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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1월
평점 :
"극과 극의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
책을 읽으면서 책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책들은 어딘가 모르게 자꾸 나의 신경을 자극한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품고 있길래 이토록 많이 언급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읽을 책 목록에 담아두고는 시간이 될 때마다 아껴둔 사탕을 꺼내 먹듯 한 권씩 꺼내 읽어보고는 한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였는데,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쉽게 읽히는 것에 한번 놀랐고, 또 생각보다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 있어 또 한 번 놀랐다.
단순히 모험담을 담고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상 삶에 대한 철학과 사는 방식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드는 책으로, 궁극적으로는 모두 행복을 향한 발걸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총 2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주인공인 '나'와 자유로운 영혼인 '조르바'와의 만남부터 이별(죽음)까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는 정반대 삶을 살아가는 이 둘의 격렬한 부딪힘과 더불어 어느새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극명히 다른 삶, 다른 시대를 살아온 두 사람이 우연히 한 카페에서 마주치면서 크레타 섬으로 동행하게 되고, 이로써 이들은 서로의 삶과 삶의 방식을 공유하게 된다.
대부분은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조르바의 이야기를 주인공인 '내'가 듣는 형태를 취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지식인이자 '최후의 인간'인 나는 그런 자유로움을 동경하게 된다. 더불어 어느 순간 나는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되면서 마음속에 꽁꽁 싸매두고 있던 이념과 갈등으로부터 해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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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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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는 1917년 친구 길오르고스 조르바와 갈탄 광산을 운영하다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하게 된 자전적 소설로, 두 남자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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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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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식인이자 이성적 인간의 표본
-서른다섯 살
-책과 잉크를 통해 세상을 살아온 사람
■알렉시스 조르바
-원시적인 인간이자 본능에 충실한 인간의 표본
-예순다섯 살
-스스로를 모험을 즐기는 신드바드라고 여김
-순간순간 현재를 즐기는 삶을 살아옴
-다양한 여성들과 만남과 이별을 경험함
-몸으로 직접 겪은 삶을 살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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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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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날 친구가 자신을 두고 책벌레라고 놀리는 소리를 듣고 분노를 느끼게 되는데, 그 단어는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모든 혐오감이 그 한 단어로 의인화 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 말은 내 안에서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자라나 내가 종이 뭉치를 내던지고 행동하는 삶으로 뛰쳐나갈 구실을 찾게 만든다. 그러던 중 마침내 간절히 바라던 기회가 찾아왔고, 리비아와 마주 보는 크레타의 해안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나는 막노동자나 농부 같은 소박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책벌레라는 종족과는 아예 인연을 끊어버릴 작정을 하게 된다. 아예 삶의 방식을 바꾸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게 피레에프스 항구에서 크레타행 배를 기다리던 중 카페에 잠시 대기 중이던 나는 유리창을 통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 어디로 가냐고 묻고는 이내 자신도 함께 크레타로 데려가 달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그는 알렉시스 조르바로, 별명은 '빵집 주걱'이라 소개했다. 외적으로는 예순 정도의 야위고 키가 크며 눈이 반짝이는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특이했던 점은 산투르라는 악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르바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그가 생동하는 가슴, 격렬한 입담, 대자연과 어우러진 위대한 야생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그동안 찾아 헤맸으나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로써 나는 조르바에게 크레타 섬에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게 된다.
그렇게 배를 타고 크레타 마을에 도착한 나는 마을의 장로인 마브란도니를 만나 인사를 나눈 후 둘은 오르탕스 부인의 여관에 짐을 풀고 그곳에서 함께 묵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크레타 섬에서의 여정이 시작된다. 나는 과거 외할아버지가 여행객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에 집착했던 것처럼, 조르바의 여행이야기를 듣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가 입을 열면 온 마케도니아가 내 눈앞에 펼쳐지는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르바는 그렇게 매일 저녁 나를 그리스, 불가리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갔다.
나는 크레타에서 이루어야 할 두 가지 목표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붓다에게서 벗어나고, 형이상학적 근심을 일으키는 모든 문장을 멀리하여 부질없는 불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 분명한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크레타에서 내가 임대한 갈탄 광산에서 조르바는 관리자로써 갱도를 파는 동안, 나는 '붓다' 원고를 펼쳐 내 몫의 갱도를 파기 시작했다. 일상 속에서 영감이 떠오르거나 심적 불안이 도사릴 때면 나는 하루 종일 글을 쓰며 마음을 비워냈다.
여기에는 안도, 자부심, 혐오감 등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는데,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쓰는 것에 몰두했다. 이 원고를 마무리하고 잘 묶어서 봉인하는 순간 나는 자유의 몸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조르바는 매일을 본능에 충실하며 살아갔는데, 항상 절제하며 살아가는 내가 답답해 보였는지 종종 본능에 충실하라며 나를 떠밀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성에 묶여 그 유혹을 뿌리쳤다.
조르바는 낮에는 갱도에서 일을 하고, 밤이면 이성과 밤을 보내거나 아니면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는데, 그의 이야기에 이유를 물을 때면, '그놈의 왜요, 왜요!'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삶의 모든 순간을 몸으로 체득한 조르바는 그 모든 상황을 말로 다 풀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에 비해, 이성적 판단과 책을 통해 삶을 살았던 나는 오히려 그가 말하는 삶의 모습이 되려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둘은 살아온 방식이 극과 극으로 달랐고 그래서 더 나는 조르바에 대해 더 호기심과 호감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조르바가 이성을 위해 자신의 돈을 펑펑 써도, 나는 크게 화를 내거나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없는 빈자리가 크게 느껴져 빨리 돌아오라는 전보를 치는 이해 못 할 행동을 한다.
조르바는 돈을 더 크게 벌기 위해 갱도를 파는 일을 함과 동시에 케이블 철도 건설을 추진하지만, 결국 이것은 폭망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이들은 갱도와 관련된 사업을 접게 된다.
나는 이 일로 모든 것을 잃게 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기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조르바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달라는 요청을 하는 동시에, 춤추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
모든 일을 그르친 순간에야 영혼의 인내력과 용기를 시험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깨닫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충만한 기쁨과 자유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자유와 함께 마음껏 놀게 된다.
이후 나와 조르바는 각자의 삶을 향해 나가가기로 하고, 이별을 고하게 된다. 처음에 몇 년간은 엽서를 통해 안부를 전하기도 했지만, 조르바가 발견한 것을 보러 오라는 요청을 거절한 뒤부터는 조르바와도 연락이 끊기게 된다.
그리고 나는 꿈을 통해 친구들의 죽음을 직감함과 동시에 하나 둘 비보를 전해 듣게 된다. 친밀하지만 어딘가 비밀스러운 친구처럼 보였던 스타브리다키의 죽음 후 또 몇 년이 지난 뒤 조르바의 죽음 또한 예견하게 된다.
그리고 문득 나는 조르바에 대한 글을 써야 할 것 같은 강렬한 기운을 느끼지만, 글을 쓰면 왠지 그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 계속해서 미루게 된다.
하지만 결국 성스러운 힘에 이끌려 나는 불쑥 종이를 꺼내 들고 조르바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르바에 대한 일대기는 몇 주 만에 완성된다. 그리고 이내 조르바의 죽음에 대한 소식 또한 듣게 된다.
그는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 달라는 유언과 함께 자신이 아꼈던 산투르를 함께 남기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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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았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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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할 때, 혹은 주머니가 텅 비었을 때 산투르를 연주하면 늘 기운이 나곤 했지. 산투르를 연주할 때는 옆에서 말을 걸어도 안 들리고, 들린다 해도 말을 할 수가 없지. 아무리 해도 소용없어. 입이 안 열린다네!"
(...)
"오, 아직도 모르겠나? 열정, 열정 때문일세!"
2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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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만 따져보면, 서른다섯 살의 '나'와 예순다섯 살의 조르바는 마치 서로의 영혼이 바뀐듯하다. 본능에 충실하고 열정이 가득한 조르바에 비해 이성적이고 차분한 나는 완전히 극과 극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모든 풍파를 몸으로 견디며 경험해온 조르바는 예순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도 열정에 휩싸여 살아간다. 한 번도 열정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나는 그래서 어쩌면 더 조르바에게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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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짐승이라고! 잔인하게 굴면 굴수록 자넬 존중하고 무서워하는 게 인간일세. 친절을 베풀면 눈깔을 파내려 들지. 거리를 두게, 보스! 기를 세워주지 말란 말이야.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는 둥,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둥 이런 소리를 했다간 당장 '자네의' 권리부터 짓밟고 나설 걸세. 자세의 빵을 빼앗고 굶어 죽게 할 거라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보스. 다 자네를 위해 하는 말일세!"
8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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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부딪히며 세상을 살아온 조르바는 인간은 짐승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평등과 존중, 동등한 권리를 내세워 타인에게 선의를 베풀려는 나에게 거리를 두라며 강하게 어필한다.
어쩌면 이 조언이야말로 현실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나에게 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한 번도 직접적이고 분명한 인간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는 인물이기에 더 날카롭게 다가오는 조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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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믿지 않네. 오직 나, 조르바를 믿지. 조르바라는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더 나아서가 아닐세, 눈곱만큼도 나은 점이 없지! 다른 놈들과 똑같은 짐승인걸! 하지만 조르바만이 내가 지배할 수 있고 꿰뚫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서 그렇다네, 나머지는 다 유령에 불과해. 나는 내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소화하네. 그 외의 것은 다 유령이야. 내가 죽으면 다 같이 죽는 걸세. 이 조르바의 세계도 몽땅 가라앉는다고!"
8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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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인 나에 비해 현실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조르바의 이 말은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든다. 타인의 말이나 행동보다 나 자신을 우선적으로 믿는 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다른 인간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나 자신뿐이며, 내가 존재해야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온전히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경험하고, 보고, 느끼는 것이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유령 같은 타인의 말에 너무 많이 신경 쓰고 휘둘리고 있는듯하다. 어쩌면 주인공인 '나'가 그런 우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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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도 없으니, 분명 사상 또한 왜곡되지 않았으리라. 다만 세상만사를 모두 경험했겠지. 그리하여 생각이 트이고 마음은 너그러워지고 그러면서도 본래의 기개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리라. 우리가 너무 복잡해 풀 수 없다고 여기는 문제도 그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끊은 알렉산더 대왕처럼 단칼에 베어내는 것이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였기 때문에 겨냥이 빗나갈 염려도 없다.
(...)
우리 배운 이들은 그저 하늘을 나는 머리가 빈 새에 불과한 것이다.
9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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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르바를 보며 자신과 조르바에 대해 비교 분석한 문장으로, 지식인인 자신을 머리 빈 새에 비유한 것에 비해 조르바는 심지가 곧고 속이 꽉 찬 인물로 비유하고 있다.
삶을 온몸으로 경험한 자와, 책을 통해 머리로만 세상을 경험한 자의 특성을 신랄하게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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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포도주 한 잔, 구운 밤, 초라한 작은 화로, 파도 소리면 충분했다. 그리고 행복이 바로 여기, 이 순간에 와 있다는 것을 느끼는 데에도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 하나면 충분했다.
11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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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멀리서만 찾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조르바와 함께 지내며 나는 비로소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행복 그 자체가 얼마나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지도 함께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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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바로 골칫거리일세."
조르바가 말을 이었다.
"죽음은 오히려 평온하지. 산다는 것-그게 어떤 의미인 줄은 아나? 허리띠를 풀고 골칫거리를 찾아 나선다는 뜻일세!"
14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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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읽는데 절로 '정답'이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죽음은 평온하다. 고로 살아가는 것에서 평온을 찾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생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그렇다면, 그냥 그 자체를 받아들이면 어떨까? 골칫거리를 찾고 있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조금은 현실이 덜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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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바로 최후의 인간이다!"
나는 울부짖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비밀이며 엄청난 의미라는 걸 알았다. 붓다야말로 스스로를 비워낸 '순수한'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의 내부는 공허하며 그가 바로 그 공허 자체였다. '네 육신을 비워라, 네 영혼을 비워라, 네 가슴을 비워라!' 그는 외친다.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물은 흐르지 아니하고 잔디는 자라지 아니하고 아이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
'붓다'를 쓰는 일은 사실 더 이상 문학적 행위가 아니었다. 내 안에 도사린 엄청난 파괴력과의 생사를 건 전투이자 내 심장을 갉아먹는 거대한 부정과의 싸움이었고, 이 싸움에 내 영혼의 구원이 달려 있었다.
195~19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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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붓다'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고로 나는 지식인이고 아는 것이 많지만 내부는 공허함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다.(어찌 보면 내면을 수련하는 종교인을 대변하는 인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주인공인 '나'는 안도, 자부심, 혐오감, 성적 쾌락 등을 비우기 위해 계속해서 붓다를 써 내려간다. 행동하지 않고 털어내기 위해 계속 써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이성을 끌어모아 붓다를 완성하여 봉인하는 순간,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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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지냈던, 인간의 온기로 충만했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조르바와 함께 있으면 시간은 더 이상 예전의 시간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수학적 나열도, 풀 수 없는 내면의 철학적 문제도 아니었다. 마치 따뜻하고 결 고운 모래처럼 나는 시간이 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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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안에서 떨고 있던 추상적인 생각에 형체를 주고 온기와 사랑, 생명을 주었다. 그가 없는 지금, 나는 다시 떨고 있구나."
나는 종이 한 장을 꺼낸 뒤 일꾼을 불러 급히 전보를 치게 했다.
"지금 당장 돌아오기 바람."
22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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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비로소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된다. 느끼는 것을 마음껏 표출하고, 또 경험하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때문에 케이블 철도 건설을 위해 자재를 사러 잠시 조르바가 다른 마을로 떠났을 때 나는 더 절절히 느끼게 된다. 그가 곁에 없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쓸쓸한지를 말이다.
이처럼 나에게는 조르바가 곁에 있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렇기에, 그가 이성을 유혹하는 데 자신의 돈을 펑펑 썼다고 이실직고했음에도 나는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빨리 돌아오라는 말을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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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네."
그가 말했다.
"믿음이 있나? 그렇다면 낡은 문에서 떼어낸 나뭇조각도 성스러운 유물이 되지. 믿음이 없다면? 성스러운 십자가를 통째로 갖다 준대도 벌레 먹은 문설주만도 못할 걸세."
32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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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핵심 문장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말은 쉽게 주고받는 말이지만, 그만큼 가볍게 여기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부터라도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한 믿음을 가져보면 어떨까? 마음먹기에 따라 그 길은 고속도로가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진흙탕의 길이 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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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부러울 뿐이었다. 그는 내가 펜과 잉크만으로 배우고자 했던 것을 피와 살로 싸우고, 죽이고, 입 맞추며 살아왔다. 내가 의자에 죽치고 앉아 고독을 벗 삼아 하나씩 해결하려 했던 문제를 그는 산속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칼로 베어버린 것이다.
32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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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내'가 조르바를 보며 자신의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붓다'를 쓰며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나는 그를 보며 부러워했음을 알 수 있다.
온몸으로 부딪히며 생을 살아온 그의 긍지와 신념, 경험을 예순다섯 살 된 노인에게서 느끼면서 나는 서서히 그에게로 동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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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붓다 원고를 펼쳐들었다. 원고는 마무리되어 있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붓다는 꽃이 만개한 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다. 한 손을 들어 자신을 이루는 다섯 요소-흙, 물, 불, 공기, 정신-에게 해체 명령을 내렸다.
이 고뇌의 상에 더 이상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미 그것을 넘어섰으며, 붓다에게 바치는 나의 찬미 또한 끝난 셈이었다-그리하여 나 또한 손을 들어 내 안의 붓다에게 사라질 것을 명령했다.
나는 서둘러 언어의 도움을 받고 그 퇴치 능력을 빌려 붓다의 몸과 정신과 영혼을 해체했다. 그리고 가차 없이 마지막 문장을 휘갈기며 최후의 탄성을 내뱉은 뒤 붉은 연필로 내 이름을 크게 적었다. 이제 완성됐다.
34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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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를 완성함으로써 나는 그토록 자신을 옭아매던 것으로부터 탈피하게 된다. 그리고 몸과 정신과 영혼을 해체함으로써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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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조르바-제가 틀릴 수도 있지만-이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말마따나, 자기 자신의 삶을 살며 먹고, 마시고, 사랑을 나누고, 돈을 벌고, 유명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삶은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모든 사람들은 하나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깨우치고 할 수 있는 한 깊이 사랑하며 봉사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전 우주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 동물, 나무, 별,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여기고, 우리 모두가 하나의 끔찍한 투쟁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무슨 투쟁이냐고요? ...... 물질을 정신으로 만드는 투쟁이지요."
39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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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상을 '나'와' '조르바'를 대신해서 표현하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 세 가지 종류의 인간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꼽자면 마지막을 이야기하겠지만, 대체적으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인간상은 아마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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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으로는 완전히 패했을지 모르나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점령한 사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긍지와 기쁨을 누린다. 표면상의 재앙이 지상 최고의 확고부동한 행복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41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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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갱도와 케이블 철도가 폭삭 주저앉으며 외적으로는 완전히 패했다. 가진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긍지와 기쁨을 얻었다.
조르바와 함께 하며 '붓다'를 완성했고, 이로써 자기 내면의 자유를 얻었으며, 덕분에 온전히 자기 내면을 점령할 수 있었다.
나는 고로 확고부동한 행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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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물개, 화냥년, 암염소, 걸레 같은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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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의 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위와 같은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들에 눈에 띈다. 그리고 이런 말 뒤에는 "하느님, 그녀를 축복하소서!"와 같은 말이 잇따라 연결되는데,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단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이 든 여성이나 몸을 파는 여성들을 낮잡아 보거나 비하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뒤에 마치 '아멘'과 같은 느낌으로 붙는 문장들을 떠올려봤을 때는, 그 시대에 천대받던 여성들의 지위와 시대상을 거침없이 나타낸 단어라는 생각도 든다.
조르바가 이토록 마구잡이식으로 부르는 호칭들의 대상은 보통 전쟁 속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여성들이나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성들, 그리고 자신의 욕정을 풀어주는 여성들을 지칭한다.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 단어들을 거침없이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껄끄럽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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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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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의 극과 극의 인물을 대치시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과연 어떤 삶이 옳은가라는 판단보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인공인 '나'는 지식인으로 이성을 중시하며 신념을 중요하게 여기던 인물이다. 반면, 조르바는 본능에 충실하며 오늘의 행복을 좇는 인물이다.
중 후반부에 들어서면 '나'는 조르바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전부가 아니며,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표현함으로써 행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욕망과 감정을 억제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렇듯 보다 본능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르바와 같은 인생을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믿고 구원함으로써 인생을 보다 당당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조르바의 모습은 분명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전한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며,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는 춤을 추는 등 현재의 감정과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삶의 진정한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숭고한 이념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삶이든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한 짐승의 삶이든 우주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목적(행복에 이르는 길)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므로, 방법이야 어찌 됐든 나만의 행복을 향한 길을 나아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조르바가 추구했던 카르페디엠(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만은 놓치지 말길 바란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은 영원히 아닌, 찰나이기에 마음껏 사랑하고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지나친 도덕이나 금욕주의,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진짜 내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조르바의 충고를 새겨들어보자.
그리고 주인공이 '붓다'를 버린 것처럼 나를 옭아매고 사로잡고 있는 고귀한 이념을 끊어내보자. 그러면 보다 가까이에서 행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