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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들
고은지 지음, 장한라 옮김 / 엘리 / 2024년 8월
평점 :
"과거, 역사, 시대, 출신, 고난, 관계, 관습 등에서 해방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해방자들>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광복이나 전쟁 등의 시대적 배경을 가진 이야기에 대한 내용일 거라 추측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짐작이었다.
이 소설 속에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던 이민자들, 그리고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던 한국인들, 자신의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코리아 디아스포라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상황과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아픔과 고난을 겪는다.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론 가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들은 한 시대를 살아내며, 관념에 묶이거나 과거에 갇히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출신이나 관습 등에 얽매이며 더 큰 고통을 겪게 되는데 마침내는 이런 것들과 화해하며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 가족의 스토리를 중심으로 풀어내기는 하나, 전체적인 스토리를 보기보다 각각의 이야기 속에 담긴 내면에 더 집중해서 보기를 추천한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한 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역사, 전쟁, 사건, 사고, 분열과 상처 등에 대한 이야기를 인물 중심으로 세밀하게 짚어내며 풀어내고 있다.
더불어 상황이나 감정 상태 등을 은유, 묘사, 상징에 비유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두 가지 반응을 이끌어 낸다. 첫 번째는 갸우뚱하는 반응으로 무얼 의미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 해당된다. 두 번째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더 깊게 파고들게 함으로써 제대로 몰입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때 유의할 점은, 독자에 따라 다른 방식,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에 받아들이는 상황이나 감정은 각기 다를 수 있다 생각한다.
매 단락은 특정 인물을 앞세워 전개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전체적인 이야기를 어떤 시점에 누구를 통해 전해지느냐가 다르다고 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약 4대에 걸친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한 가족의 분쟁, 상처, 아픔, 질투를 비롯해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보면, 일제강점기, 독재 정권과 독재자, 전쟁, 점령, 분열, 납치, 고문, 그 외 사건사고 등이 다수 포함된다.
살아남기 위해 흩어지고, 또다시 뭉친 한국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바탕으로, 허구의 인물을 입힌 형태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겪었던 일들을 그냥 넘기기는 쉽지 않다.
한국과 미국, 일본이 배경이지만 실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한국인이다. 그래서 어쩌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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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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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요한
-어릴 적부터 여섯 가지 언어를 읽고 쓸 정도로 똑똑한 인물
-가족이 생긴 이후 동물에서 사람 꼴을 갖추게 됨
-가족: 아내와 딸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함
■남조
-요한의 아내
-마흔 살에 동맥류로 사망
-늘 초록색 옷을 즐겨 입음
■인숙
-요한과 남조의 딸
-결혼 전 인숙은 '성'에 있어 수줍고 순수한 사람이었음
-늘 조심스러운 성격
-엄마 남조의 죽음 이후 갑자기 아버지도 잃게 됨
-결혼 허락을 받은 그날 성호와 결혼
-결혼 후 남편인 성호는 홀로 미국으로 떠나고 시어머니인 후란과 단둘이 한국에서 생활(첫날밤에 바로 임신)
-스물일곱에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로 성호를 따라 이주
-미국이주 후 생활은 녹록지 않았음
-남편과 함께 살게 되면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심해짐
-서른다섯, 임신 12주째 남편의 폭력으로 둘째 아이를 유산함
■성호
-인숙의 남편
-열한 살 때 아버지가 가족을 두고 홀로 갑자기 떠남(이때 아버지 나이 서른셋)
-결혼 전 아내와 사이가 각별했으나 결혼 후 약 10년간 관계가 매우 소홀해짐
-어머니 후란이 사망 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내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
-후란이 떠난 덕분에 성호는 비로소 부부와 가족을 위한 옳은 결정을 내리기 시작
■헨리
-인숙과 성호의 아들
-어릴 때 로버트에게 토토라는 개를 선물받아 키움
-부모 사이가 좋지 않아 어릴 적 불안한 관계 속에서 성장
-열여덟 살 아이 아빠가 됨
■제니
-북한 출신 한국 사람
-로버트의 글을 기록하는 일을 하면서 헨리를 알게 됨
-헨리와 사이가 가까워지며 임신을 하게 됨
-이후 헨리와 함께 헨리의 부모가 이사한 터코마로 가서 함께 살게 됨
■하루
-헨리와 제니의 아이
■후란
-성호의 어머니이자 인숙의 시어머니
-아들에 대한 집착이 심함
-아들인 성호와 미국에 따로 떨어져 살 때보다, 오히려 함께 살게 된 이후 시집살이를 심하게 함
-뇌졸중으로 사망(사망 직전 며느리 인숙과 화해하게 됨)
-며느리를 괴롭혔으나 심적으로는 며느리에게 많이 의지했음
■로버트
-인숙보다 두 살 많으며, 인숙이 미국 이주 후 식당에서 일할 때 알게 됨
-인숙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나 관계를 더 발전시키지 않고 수호천사 역할을 자처함
-인숙이 힘들 때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나타나 도움을 줌
-시장 선거에도 출마하고 일간지 <해방 신문>을 창간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함
-인숙이 가장 힘든 순간 관계를 갖기도 함
-부산 컨벤션홀에서 온 강연 요청으로 오랜만에 한국으로 출장을 가려 하지만 도중에 수배되어 경찰에게 인계됨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놓지 않고 과거와 역사를 알리는 역할에 최선을 다함
■고일
-로버트의 어머니
-열여덟 나이에 자기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아버지의 이름인 고일을 자기 이름으로 삼음
-일본 우키시마 호의 피해자 중 한 명
-호랑이 모양의 대한민국 지도를 문신으로 새기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됨
■고일의 아버지
-부산 남자로 1953년 6월 한국전쟁 중 휴전 한 달 전에 폭격에 맞아 사망
<그 외 등장인물>
■교도관
-스물한 살 나이에 독재 정권의 교도소장을 맡고 있음
-교도관들의 상관이 된 그는 교도관이라고만 불림
■검시관
-교도관의 요청으로 요한의 시신을 부검하고 그의 죽음을 가족에게 알린 사람
■도모코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티켓 발권 업무를 맡고 있음
-로버트의 한국 출장 길을 가장 먼저 막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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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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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주요 인물은 '인숙'이라 말할 수 있다. 그의 부모님 세대, 그리고 그녀 세대, 그다음으로 그녀 자식과 손자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한국인이다. 한국을 시작으로 미국으로 이주하며 미국이 주요 배경이 되지만(가끔 일본이 등장하기도 함) 역시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한국인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모두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다. 그게 토종 한국인이든, 북한 출신이든, 미국 이민자든 상관없이 말이다.
외부로는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군사정권 독재자, 삼풍사고, 세월호 사건 등을 겪어오며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점령, 전쟁, 납치와 고문, 분열 등을 겪게 된다. 여기에 더해 내부로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던 세대 차이, 신념 갈등 등을 겪으며 힘겨운 날들을 보내게 된다.
상처는 분열을 야기하고, 갈등을 심화하며 점점 더 관계를 악화시킨다. 결혼 전 그토록 애틋했던 인숙과 성호 부부가 결혼 후 약 10년 동안 나눈 이야기가 겨우 한 달 정도라고 말할 정도면 얼마나 상황이 좋지 않았는지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끝까지 상처를 품고 살아간다. 마음에서 피가 철철 흐를지언정 내 안에 담아두고 살아간다. 인숙은 남편의 폭력으로 둘째 아이를 유산하는 일을 겪기도 하는데 무섭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는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시간이 흐르고 시어머니 후란은 뇌졸중으로 사망하게 되고, 죽기 직전 극적으로 며느리 인숙과 화해를 하게 된다.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존재가 사라지고 난 후 집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데, 남편 성호는 비로소 아내를 제대로 마주 보게 된다.
과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족을 위한 삶에 집중하게 된다. 여기에는 로버트와 아내의 사이를 알게 된 것도 한몫했는데, 어머니의 죽음과 맞물려 적절한 기회를 잘 포착한 듯하다.
덕분에 10년 만에 부부는 화해를 하게 되고, 다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들의 아들인 헨리는 이를 긴밀하게 바로 알아채게 되고, 그 역시 새로운 사랑을 찾게 되면서 또 다른 가족을 만들게 된다.
이후로 인숙과 성호 부부는 오로지 자신들을 위한 삶을 펼쳐나가게 된다. 아내가 원하던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고, 그곳에서 아들 부부와 함께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과거의 관습이나 출신, 시대, 차별과 같은 불합리함은 더 이상 없다. 그저 현재에 충실하며 서로를 보듬고 치유하는 일들만 가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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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와 은유가 가득했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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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박힌 바위를 아내로 대신했고, 그다음에는 아내를 지표면에 놓인 묘비와 맞바꿨다.
1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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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아내인 남조 죽음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땅에 박힌 바위'와 '묘비'를 통해 아내가 땅에 묻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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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는 고일이 출산을 할 때 배에 생겨난 봉합 자국을 떠올렸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 사이에 자리 잡은, 안쪽 정원으로 가는 비밀 문이었다. 로버트는 고일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그 문을, 그 문으로 향하는 길을 찾으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는 자신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13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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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와 어떤 상징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뒤엉켜 로버트의 마음을 대변하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안쪽 정원으로 가는 비밀문이 단순히 자궁을 뜻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이 뜻하는 안락함, 편안함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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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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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성호 너한테는 눈이 있는 게 확실하냐고 물었다. 무언가를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제일 중요한 방법은 눈을 쓰지 않고 보는 거라면서 말이다.
(...)
"만약에 슬퍼지거들랑, 이리로 들어가려무나." 아버지는 성호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는 아버지의 손을 밀쳤다. "어딜 가라고요?"
"안에 갈 곳이 있잖니."
(...)
"뭔가 잘 안 풀릴 때면, 이곳으로 가면 된다."
42~4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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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성호와 보내는 시간에 나눈 대화 중 일부분이다. 아버지는 성호에게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말한다. 더불어 슬픈 일이 생기면 마음으로 도망치(혹은 들여다보라고)라고 말한다.
어린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임을 모르는 아들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어른들의 사정으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추억에 대한 회상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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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죽으면서 저는 침묵하는 법을 배웠고, 20대 후반에는 경청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저를 다르게 대했어요.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 얘기를 저한테는 했죠.
7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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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은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었다. 앞서서는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는 수근 되는 소문들에 한동안 힘든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교도관의 배려로 시신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가족을 모두 잃고 난 후 사람들은 인숙을 다르게 대했다. 인숙은 어쩌면 자신의 그런 현실을 깨닫고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입을 닫고, 귀를 닫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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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거쳐온 방들은 모두 최고의 기억과 최악의 기억을 다 품고 있었죠.
(...)
그 모든 방에서 저는 제가 빚진 삶을 꿈꿔요.
7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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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장소에 깃든 수많은 기억들 사이에 숨겨진 나만의 빚.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알듯 모를 듯, 알쏭달쏭함만 남긴 인숙의 감정은 인숙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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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세상의 삶이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질수록, 나는 더더욱 내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갔다. 마치 지금처럼, 내 위로는 라일락 정원이 허리께부터 휘어져 있었다. 만약 내 표정을 보았다면, 내가 포기할 수 있었다는 걸 누구도 믿지 못했으리라. 그 무엇도 더는 내게 상처를 줄 수 없었으므로. 나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호랑이가 돌보는 정원 한가운데서 빛나는 빛이 되었다.
1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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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읽는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어쩌면 이것은 포기와 내려놓음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앞서 성호의 아버지가 성호에게 마지막으로 해준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바깥이 힘들어질수록, 내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가는 인숙을 통해 그녀는 참 강한 사람이구나,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랬기에 그 숱한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이때가 성호의 폭력으로 둘째를 유산했을 시기라는 것을 고려해 보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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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가 물었다.
"북한 같은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걸 왜 그렇게 어려워하십니까?"
성호가 말했다. "북한과 관련된 건 어떤 것도 원치 않아요."
"그렇지만 그건 당신의 일부예요." 로버트가 대답했다. "끔찍한 부분까지도 말이죠."
로버트 말이 맞았다. 전쟁은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싸우려는 마음이 드는 것이야 자연스러웠지만, 애써 이유를 정당화하려 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162~16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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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는 계속해서 상황을 회피하고 도망치는 인물로 그려진다. 부부관계에서도 장장 10년을 어머니를 앞세우며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전쟁은 그렇게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로버트와 성호의 대화 속 '북한'은 어떤 것에 대한 비유 혹은 상징을 대신한 단어일 뿐이다.
시대적 배경상 북한에 대한 이야기가 시기적절한 대화의 주제가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어떤 것을 대신하는 말이기도 하다.
로버트는 대한민국 안에 남한과 북한이 있듯이, 부정적인 어떤 면 또한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라 말한다. 여태껏 모든 것을 회피하며 살아왔던 성호에게 있어 이것은 내심 자신도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핑계를 대며 더 이상 빙빙 둘러대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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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가 성호에게 말했다. "저는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벽이 있다고 생각했더랬죠." 그렇지만 뉴스에 나온 영상을 보고 깨달은 겁니다. 벽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는 걸요. 벽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16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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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하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런 문장을 마주할 때다. 존재하지 않는 벽을 홀로 상상하고 가늠하며 싸우고 있는 나를 마주하는 때.
로버트는 핵심을 찌르는 말로 사람들을 깨우치며 반전을 꾀하는 역할을 한다. 상처를 입고 주저앉은 인숙에게는 자신의 입을 빌려 상처를 보듬어주고,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려고 하는 성호에게는 날카로운 송곳 같은 말로 깨달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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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권위가 높은 사람들은 위험해."
(...)
"그 사람들 자아는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보는 능력에 의지하고 있거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자마자 독재자가 돼."
18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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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권위가 높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독재자로 불렸던 사람들, 이를테면 히틀러, 무솔리니, 김정일, 푸틴, 스탈린 등은 자신들의 신념에 사로잡혀 독재자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있어 도덕적이라는 의미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자신의 사상에 국한되는 도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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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식탁으로 불러들인 건 아들이 아니라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나를 향해 달려오면 환한 빛, 빛을 내뿜었다.
25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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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는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새로운 가족이자 아들의 여자이며, 인숙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었다. 임신한 몸으로 들이닥친 그녀를 인숙은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였다.
새로운 집에서 그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덕분에 인숙은 그녀에게서 빛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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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가지 배운 게 뭐냐면, 인생의 단계마다 옷이 너를 맞이하러 온다는 거야."
(...)
"옷은 네가 어디로 가는지 확신하게 해주는 법이거든"
25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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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옷을 달리 입는다. 그래서 옷은 지금 나의 상태 혹은 어느 장소에 있는지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생의 단계마다 옷이 나를 맞이하러 온다는 말'은 시적으로 다가오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 줄 희망의 아이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엄마의 유품이었던 초록색 한복은 인숙의 결혼식 예복이었으며, 또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제니에게 전하는 마음이자 새 가족으로 제대로 인정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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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曰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을 때는 아무도 믿으면 안 돼. 다른 사람 말은 절대 듣지 마."
(...)
인숙 曰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희망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태양은 잔해와 물 위는 물론이고 세상 모든 이와 모든 곳에 여전히 빛을 비춰주기 때문에.
26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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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가라앉은 사건을 두고 각기 다른 말을 하는 성호와 인숙의 말에서 이들의 성향과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당장의 현실적인 면을 고려했을 때는 성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우리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마지막 믿음, 그리고 긴 안목으로 인생을 살펴봤을 때는 인숙의 말이 옳다.
어떤 인생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생각과 관념이 나뉠 수 있기에 옳다 그르다로 단정 지어 말하기에는 복잡한 사안이다. 선택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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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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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견뎠을까 싶은 일들이 이 가족들 사이에 일어났다. 보통 이민이나 해외 거주를 이야기할 때 인종차별이나 소수 집단의 무력함, 경제적 궁핍 등을 많이 떠올리는데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내부의 갈등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상처받고, 날을 세우며 경계태세를 굳건히 한다. 이들은 무엇에 갇혀 이토록 서로를 할퀴며 살아온 걸까?
외부에서 그 큰일을 겪고도 오히려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의 신념과 사상, 권위의식, 세대 차이 등을 앞세우며 서로를 이방인 취급하는 상황은 어찌 보면 어이없으면서도 더 큰 상처로 다가온다.
지금 시대에는 절대 볼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이었기에 견디고 참고 인내하면 버틸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들은 결국 외적으로는 어쨌든 화해하고 화합된 것처럼 보인다. 시어머니였던 후란의 죽음을 시작으로 이들 가족에게는 변화가 찾아왔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과연 이미 받은 내상이 흉터로 남지 않고 모두 치유되었을까는 의문이다. 제니의 경우 처음 만난 시점부터 오롯이 가족으로 받아들여졌기에 음식을 먹으며 하나로 뭉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보듬어 주고 아껴주며 서서히 신뢰를 쌓아가면 분명 좋은 가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시어머니였던 후란과 남편인 성호에게서 오랫동안 받은 상처가 과연 없었던 일처럼 말끔하게 지워질 수 있을까는 의문으로 남는다. 다만, 옮겨간 새로운 터전에서 서로 보듬으며 치유의 시간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구성원과는 부디 좋은 추억을 쌓아가면서 앞선 선례를 더 이상 만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 그럴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