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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네 종말 탈출기
김은정 지음 / 북레시피 / 2024년 7월
평점 :
"온갖 장르를 총망라한 최씨네 종말 탈출기! 예상치 못한 감동과 반전은 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는데, 읽다 보니 어느새 푹 빠져들었다. 특히 여덟 살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가족과 세상은 예상을 뛰어넘어 수수께끼처럼 다가와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불어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용인되지 않는 아이의 버릇없는 행동이나 호칭이 오히려 이 소설에서만큼은 사랑스럽고 당차게 다가온다. 그만큼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인 '한라'는 최씨네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는 깍두기 같은 존재다.
삭막하고 어딘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집구석이지만, 방방곡곡을 누비며 가족의 빈틈을 파고드는 한라 덕분에 그나마 최씨네는 적어도 겉으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간다.
종말 날짜를 기준으로 디데이를 설정한 이 책을 살펴보면, 그 설정에 부합하듯 종말을 야기하는 몇몇 요소들이 곳곳에서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종말일, 사이비 종교, 벙커, 동물들 등이다.
여기에 더해 갑자기 무녀의 꿈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나타나 이번 종말일에 최씨의 씨가 마를 것이라 말하며 개시처럼 전하는 장면은 극적인 요소를 더한다.
덕분에 파탄 직전의 삼대 가족은 똘똘 뭉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고, 이를 통해 가부장적인 태도, 성차별, 오해와 불신 등은 싹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여덟 살 아이의 눈으로 펼쳐지게 되면서 비극이 희극으로 비치기도 하고, 또 어른의 눈에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전개되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리송한 기분으로 수수께끼를 풀듯 더 집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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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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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네 가족 소개
일명 콩가루 집안이라 불릴 만큼 속 사정이 복잡한 최씨네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최한라(딸내미, 손녀, 조카로 불림)
-초등학교 1학년(8살)
-1년 전 이 집에 엄마랑 들어오게 됨
-꿈: 투명 반창고를 만드는 발명가
▷엄마(고은)
-싱글맘
-최씨 집안으로 들어온 뒤에 외출은 자제하고 집안일만 하고 있음
▷외할아버지(최씨/77세)
-집안 서열 1위
-과거 사진관을 운영하다 현재는 집 근처 주차장 운영 중
▷외종조부 (뚜러정/정두섭)
-외할머니의 남동생
-무엇이든 잘 뚫음
-지하실에서 기거 중
▷이모 (히메/고윤)
-엄마의 남동생
-한때 큰 삼촌이었다가 성전환 수술 후 이모가 됨
-고완→고윤으로 개명
▷막내 삼촌 (척척/고준)
-이복 형제이며 늦둥이(누나와 열세 살, 형과 열 살 터울)
-은둔형 외톨이
-다락방에서 기거 중
-중학생 때 생물 수업에서 혈액형을 통해 자신이 사실은 부친이 밖에서 낳아온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게 됨
▷외할머니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음
-환갑도 되기전 갑자기 위암으로 돌아가심
■한라의 친구들
▷이영민
-꿈: 대통령(할아버지가 하라고 했기 때문)
-집이 부유함
-최씨는 영민이네를 ' 속 빈 강정'이라고 별명 붙임
▷김수진
-꿈: 슈퍼모델
-수진의 엄마는 인조인간으로 불림
▷윤현준
-꿈: 변호사
-이혼가정으로 엄마와 살고 있음
■그 외 등장인물
▷이옥련
-외할머니와 먼 사촌지간
-무녀
-한 번씩 최씨네 찾아와 큰 일들을 미리 예고함
▷전도사
-미스터리한 전도사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성 신도
-완전히 다른 실체를 가지고 있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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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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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화자인 한라는 잠시 머물 예정으로 엄마와 함께 외할아버지 댁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그대로 그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어느새 1년이란 시간이 지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라는 올해 여덟 살로, 최씨 집안에서 못 가는 곳이 없고, 또 모든 사람들과 상대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한 지붕 아래 살지만 서로 반목하는 가족들로 인해 이들은 식사조차 함께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모든 이야기는 한라를 통해 전개되고, 또 아이의 시각에서 풀어가게 되면서 어떤 이야기들은 와전되어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들거나 혹은 웃음을 유발하는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이들 가족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있는데, 일반적인 가족 구성원을 부르는 호칭과는 다른 별칭으로 서로를 부른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아이인 한라도 예외는 아닌데, 외할아버지를 최씨로, 외종조부를 뚜러정으로, 이모를 히메로, 막내 삼촌을 척척으로 부른다는 점이다.
또 이웃 주민들이 '콩가루 집안'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해도 한라는 이에 위축되거나 절대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또 모르는 단어나 말을 듣게 되면 무엇이든 알고 있는 척척에게 질문하거나 책과 인터넷을 활용하는 적극적인 모습도 보인다.
이렇듯 소설의 초반까지는 최씨네 가족구성원에 대한 가벼운 소개와 배경, 그리고 주변 이웃들에 대해 만나볼 수 있다. 이후 중후반부에는 본격적으로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미스터리, 범죄, 컬트, 코믹, 어드벤처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여기에 더해 별도로 구성된 각 인물의 뒷이야기는 뭉클함과 동시에 이들의 아픈 과거와 속 깊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종말일과 어느 날 웃돈까지 얹어주며 놀리던 주차장 땅을 팔게 된 행운, 여기에 더해 그 부지에 들어선 사이비 기도원, 마지막으로 어느 날 무녀의 꿈에 나타나 최씨 일가의 씨가 마를 것이라며 예고한 외할머니의 예지몽까지.
어쩐지 그냥 넘기기엔 단 한 번도 비껴가지 않았던 무녀의 말 때문에 이들 가족은 본격적으로 종말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게 되는데, 하필 가장 중요한 장소가 이미 팔아버린 옛 주차장 사무실 부지임이 밝혀지면서 우왕좌왕 난리가 난다.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아야 하기에 오직 최씨 일가만 바빠진 상황에서 생각지 못한 복병까지 겹치게 된 대 환장 스펙터클 지구 종말 탈출 가족 소동극은 점점 더 스케일이 커지면서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가족 모두가 함께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게임 속에서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똘똘 뭉쳐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숨 막히는 접전을 펼친다. 그렇게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이 만들어 낸 혹한의 종말 탈출기는 가족의 일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오해와 불신에 시간이 더해져 묵은 감정으로 남아있던 애증의 앙금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또 이로 인해 케케묵은 사회적 규범이나 남녀의 성에 따라 구분 짓던 역할분담이 어떤 변화를 맞이하는지는 직접 책으로 확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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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었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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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적 표현으로 많이 쓰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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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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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둘러 표현할 때, 의미 그대로, 설명하기 어려울 때 어른들은 이 말을 에둘러 사용한다. 하지만 같은 말을 여러 상황에서 듣는 여덟 살 한라에게는 도통 모르겠는 말이다.
■웃음 포인트가 되어 주었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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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처럼 돼지나 코끼리 따위의 동물이 아닌 음식을 활용하는 그들의 별명 짓기는 인사법만큼이나 상당히 독특했지만 최씨가 지은 별명이 훨씬 그럴싸했다.
(...)
콩가루보다는 강정이 더 달고 맛있기 때문이다.
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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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가루 집안', ' 속 빈 강정'과 같은 말은 어른들 사이에서는 얼굴 붉힐만한 상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그런 별명 짓기는 그저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으레 짓는 별명 짓기나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한라는 최씨가 지은 ' 속 빈 강정'이 더 달고 맛있다는 이유로 더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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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순도 백 프로 자연산이야. 수진이 엄마랑은 다르지."
수진이 엄마는 인조인간이니까 인조인간이 아닌 사람은 자연산이라는 뜻인가. 그런 의구심으로 어리둥절하던 참에 문득 뚜러정과 횟집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수조 안을 헤엄치는 커다란 물고기를 가리키며 뚜러정이 자연산이냐고 묻자 횟집 아저씨가 그렇다고 했다. 엄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물고기인가. 그럼 나란 존재는? 기가 찰 노릇이다.
3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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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읽고 한참을 박장대소했다. 얼핏 보기엔 꼬리말 잇기도 아니고 뭔가 싶기도 하지만 아이의 천진스러움에 이내 웃음이 빵하고 터지게 될 것이다.
자연산과 인조라는 말을 아이의 눈높이에서 해석하게 되면서 다다른 엉뚱한 결론은 이렇듯 기가 찰 노릇에 이르게 된다. 이후 한라가 울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참고로 인조인간은 성형한 사람을 일컫는 어른들의 말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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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가 뭔데?"
"좋은 여자대학교야."
(...)
"왜 좋은데?"
"남자들이 선망하거든."
"선망이 뭐야?"
"꿈꾸는 거지."
"그럼 불행해지겠네."
"뭐?"
(...)
뚜러정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면 불행해진다고 했는데 여자대학교를 꿈꾸는 남자라면 보나 마나 뻔하다. 아무튼 엄마는, 그 대학 식품영양학과를 나왔다.
3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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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한라는 어른들이 하는 말을 꼭꼭 기억해 두었다가 이후 새로운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적극 활용한다. 덕분에 얼토당토하지 않은 결론에 다다르기도 한다.
포인트를 제대로 짚지 못한 한라는 엄마의 답에 여자대학교를 꿈꾸는 남자라면 불행할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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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제목은 '콩가루'입니다."
7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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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림 그리기 숙제를 발표하면서 한라는 제목을 '콩가루'라고 말한다.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는 단어를 이토록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아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감동 포인트가 된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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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훗날 투명 반창고를 만들 계획이다. 우리 같은 어린이만 늘 반창고를 필요로 하는 줄 알았는데 투명 반창고 발명가가 되겠다는 결심 후 일주일을 관찰한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청소하느라 손목이 저리다는 엄마, 이상하게 입술이 자주 부르트는 최씨, 뚜껑이 잘 열린다는 뚜러정, 뚜러정보다 큰 발을 날씬한 구두 속에 넣느라 뒤꿈치가 가끔 까진다는 히메, 팔 여기저기가 정체 모를 상처투성이인 척척까지, 반창고는 실로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최씨네만 해도 사정이 이러니 반창고가 전 세계인들의 필수품일 것은 분명하다.
(...)
아프다는 걸 표내는 노란 반창고도 영 내키지 않는다. 상처에는 반창고가 제격이지만 분명 나처럼 노란 반창고를 꺼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근거해서 투명 반창고를 구상했다.
2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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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나 모델, 대통령이 꿈이라는 친구들과 달리, 한라는 투명 반창고를 만드는 발명가가 되는 게 꿈이다. 그 이유를 곰곰이 살펴보면 한라가 얼마나 가족들을 사랑하고 위하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전 세계인까지 생각하는 인류애까지 품고 있다.
아프다는 걸 표내지 않으면서, 상처를 가리고 덧나지 않게 방지해 주는 투명 반창고를 발명하고 싶다는 한라의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몽글몽글한 감동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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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여장부가 될 수 있어요?"
대신에 나는 수영 코치님께 여쭤봤다.
(...)
"그럼 여장부란 제가 꿀 수 있는 꿈이죠?"
"당연하지."
나는 행복에 겨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래 희망 목록에 투명 반창고 발명가 외 여장부를 추가했다. 내가 여장부가 되면 엄마의 마음도 세탁 후 말끔해진 옷가지처럼 보송보송 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36~3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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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의 사랑스러움이 한껏 돋보이는 문장으로, 한라는 꿈을 꾸기에 앞서 우선 수영 코치를 통해 자신이 여장부라는 꿈을 꿀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를 묻는다. 앞서 뚜러정을 통해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은 불행을 야기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인을 받은 후에는 엄마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래 희망 목록에 추가한다.
이 장면은 남아선호 사상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한 엄마의 꿈을 은연중에 한라가 다독여주는 문장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 말을 만약 엄마가 전해 들었다면 한라를 꼬옥 껴안아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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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판 뒤에 소중한 것을 담아둬야 한다면 내게는 무엇이 있을까.
(...)
고민 끝에 훗날 투명 반창고를 발명하면 그걸 가득 담아두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 아픈 사람들이 그걸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비밀번호는 쉬운 것을 입력해야 할까. 0000? 아님 내 생일 0616? 내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
번호판 옆에 0616을 입력하라고 써 붙여야 할까? 그럼 번호판이 무슨 소용이지? 그냥 떼버리고 말까?
(...)
선생님은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비단결이다. 더구나 유치원 선생님처럼 아빠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난 그날의 일기 하단에 비밀번호를 미리 적어두기로 마음먹었다. 훗날 선생님이 혹시라도 불치병에 걸리게 된다면 내 반창고가 가득 담긴 냉장고를 찾아 주저 없이 네 자리 번호를 누르라는 뜻에서 말이다.
61~6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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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에서는 은연중에 드러나는 한라의 상처와 고민하는 모습에서 보이는 아이의 귀여움, 그리고 선생님을 향한 애정이 함께 느껴진다.
번호판 뒤에는 보통 귀중하고 값진 것을 보관한다는 말에 한라는 나름대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자신이 발명한 투명 반창고를 가득 담아 두겠다고 결심하게 된다.(아마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이 당시 자신이 발명하게 될 투명 반창고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비밀번호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난다. 이후 그녀는 일기에 자신의 상처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네 자리 번호를 기재해둔다.
혹시나 불치병에 걸리면 투명 반창고로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어쩌면 한라는 투명 반창고를 발명할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OO
1.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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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약조를 깨고 다시 몰래 척척의 방에 잠입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구멍이 송송 뚫린 후줄근한 메리야스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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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래떡처럼 하얗고 마른 양팔 여기저기에 긴 상처들이 꼬불꼬불했다. 콩알처럼 동글납작한 검은 상처도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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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다시 한번 소명 의식을 느꼈다.
(...)
흔적이 남지 않는 투명한 반창고를 꼭 발명해야겠다고 말이다.
43~4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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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척은 한라 앞에서는 한여름에도 늘 긴 팔을 입고 있다. 사실은 반항하던 시절 새긴 문신을 가리기 위함이었는데, 우연찮게 이것을 목격한 한라는 상처라고 오해하게 된다.
이 때문에 막내 삼촌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다시 한번 투명한 반창고를 발명하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보통 문신을 보면 징그럽다거나 무섭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한라는 오히려 이것을 상처로 본다. 어쩌면 보통의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저 너머의 무엇을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순수한 마음에 감탄이 일기도 한다.
2. 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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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하나 물어볼 게 있어. 최씨 냉장고에 비싼 거 있는 거야?"
"뭐?"
"번호 띡띡 누르는 냉장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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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그러는데 번호판이 있으면 안에 비싼 게 있는 거래. 그 냉장고에는 뭐가 있어?"
(...)
그러고서 몇 달 뒤, 철옹성 같던 그 번호판 냉장고의 비밀이 밝혀졌다.
(...)
그로부터 몇 해 뒤엔 나도 그것이 단지 금고였음을 깨닫게 됐다.
4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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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누르는 것은 다 냉장고로 생각하는 아이다움과 궁금한 것에 대해 음흉스럽게 훔쳐보기보다 당당히 뭐냐고 묻는 배포에 웃음이 났던 문장이다.
항상 외출할 때는 방문을 잠그고 나갈 만큼 가족 모두에게 숨기고 또 숨기던 금고였는데, 우연찮게 금고 여는 모습을 보게 된 한라는 오히려 엉뚱하고 당당하게 물어대니,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좀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슬프게 다가왔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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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빠가 있을까. 이 세상에 아빠 없는 아이는 없다는데 그럼 내겐 온통 물음표인 아빠는 정말 최씨일까. 그럼 영민이 말처럼 나는 시름시름 앓다가 일찍 죽고 말 것인가. 태권도도 검은 띠를 따야 하고, 여장부가 돼야 하며, 무엇보다 투명 반창고도 발명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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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몇 년째 아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머나먼 나라 미국에서 일을 한다는 것뿐이었다.
46, 5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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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어른들의 사정으로 아빠가 없는 한라는 특별히 아빠가 없는 것에 대해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거나 내색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유독 자신만 아빠가 없다는 점, 같은 성씨를 쓰는 친족끼리 결혼할 경우 아이가 일찍 죽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불현듯 불안해진다.
자신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아빠에 대해 아는 정보라고는 그저 머나먼 나라 미국에서 일한다는 것뿐이니 얼마나 불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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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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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인 한라의 시선으로 전개되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 소설은 그야말로 온갖 장르가 결합된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웃음, 감동, 절망, 슬픔 등의 온갖 감정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탄듯한 기분까지 만끽할 수 있다.
한 가정을 하나로 이어주던 외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죽음 뒤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 그리고 이후 다시 꿈에 나타나 파탄 직전의 가족을 이어주는 외할머니의 존재는 어쩌면 가족들을 위한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나 싶다.
저마다 자리를 찾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던 이들이, 종말이라는 거대한 위기를 함께 극복함으로써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된다. 덕분에 별칭으로 불리던 이름도 원래 이름을 되찾게 되고, 또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과 특기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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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다 부스러진 콩가루도 끈기만 있으면 다시 뭉쳐질 수는 있더구나. 그럼 더 단단해지고 말이지."
35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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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콩가루' 집안이었을지언정, 이제는 소중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하게 된다. 더 단단해지게 된다.
덕분에 엄마는 다시 변호사 꿈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고, 한라는 20살 성인이 되면 아빠를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자신의 땅은 아니지만 다시 주차장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으며, 외종 할아버지인 뚜러정은 다시 뚫는 일을 하고 다니며 결혼자금을 꼬박꼬박 모으고 있다.
그리고 법적으로 주민번호를 1에서 2로 바꾸고, 요리를 하며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모 히메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막내 삼촌 척척까지 가족 모두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게 되면서 이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무지개가 반짝 떴다.
어느 가족이나 위기는 찾아올 수 있다. 이럴 때 뿔뿔이 흩어져서 무기력하게 있기보다 최씨네처럼 똘똘 뭉쳐 함께 극복하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가 한순간 활활 타올라 사라져버린 '영생 구원 기도원'의 존재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여기에 더해 흔적 없이 사라진 전도사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후편을 암시하는듯한 약간의 힌트 몇 가지를 남겨두고 끝을 맺었는데, 알쏭달쏭 기억날 듯 말 듯 궁금증을 야기한다. '한라만 경험한 개미집', '부처손', '다섯 글자의 개미집 명패(ㅈ* 보관소)', '사도행전 1장 8절(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개미집을 여는 주문(투명 반창고)', '전도사 아저씨 볼에 상처'.
과연 전도사의 개미집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누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