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언어
김겨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은 내가 책과 그에 관련한 뭔가를 알고 싶거나, 잠들기 전, 혹은 관심 있는 주제가 있을 때 간간이 챙겨 보는 채널이다.


책에 관련된 채널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또 책과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저자의 일상도 볼 수 있어 나름 흥미롭게 보고 있다.


그런 저자의 채널을 간간이 챙겨 보다가 문득 그녀가 쓴 책이 궁금해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유튜브에서 보던 그 텐션과 비슷한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져 반갑기도 했고, 또 책을 통해 그러한 느낌이 든다는 게 어쩐지 신기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더불어 유튜브 외에 다방면에서 활동한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라디오를 진행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 외 다양한 곳에 칼럼 형태의 글 또한 기고했다는 것을 알고 좀 놀라웠다. 현재 대학원에서 철학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 말에 의하면 저자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첫 책으로,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쓴 글 중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라고 전한다.


다시 말해, 이 책에는 8년간의 김겨울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가 담겨 있어 '김겨울'이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글 중 개인적으로 공감이 가거나 마음에 와닿았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몇 가지 소개해 보려 한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거나 특정한 물건에 특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동시성의 감각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일. 더 이상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50%의 시청률을 기록할 수 없다.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도 누군가에게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트위터에서 하루 종일 회자되는 사건이 페이스북에서는 잠잠하고 지상파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해서 유명세를 보장받을 수 없다. 현재의 '유행'이란 주류로 분류되는 몇 개의 매체에 동시에 노출될 때에만 간신히 성립하는 종류의 것이다.

(...)

다만 바라건대 그리운 것은 서로 다른 우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감각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DJ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나는 또 한 번 돌아오는 하루의 짐을 조금 나눠 질 수 있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믿을 수가 있었다.

41~42페이지 中

=====


저자는 동시성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재를 안타까워하며, 한때 라디오를 들으며 다른 공간에 머물면서도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그때의 추억을 소환한다.


같은 의미 다른 단어로, 같은 의미 다른 표현으로 우리는 이미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동시성의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심지어 마주 보고 있는 상태에서조차 나는 나의 세상, 너는 너의 세상에 머물며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음에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

준비가 무의미해졌을 때, 그동안 들인 노력과 시간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이 갑자기 의미를 잃고 공허한 구멍으로만 남게 되었을 때, 우리는 허송세월을 보냈다고 말한다. 그 시간을 아까워하며 뭐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 아쉬워하고, 어떤 부모들은 자식의 등짝을 때리면서 그 시간을 타박할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던가?

(...)

아무런 의미 없이 흘러간 콩쿨 준비의 시간은 오랜 숙성을 통해 지금의 김겨울이라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하루에 네 시간씩 연주를 준비하는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무대의 설렘도, 음악의 즐거움도, 마치 DNA에 새겨진 듯 가지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준비의 마법이다.

(...)

그 무의미했던 준비의 시간은 아주 사소한 순간까지도 지금의 내가 되어 있다.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하나의 글감이 되어.

48~49페이지 中

=====


열심히 준비한 무언가가 결론에 다다르지 못하거나 혹은 인생의 어느 부분이 갑자기 의미를 잃어 공허하게 남겨졌을 때 우리는 '헛짓'을 했다며 자책하거나 아쉬워하고는 한다.


하지만 삶의 전체 그래프로 보면 그 또한 삶을 한 계단씩 쌓아 올리는 재료이자 경험치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시간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는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는 앞서 겪은 가수, DJ, 작가, 유튜버 등을 포함해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을 경험한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런 것들이 잘게 부스러져 DNA에 녹아들어 관심과 즐거움을 유발하고 거기에서 확장해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이라며,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어떤 독자가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며 '니가'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았다. 그 표현을 읽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독자는 다른 작가도 같은 호칭으로 부를까. 이것은 순수하게 내가 나이와 얼굴을 드러낸 사람이기 때문에 듣게 되는 호칭이 아닐까. 작가로서 고민한 시간을 단숨에 뭉개는 나이의 함정이란 무엇일까. 이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나이와 얼굴을 드러낸 사람이기 때문에 하게 되는 고민임을 깨닫는다. 이것 참 피곤한 일이네. 다른 작가들도 비슷한 고민을 할까. 이런 피곤한 무한 반복.

183~184페이지 中

=====


작가로서는 아니지만,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어 공감 가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요즘은 비대면으로 처리되는 것이 많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모든 것이 대면이었다.


그렇다 보니 외적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매우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려 보이면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여자면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헐뜯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기본적으로 어려 보이고 여성이면 그냥 아래로 보고 가는 게 기본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과거에는 잔심부름을 하거나 말을 놓거나 승진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의 같은 이유였다.


그리고 이런 것을 한번, 두 번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저자와 같은 고민을 무한 반복하게 된다. '여성이기 때문일까', '나이가 어려서 일까', '어려 보여서일까' 와 같은 피곤한 무한 반복에 빠지게 된다.


지금은 과거보다 줄었다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여전한' 사람들이 있어 피곤하다 느낀다.



=====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 커피를 준비하는 건 일종의 의식이다. 내가 지금부터 자리에 앉겠다는 다짐이다. 자리에 앉아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겠다는 신호다.

(...)

나는 나를 커피로 평생 속여왔기 때문에, 즉 매일 그날의 커피 덕분에 삶을 꽤 견딜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삶이 원래 견딜 만한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

오늘이 끔찍할 때도,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내일을 생각했을 때 도저히 좋은 게 하나도 없을 때도 나는 나를 속일 수 있다. 그 향과 그 맛과 그 안온함, 그 풍부함이 어찌 되었든 나의 좋은 부분을 지켜줄 것이라고 나를 위로한다.


아침에 의식이 돌아왔지만 아직 몸이 잠들어 있는 그때 커피를 생각한다. 기분이 개운해지면서 모든 게 리셋되는 느낌이 든다. 삶에는 리셋 버튼이 없고,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만, 커피는 매일의 가짜 리셋 버튼이 되어준다.


가짜라고 해도 누를 수 있는 버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누르는 내가 매일 기꺼운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을 리셋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뉴-셋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매일의 시작을 위한 새로운(뉴) 세팅. 매일의 목표는 그날의 커피를 마시는 것, 그럴 수 있게 살아 있는 것이다.

253~254페이지 中

=====


저자처럼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고, 새롭게 환기시킬 수 있는 뭔가를 가진다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게임처럼 원할 때 언제든 삶을 새롭게 리셋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우리의 삶은 그럴 수 없기에 나만의 의식이나 방식을 통해 리셋의 버튼을 눌러주는 것이다.


현재 개인적으로 루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인데, 내가 내 삶을 컨트롤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런 나 자신만의 암호 같은 무언가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커피를 하루의 다짐, 목표에 대한 의지, 정신적 고양감 등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나만의 다른 의미를 추가해도 좋고, 혹은 다른 무언가를 담아 활용하는 방식을 취해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 같다.


특히 요즘은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이 많기에 커피는 여러 수단이나 목적, 상징으로 활용하기 적합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나로 하여금 아침을 일깨우는 무언가, 나로 하여금 책상에 앉게 하는 무언가, 나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는 무언가, 나로 하여금 집중하게 하는 무언가 등등.


나로 하여금 '어떤 것'을 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지금부터 만들어보면 어떨까 한다.



*****


이 책을 읽으며 현재의 김겨울이 아닌, 지금을 있게 한 김겨울의 시간을 엿볼 수 있었다. 항상 잘 웃고 밝아 보이는 모습 뒤에 새삼 다른 면모가 있구나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머릿속, 기억 속을 탐구하고 파헤쳐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 저자 자신이 풀어놓는 글을 통해 잠시 잠깐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수 있어 반가웠다.


이런 속 깊은 이야기들을 요즘은 쉽게 풀어놓거나 공유하는 일이 드물어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매일 매 순간 SNS 통해 가짜 행복을 말하거나, 좋은 순간만 전하려고 하는 세상 속에서 어쩐지 진짜를 만난 것 같아 더 그렇다.


그녀만의 어법과 문체가 유튜브에서 보던 것과 겹쳐져 어떤 부분은 음성지원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조금 재밌게 다가오기도 한다.


더불어 홀로 마음에 새겨두었던 공감 가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어 오랜만에 빗장문을 풀고 마주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또 어떤 반가운 글을 마주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