ 돌아보고 나오는 편이다. 더불어 이곳저곳 어지럽게 붙여져 있는 각종 전단지와 글귀들을 한 자라도 더 눈에 담아보려는 노력도 기울인다.

지금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더 넓은 관점을 갖기 위해 해보는 나름의 방법이자 노력이랄까? 내 바운더리에 갇히지 않으려는 나름의 발버둥이자, 해보지 않았던 경험들을 하나씩 추가해 보고자 하는 도전의식은 그래선지 평소 대비 더 많은 에너지와 피로를 불러온다.

모르는 것은 물어봐야 하고, 또 알게 된 것을 실천으로 연결해야 하기에 눈과 머리는 핑핑 돌고, 손과 발은 늘 바쁘다. 때문에 한 곳에 진득이 앉아 집중할 시간은 부족해지고, 덕분에 몸은 피로를 업고 산다.

그렇게 얻는 것들이 모두 성공 혹은 긍정적 경험만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실패의 경험을 통해 다음의 실패를 예방할 수 있기에 어쩌면 더 귀한 경험이자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 역시 그런 활동 에너지를 쓰면서 읽게 된 도서로, 단순하게는 그냥 새로운 책을 읽는 행위였고,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도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이자, 누군가의 추천도서를 읽는 하나의 행위로 연결되는 일이었다.

모르는 작가, 모르는 출판사, 모르는 책 제목일지라도 나에겐 크게 문제 되지 않는 일이기에 더 별생각 없이 집어 들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와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었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2023년 가을 3개월간 아이오와 글쓰기 프로그램(IWP)에 참여하게 되면서 겪은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엮어 만든 책으로 일기의 형식을 빌려 자유롭게 쓴 기록물이다.

보통 일기라고 하면 1일 1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저자는 이 공식을 깨고 머문 일수보다 일기를 쓴 횟수가 더 많다. 그러니 일기 같은 자유로운 형식을 따랐지만, 실상 보통의 통념상 일기라고 구분 짓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

내용 또한 한계 없이 널을 뛴다. 아무 말 대잔치 같은 글들부터 시작해 통통 튀거나 재치 있는 글, 기발한 상상을 불러오는 글까지 다채롭고 흥미로운 글들로 가득하다.

물론 보통의 평범한 글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역시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00을 했다'와 같은 글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전개와 생각들, 그리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야기가 나의 전두엽을 자극하며 이마를 탁 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문장들이야말로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글들이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단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장문처럼 읽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니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맥락을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리저리 바람에 위치를 바꾸던 종이컵과 창문 사이로 들이치던 샛바람, 아이오와의 골목과 거리들을 꼼꼼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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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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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 글쓰기 프로그램(IWP)은 30여 개국에서 온 작가들이 3개월간 한 호텔에 묵으며 리딩, 강연, 토론 등 열 문학 행사에 참여하는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2023년 가을, 저자는 한국 시인으로 아이오와에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작가가 자신의 나라를 떠나 낯선 언어로 작품을 쓴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 책은 그런 작가들을 마주하면서 변화한 저자 내면의 기록이자 일기, 그리고 성장소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저자 스스로는 아이오와에서의 체류가 인생의 방향을 틀 만한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고 말하며, 이중 언어자로 살아가는 작가들과, 이민자들의 삶을 목격한 경험은 새로운 정체성과 모험의 씨앗을 움트게 했다고 한다.

※엑소포닉: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를 일컫는 말로, 이중언어자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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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게 다가왔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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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들과 있을 때 가장 편할 때는 이들이 만다린어로 얘기할 때다.
(...)
가령, 닌텐도 미니게임에서 둘이 같은 편이 되었을 때, 혹은 급하게 서로를 이해시켜야 할 때 등이 그러하다. 그럴 때 내 입장에서는 대화에 빈 공간이 생기는 셈인데, 그 검은 심연이 발생할 때면 나는 푹 쉴 수 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니 아무 책임도, 구속도 없는 기분.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그 정지의 시간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
나는 만다린어도 광둥어도 일본어도 못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고, 그래서 나만 홀로 자유롭다.
3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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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모르는 언어로 말할 때 대화에 깊은 구덩이가 생겨서 좋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음성의 쏟아짐 속에서만이 나의 귀는 자유롭다고. 그런데 나는 변하고 말았다. 이제 이해하고 싶다. 친구들의 모르는 언어를. 범람하는 언어에 파묻힌 나는 알아듣고 싶다. 내가 살고 싶어 하네. 이제는 미세하게 사는 것을 그만두고 싶구나. 변화하고 만 것이다. 이런 내가 조금은 징그럽지만.
244~24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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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3개월간 아이오와에서 지내며 가장 크게 변화한 부분을 꼽자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초창기에 그녀는 프로그램을 자주 스킵하는 스킵러로 불리는 것은 물론, 소수의 인원이 함께 있는 공간에서조차 오히려 알아듣지 못해서 편하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까운 친구들과 사적인 시간을 보낼 때는 함께 섞이고 싶다, 알아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을 보면, 정말 '변했구나' 느끼게 된다.

사실 위의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는 신선하다 생각했었다. 소수의 인원이 한공간에 함께 있는데 나만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두고 '소외감'이 아니라 '편안함'으로 느낀다는 것이 어쩐지 좀 정신 승리같이 여겨졌달까?

그런데 역시나 친분이 쌓이고 난 후에는 무리에 섞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사람은 역시 '사회적 동물'인가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자의 탈출 방향을 살펴보다가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문장이 있었는데, 바로 "내부에서 더 진한 내부로 뛰어드는 것도 일종의 탈출인 셈이다."라고 언급한 문장 때문이다.

일반적인 탈출 방식이야 그렇다고 치고, "막힘+더 막힘=뚫림"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문득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에서 더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우리는 보통 '도망' 혹은 '갇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그것조차 탈출이라 말하는 발상은 좀 색다르게 다가왔다.

탈출 방향이야 어떻든 탈출만 하면 그만 아닌가? 앞으로는 안에서 안으로 파고든다고 해서 꼭 숨는다거나 도망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른 방향으로의 탈출'이라고 생각해야겠다.

그래야 또 다른 도전을 이어 나갈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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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How are you'의 가장 고약한 점은 내 상태가 어떤지,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자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떻지?'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런 질문을 던지다가 분노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아 맞다. 나 기분 별로지' 하고 잊은 일을 되살려내는 힘이 이 인사말에 있다.. 그러니까, 'How are you'의 가장 큰 문제는 나를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5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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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How are you?"라고 물었을 때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I'm fine, thank you." 말고 이 물음에 진정성 있는 대답을 하려면 잠시 멈춰야 한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나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가 말하는 "How are you?"의 고약성에 대해서는 나 역시 동감하게 된다. 쾌청하고 맑은 기분이었을 때는 괜찮지만, 우울하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이 물음은 다시 한번 나의 좋지 않은 상태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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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이 특히 취약한 발음인 'r'을 반복 연습했는데, 'word'와 'world' 때문에 애를 먹었다.
-'world'는 혓바닥이 앞니의 뒷면에 닿아야 해.
-세상에 닿기가 힘듭니다.
-입을 열듯이!
-세상이 안 열려요.
-열거라.

(...)

그리고 낭독할 시에 'windy'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웬디는 그 단어를 자신의 이름인 'wendy'와 구분하는 방식으로 발음을 설명했다.
-손으로 입을 가려봐.
-네.
-그리고 'wendy'해봐. 어때? 입에서 바람이 불지?
-제 입 냄새가 나요.
-'windy'는 좀 더 짧고, 입에서 바람이 불지 않아.
-둘 다 바람이 부는 것 같은데...
-'wound(상처)'도 마찬가지야. 상처를 발음할 땐 약간의 바람이 불도록 해.
-모르겠습니다.
5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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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이렇게 웃기기 있기 없기?

한국인들이 특히 영어 발음 교정할 때 엄청 애를 먹는데, 그때 모습이 떠올라 더 웃음이 나왔던 것 같다. 특히 재치 있게 받아치는 말에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면 당신 역시 발음 교정에 애를 먹어 본 경험이 있는 경험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혀는 세상에 닿지 않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요.
이젠 어쩌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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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통한다는 건 무엇일까. 그건 언어의 능숙도와는 무관한 것 같다.
10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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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공감되는 말이다. 특히 요즘 우리 사회 모습을 보면서 같은 언어를 쓴다고, 언어가 능숙하다고 다 말이 통하는 것은 아니구나 느끼게 된다.

떨어지는 이해력, 문해력, 어휘력은 물론, 여기에 더해 타인을 이해하고자 마음, 배려심, 공감 등이 결여되면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소통으로 연결되지 않고 불통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덕분에 한국말은 외계어로 들리는 현실.

반면 경청하고 공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꼭 능숙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의미와 뜻이 통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문득 오늘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통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밤이다.


각 언어별로 단어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기도 하고 또 비가 내리기도 한다. 은근히 재밌는 발상이라 읽으면서 새록새록 재미있는 상상이 떠올랐던 부분이다.

만날지, 피할지, 비켜갈지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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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릿의 말마따나 내가 느끼기에 영어는 좀 라이트 하다. 그래서 난 영어로 말할 때 목소리의 톤이 올라간다. 그 말을 하니 오릿이 한국어를 해보란다. "안녕하세요. 최선을 다하십쇼"라고 말하니 나의 완연한 저음에 놀랐다. 다른 사람 같다고. 난 그 점이 좋다. 내가 두 개의 성격, 두 개의 기분을 지닐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러니, 내가 두 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과거로 돌아가겠는가?
190~19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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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언어별로 목소리 톤과 억양, 높낮이 등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저자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다.

덕분에 같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 사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지금의 내 목소리, 이미지, 성격 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외국어를 배워보면 어떨까?

어쩌면 또 다른 성격, 다른 이미지의 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기하고 진귀한 경험이 될 것 같아 도전해 보고 싶어지는 동기가 될지도. 이 덕분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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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혼자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하루는 어느 농장에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농부의 집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는 정말 친절했죠. 그 사람은 왕년에 시인이었고, 알고 보니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 출신이었어요. 당시 그는 유망 있는 젊은 작가였는데 돌연 마음을 바꾸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대요. 

저는 가끔 이런 농담을 하곤 합니다. "글쓰기가 잘 안 풀리면, 그리고 앞길이 보이지 않으면 농사나 짓고 살아야지"라고요. 물론 농담이죠. 며칠 전에도 라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중에 농부가 되어야지." 그래서 제가 말했어요. "헛소리 하지마라." 농사가 어디 뭐 쉽습니까?

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만 해도 작가가 농부가 될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냥 하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이야기하면서 알았습니다. 글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그냥 내가 되는 것이라는 걸, 누구의 기대도 충족할 필요가 없다는 걸요. 그래서 저는 이제 압니다. 난 언젠가 정말 농부가 될 수도 있다는 걸요."
27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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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거나 혹은 너무 어렵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내 인생을 산다면 그게 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그냥 나고 내 직업이다.

작가였다가 농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농부였다가 작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 의지고 내 마음뿐이다.

그러니 언젠가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한다면 나는 무엇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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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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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인 글이다. 그렇기에 주제도 다양하고, 형식도 완전히 자유롭다. 저자가 생전 처음 경험한 아이오와 문학 레지던시 프로그램(IWP)은 저자에게 그야말로 새 바람을 안겨주었다.

새로운 영감의 글들을 떠올리게 했고, 새로운 언어를 통해 자유를 얻었으며, 모국에서 멀어짐으로써 새로운 정체성과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다소 불편하거나 어렵게 다가왔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오히려 자신만의 속도로 적응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삶도 이렇게 적응해 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통하면 통하는 대로, 안 통하면 안 통하는 대로, 들리면 들리는 대로, 들리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대로 거기에서 나만의 자유를 찾아 '만족'을 추구해 보는 것도 색다른 인생살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통하지 않아 속타는 일이 있었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만의 해석 방식으로 이 순간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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