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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한 계절은 없었다
인영 지음 / 마음연결 / 2024년 7월
평점 :
"사계절로 바라본 소박하지만 다정한 일상의 안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그 밖의 계절로 표현한 일상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엄마를 떠올리게 한다.
식사시간이면 언제나 부엌에서 나던 맛있는 음식의 냄새, 이름으로 불리기보다 00의 딸, 00의 아내로 불리는 게 익숙했던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래선지 시를 읽으면 아득히 멀어져 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 퐁퐁 솟아난다. 그땐 그랬지 하면서. 딸의 입장, 엄마의 입장으로 서술한 소박하지만 다정한 안부를 묻는 일상의 이야기들은 그래서 투박하지만 정감있게 다가온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계절을 앞세워 그때그때의 감정과 일상의 내용들을 시로 표현한 책이다. 주요 소재가 가족이라서인지, 내용 또한 소박하고 잔잔하다.
또 그리움과 추억을 상기시키는 것들이 많아 어떤 이들에게는 옛일을 다시 한번 떠올리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수월한 계절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있어 더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저자의 삶을 시를 통해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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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찾아요.
언젠가부터
이름표는 사라지고
꼬리표를 달았다
1남 2녀의 장녀로
장씨 집안의 막내 며느리
사업가 남편의 아내
두 형제의 엄마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사라진 내 이름표
어디로 갔는지
인생의 절반
이제는
하나의 이름으로 남고 싶어
뒤에서 밀어주기 바빠
내가 뒤처지는 줄은 모르고
나만
여전히 달고 있는 꼬리표
48~4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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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으며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내 기억 속 엄마에 대한 호칭 대부분은 이름보다 '00의 엄마'로 많이 불렸던 것 같다. 그나마 형제자매 사이에서나 이름으로 불렸던 엄마의 이름.
이제는 꼬리표를 떼주고 엄마의 이름 그 자체로 불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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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미 스페셜
(...)
비 오는 날에
생각나는 울 엄마 김치전
묵은지 송송
파, 청양고추 어슷 썰고
껍질 벗긴 오징어도 툭툭
부침가루
튀김가루 반반 섞어
비 오는 소리
자글자글
노릇노릇하게 익힌다
대충 만든 것 같아도
내 입에 꼭 맞는 김치전
75~7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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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음식 솜씨가 좋았던 엄마는 어떤 음식이든 뚝딱뚝딱 만들어 내곤 했다. 냉장고를 살펴보면 별 재료도 없는 것 같은데, 아이들과 남편의 밥상을 위해 엄마는 언제나 새로운 음식을 차려내곤 하셨다.
시간이 한참 흘러 그리워진 그 맛을 흉내내 보겠다고 요리해 보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엄마의 손맛!
당시에는 왜 따로 메모해둘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왜 배워볼 생각을 못 했을까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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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조각
구름이 햇님을 가린다
이윽고
쏟아지는 하얀 별사탕
며칠 포근했던 날씨
온데간데없고
세상을 가득 채우는 은하수
헐벗은 나뭇가지
소복이 쌓여가는 눈
가지를 탈탈 털어
눈보라 날린다
벙어리 장갑 안
두 손 가득 쌓이는 겨울 조각들
9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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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겨울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딱 이런 모습이다. 햇빛에 반짝반짝 흩날리는 하얀 별사탕 같은 눈은 나뭇가지마다 소복이 쌓여있고, 때로 무거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후두두두 떨어질 때면 하얗게 눈보라가 날린다.
그렇게 함박눈이 소복이 쌓일 때면 뽀득뽀득 거리는 눈을 밟고자 마당을 뛰어다니던 옛 모습이 떠오른다. 덩달아 신이 나서 함께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개들까지.
그때 그 겨울은 무척 추웠지만,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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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다 보니 어느새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옛 추억들이 소록소록 떠올랐다. 다시는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그때 그 기억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 마치 그림처럼, 환상처럼 느껴진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 비슷한 어린 시절을 경험한 이는 없을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동화책 속에 머물렀던 것처럼 아름다웠던 그때 그 시절.
모처럼 어린 시절의 앨범을 다시 꺼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