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의 온기 -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 작가의 숨
윤고은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은 빈틈 속에서 만나는 특별한 일상!"


수많은 책 목록 중 한 권을 아무런 정보 없이 그냥 읽었는데, 뭔가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나를 놀래키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도 그중 하나였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아무런 정보 없이'인데, 사전에 간단한 소개 글이나 작가 정보, 심지어 장르조차 모르고 읽다가 불현듯 빠져드는 책을 만나게 되면, 마치 보물 찾기를 하다 꼬깃하게 접힌 종이를 수풀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들어 더없이 즐겁고 행복해진다.

이 책에는 일상의 빈틈 속에서 발견한 소소하지만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순간들이 가득 담겨 있는데,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지나쳤던 비슷한 경험들이 절로 소환될 것이다. 더불어 흐릿하게 자리 잡고 있던 기억들에 새로운 색이 입혀지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재치 있는 필체에 다소 엉뚱한 허당끼까지 더해진 저자의 일상을 들여다보다 보면 흔한 일상이 다채롭게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일상의 빈틈 속에서 발견한 소소하고 특별한 하루들이 약 60여 편의 산문으로 에피소드처럼 담겨있다.

특히 1장의 내용들은 웃음 포인트가 꽤 많은데,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봄직한 에피소드들이 많아 더 집중하며 읽게 된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상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페이지가 뒤로 넘어갈수록 점차 자신만의 감성이나 취향, 버릇 등이 반영된 에피소드들도 만나볼 수 있는데, 이것들을 만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간략히 살펴보면, 1장에는 일상 속 저자의 빈틈으로 인해 발생한 에피소드들이 주로 담겨있다. 2장에는 왕복 세 시간의 지하철 출근길에서 상상하고 경험한 에피소드들이 담겨있다. 3장에서는 여행과 관련된 저자의 취향과 에피소드들을 만나볼 수 있다. 마지막 4장에서는 기록으로 남겨둔 저자의 취향과 일상의 빈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 일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인데, 저자의 빈틈(허당끼)과 기록, 여기에 더해 재치 있는 필력이 더해지며 '특별한 일상'으로 기록된다. 덕분에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웃음을 유발하는 포인트가 된다.

일상에서 우리가 매일 겪는 웃음, 고단함, 슬픔 등을 저자만의 감성으로 절묘하게 포착해 낸 빈틈을 살펴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럴 수 있지', '나도 그랬는데'하며 위안과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살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너지거나 회색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이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웃음 지어보면 어떨까 한다.


=====
어느 새벽에 깨어 있으면 책장이 수상해 보일 때가 있다. 섣불리 건드린 책 한 권이 그 에너지를 누적해두었다가 내가 잊고 있을 때 툭, 옆으로 눕거나 아래로 추락하기도 하니까.

영화 <인터스텔라>를 본 사람이라면 그 순간 조금은 긴장할 것이다. 책장 뒤에 무엇이 있을지 나는 모른다. 책장 뒤 세계에 대해 장담할 수 없고. 그러니까 다 의도한 거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유영할 뿐이다.
35페이지 中
=====

책장과 저자의 상상력이 더해지며 유쾌하게 그려진 이 에피소드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봄직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꼭 책이 아니더라도 집에서 두고 쓰던 물건이 꼭 쓰려고 하면 사라지는 마법!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것이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책이 불현듯 툭 쓰러진다거나, 찾으면 없다가 새로 사면 튀어나오는 일들은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겪는 일 중 하나다.

그런 흔하고 흔한 일상에 영화 <인터스텔라>의 내용을 접목해 상상을 더하니 어쩐지 꽤 참신한 일상이 된 듯하다.


=====
궁남지의 '오이'→궁남지의 '오리'
오이와 오리, 상관없는 두 세계의 소개팅 성공이다.
(...)
블레이크와 크레이그.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꼭 다니엘 크레이그가 함께 떠오른다는 게 황당하다.
(...)
워런 버핏과 워런 비티. 이 둘도 자꾸 섞여서 워런 버핏과 아네트 베닝을 부부로 만들곤 한다. 워런 비티는 콜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안데르센과 나폴레옹. 둘 다 우리 동네에 존재하는 빵집인데 늘 두 곳을 혼동한다. 안데르센과 나폴레옹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왜 자꾸 섞이는지 모를 일.

따옴표와 깜빡이. 자동차 깜빡이와 문장부호인 따옴표가 흡사하게 보이는 거, 나에게만 해당되나?
(...)
강력한 후보와 덜 강력한 후보의 차이는 미미하다. 오류의 세계에서 어떻게 실력을 논한단 말인가. 다만 올해의 오타상의 후보들이 우리를 피식 웃게 하는 건 확실하니 일단 후보는 많이 모아야 한다.
54~56페이지 中
=====

남들이 보면 황당하다 할 수 있는데, 나만 헷갈리고 나만 버퍼링이 걸리는 단어나 말들이 있다. 경험과 어떤 이미지가 만나 생성되는 나만의 조합은 이처럼 때로 웃음을 유발하며 일상에 활력을 더한다.


=====
내가 열차의 네모난 창문을 액자 삼아 서울의 일몰을 본다는 것은 겨우 몇 초간 허락된 호사인 것이다. 아침에 말간 표정을 짓고 있던 도시가 얼마만큼 화려해지는지 알고 싶다면 해 질 무렵 한강 다리를 지하철로 건너가야 한다.
(...)
압구정역과 옥수역 사이, 한강을 건너는 구간은 노련한 승객이든 서툰 승객이든 3호선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책갈피 역할을 하고 있다.
(...)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바깥 풍경에 마음을 내어주고, 열차가 다시 어둠 속으로 내려가면 마음도 제자리를 찾는다.

이 구간에서 운이 좋으면 지하철 디제이를 만날 수 있다. 지하철에도 디제이가 있다.
(...)
바쁜 하루 중에 잠깐 고개를 들어 창밖의 풍경을 보시라는, 오늘도 힘내시라는 목소리가 열차 안 방송으로 흘러나올 때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출근길에도 사랑받는다, 누군가가 우리의 하루를 응원해 준다. 열차 안의 사람들이 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그 목소리는 지하철에 올라타 무심하게 이동하고 있을 때 우연히 만나야만 가능한 것이니까. 약간의 피로와 권태 속에서 아무 기대 없이 만나야만 가능한 것이니까. 그러니 가장 좋은 건 열차의 승객으로서 우연히 지하철 디제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퇴근길에 선물 같은 순간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구간인 옥수역과 압구정역 사이에서. 지하철 디제이가 말했다. 한강을 지나고 있으니 고개를 들어 밖을 보시라고, 잠깐이라도 마음에 여유를 가지시라고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세상에 다시없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모든 게 엄청나게 황홀한 우연, 그러니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137~139페이지 中
=====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 이 에피소드가 눈에 딱 들어왔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내가 탔던 열차 역시 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3호선 압구정과 옥수역 사이였을지도 모르겠다.(설사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기에)

당시엔 그런 멘트를 하는 분들을 지하철 디제이라 지칭하는지도 몰랐고, 그저 어느 날 문득 맞닥뜨린 선물 같은 안내 멘트에 울컥 감동이 차올랐던 경험만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아 그날 다급히 집으로 돌아와 블로그 <끄적끄적>에 남기며 색다른 경험을 이야기했던 때가 있다.

책을 통해 비슷한 기억을 공유하고 그때의 감정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노을과 지하철 디제이의 조합은 지금 떠올려봐도 환상 그 자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내 오른쪽에 앉은 사람에게 묻고 싶다.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자리를 놔두고 모르는 이 옆에 붙어 앉으셨나요? 우리가 그 옛날 박카스 CF를 찍는 건 아니잖아요? 들어올 대답이 크게 기대되진 않는다.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인식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귀찮거나.
160페이지 中
=====

나 역시 텅 빈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옆 사람에게 꼭 한번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좀 널찍이 떨어져 앉으면 안 되나요?

보통 이런 경험을 하는 경우 떨어지고 싶은 사람은 여성, 붙어앉는 쪽은 남성이 많은데 이상하게 텅 빈 수많은 자리를 놔두고 상대방은 꼭 옆에 붙어 앉는다.

저자의 경우는 이미 앉아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빠진 경우라 그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정리했는데, 여기에 개인적으로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변수가 한 가지 더 있기 때문이다. 널찍한 지하철에 이제 막 탄 승객이 널찍한 자리를 두고 굳이 꼭, 여성의 옆에 붙어앉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여성의 옆에 붙어앉고 싶어서'라는 이유를 하나 더 붙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남성을 그런 취급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지만, 꼭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경우 대게 여성들이 앉아있던 자리를 포기하고 이동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나 역시 그렇다.



=====

세상의 모든 만남이 그렇듯이 책과의 만남도 시기를 탄다. 그 책을 만날 때 내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인생의 어떤 계절을 통과하고 있었는지에 따라 책의 존재감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책이 누군가의 삶을 구원하거나 도발하거나 위로했다는 말을 들으면 한 권의 책과 한 사람이 만났던 어느 시점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책은 우리 산책의 가로등 같은 것. 가로등이 없어도 우리는 걸을 수 있지만 있으면 더 외롭겠지.

306~307페이지 中

=====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어떤 책이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느냐는 결국 당시 내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책이 유독 내 마음에 깊이 다가온다면 반대로 지금 내 상태는 이렇구나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운명 같은 이끌림에 의해 나와 책이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전제는 혹은 그렇기에 더 크게 다가오는 존재감은, 나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책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

무심히 지나칠 일상을 저자의 눈으로 바라보니, 세상은 온통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놓친 1% 빈틈 사이 자리한 그 온기가 꽤 즐거운 웃음을 유발한다.

여기에 더해 저자의 엉뚱한 허당끼는 '어쩔'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시럽을 손소독제로 알고 식탁을 닦으며 느꼈을 끈적함, 목욕탕에서 모르는 사람이 밀어달라며 내민 때수건, 여기에 더해 보답이라며 등을 밀어주는 이상한 경험, 치약 대신 사용한 폴리덴트(틀니 접착제) 등.

'윽, 헉, 악'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저자의 일상 에피소드들은 그렇게 웃음과 함께 강력하게 뇌리를 관통한다. 덕분에 오랜만에 따뜻하고 말랑한 마음을 가득 담아 간다.

가끔은 저자처럼 찰나의 시간을 붙잡아 새로운 시선으로 살피고 기록으로 남겨보면 어떨까? 새로운 나만의 에피소드들이 흘러넘쳐 삶을 사랑한 이유가 더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