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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가게 글월
백승연(스토리플러스) 지음 / 텍스티(TXTY) / 2024년 5월
평점 :
이 책을 읽으며 문득 오래전에 글로 나누던 학창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창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가득하던 그때, 편지글을 주고받으며 생각과 마음을 나누고, 교환일기를 통해 작고 사소한 일상을 나누며 우정을 키웠던 그 시절.
그 묵직했던 편지들을 이사할 때도 빠뜨리지 않고 가지고 다닐 만큼 꽤 소중히 했었는데, 이제는 모두 정리하고 남아있는 건 하나도 없다. 물건으로 남겨두기 보다 이제는 마음속에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에 몇 년 전 모두 정리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즉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아져 편지가 많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한 번씩 집배원 아저씨를 통해 우편물이 날아들 때면 그때의 그 반가운 마음이 떠올라 여전히 설렘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글을 쓴다는 것, 편지를 통해 조금 느리게 마음을 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편지가게 '글월'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근무하는 효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실제 존재하는 '글월'이라는 가게에 소설적 허구 내용을 입혀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인 것 같은 느낌의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를테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펜팔 시스템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글월에서는 펜팔 시스템을 통해 모르는 사람끼리 펜팔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소설 속에 공개적으로 오픈하기 위해 펜팔 응모글을 모았고 여기에서 선정된 편지글을 소설 속에 녹여내면서 자연스럽게 글월의 시스템을 보여주었다.
단순히 문구를 파는 가게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느껴지는 '편지'를 위한 공간, '글월'에서 쓰는 즐거움과 공간이 주는 편안함을 느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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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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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월 가게 사장 가족>
■강선호: 35세 / 글월의 사장
■은소희: 35세 / 선호 아내 / 대기업 연구원
■강하준: 7세 / 아들
■강하율: 1살 / 딸
<주요 등장인물>
■우효영: 28세 / 글월 아르바이트생
■우효민: 33세 / 효영의 언니
<글월 가게 손님들>
■차영광: 29세 / 웹툰 작가 / 글월의 맞은편 연화 아파트 5층에 산다
■성민재: 39세 / 대기업 회계사 / 소설가를 꿈꿨지만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권은아: 46세 / 연희동 호박 부동산 사장 / 글월 1층 빵집 사장의 아내
■금원철: 58세 / 연희 초등학교 교장 / 아내를 병으로 떠나보내고 종종 글월에 오는 단골손님
■정주혜: 25세 / 연희동 우체국 직원
■문영은: 26세 / 싱어송라이터 / 자기의 이름을 건 라디오 프로그램을 운영 중 / 본가인 연희동에 왔다가 글월을 발견하게 됨
■송은채: 28세 / 효영의 대학 동기로 배우를 꿈꾸며 고군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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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월의 의미와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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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월의 의미: 편지를 높여 부르는 말!
■글월에서 쓰는 업무일지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온라인으로 공유하며 그때그때 상황을 서로 확인한다. 여기에는 날짜, 날씨, 근무자, 매출, 방문자수, 재고, 필요한 비품, 특이사항 등을 기재하고 있다.
■펜팔 서비스
글월은 일정 금액을 내고 펜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익명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누군가의 편지를 가져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나이, 성별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할 수 있어 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모르는 이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되려 자신이 위로를 받기도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나만 알 수 있는 펜팔 내용과 그들이 직접 남긴 손글씨를 만나볼 수 있는데, 이것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기자기한 손글씨를 비롯해, 그림을 그려 넣거나 딱 떨어지는 글씨를 통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
■펜팔 답장 알림 서비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펜팔의 답장이 도착하면 문자를 통해 알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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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월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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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희동 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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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창에 담긴 아늑함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이상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다는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
창밖 풍경만큼이나 효영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잘 익은 살구색 같은 글월 내부의 페인트 색이었다.
2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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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영은 봄날 글월의 아침을 사진으로 담았다. 전면의 창을 향해 한번, 측면의 창을 향해 한 번. 초봄의 맑은 하늘을 보고 있으면 햇살에도 향이 느껴졌다. 잘 말린 이불에서 나는 보드라운 향, 곱게 빗은 어린아이의 정수리에서 나는 향, 새싹이 돋기 시작하는 보들보들한 흙에서 나는 향. 달콤하거나 상큼하거나 아무튼 그런 향.
3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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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수동 글월
현대적 느낌의 성수동 글월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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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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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똑똑하고 자랑스러웠던 언니 효민이 사기를 당하면서 집안의 가세는 급격히 기울게 된다. 학원을 차리자는 동료의 말에 온 가족의 돈을 끌어다 투자했지만, 사기를 당하면서 언니는 엄마에게 전화해 잘 있다는 말만 남긴 채 잠적하게 된다.
때문에 뒤처리는 가족이 온전히 질 수밖에 없었는데, 아빠는 주 6일을 운영하던 세탁소 일을 일요일까지로 늘리고 엄마는 외삼촌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반찬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설상가상으로 엄마는 배달을 하다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고관절을 다쳐 수술까지 하게 된다.
이에 효영은 엄마의 병간호를 위해 영화 촬영을 포기하면서 영화감독의 꿈도 접게 된다. 언니의 증발로 효영 역시 자기 작품에 대한 확신이 사라진 것이다.
그때쯤 언니의 편지가 집으로 오기 시작했는데, 봉투에는 언제나 '효영에게'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효민의 편지는 짧게는 2주에 한번, 길게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왔는데, 효영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는 세 통의 편지가 쌓이자 아예 효영의 책상 위에 그것을 올려두었고 효영은 봉투를 반으로 접어 휴지통에 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언니는 계속해서 답장도 받지 못할 편지를 보냈고 다섯 번째 언니의 편지가 왔을 때 효영은 언니의 편지를 피해 스물여덟 살에 첫 가출을 감행하게 된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온 효영은 대학 동문인 선호의 도움으로 그가 운영하는 '글월'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게 된다. 편지라면 지긋지긋했던 효영이 편지 가게인 '글월'에서 일하게 된 데에는 사실 '글월'이 편지를 뜻하는 말이란 걸 몰랐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그렇게 시작된 아르바이트는 예상보다 순조로웠고 글월에서 차곡차곡 시간을 채워갈수록 효영은 그 공간을 좋아하게 된다.
그렇게 계절을 하나씩 하나씩 보낼쯤 부모님을 통해 언니 효민의 소식을 조금씩 듣게 되는데, 그녀가 현재는 강원도 쪽에서 학원 강사로 일한다는 것과 그곳의 주소까지 어느새 알게 된다.
답장 생각이 없던 효영이지만, 어릴 적 둘이 함께 했던 순간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면서 이 사진을 웹툰 작가 영광에게 부탁해 그림으로 그려 언니에게 보내는 것으로 답장을 대신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술을 먹고 내친김에 속마음을 솔직하게 내려 적은 편지가 언니에게 발송된 것을 알게 되면서 편지를 회수하기 위해 다급하게 언니가 있는 속초로 영광과 함께 가게 된다.
그곳에서 이미 편지를 개봉해 읽고 있던 언니를 발견하게 되고 이 만남을 계기로 둘은 묵혔던 앙금을 풀게 된다. 이후 속초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영광으로부터 그들의 가족사와 동생 상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렇게 효영과 영광은 가까운 사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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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효영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펜팔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남모를 사연과 글월에 방문하는 단골손님들의 이야기도 함께 만나볼 수 있는데, 편지가 주는 따뜻함과 감동도 함께 느낄 수 있다.
모르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전하는 오늘, 이 순간의 진심과 나의 기분들이 편지에 담겨 전해지면서, 그것이 또 다른 이에게 위로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편지가 주는 매력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가까운 이에게는 전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속마음을 모르는 이에게 털어놓는다는 관점에서는 속 시원함과 대나무숲의 역할도 하는듯하다.
지금은 많이 잊힌,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글월'이라는 공간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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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과연 수익을 낼 수 있을까? 오래 지속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던 '글월'은 점차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와 더불어 함께 성장하는 효영의 모습도 만나볼 수 있다.
매거진 <HIM>이라는 군인 잡지 에디터 이지상의 눈에 띄면서 선호는 잡지 인터뷰를 하게 된다. 또 본가인 연희동에 들렸다가 글월을 방문하게 된 싱어송라이터 문영은의 라디오에 펜팔의 사연이 소개되면서 더 큰 이목을 끌게 된다.
여기에 더해 꾸준히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통했던 것이 소소하게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 세대들도 이곳에 들려 편지지를 사거나 펜팔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방문객은 물론 매출도 늘게 된다.
그렇게 글월은 동쪽 성수동에 다른 컨셉의 2호점을 내게 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하루 앞도 짐작할 수 없었던 효영은 정직원이 되고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면서 팝업스토어를 성공시키는 것은 물론, 성수동 글월에서 근무하면서 이제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자신의 일을 즐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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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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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영은 문득 누군가의 옆에 무해하게 남는다는 것이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도록 옆에 있어도 괜찮은 것들은 결국 나를 바꾸려는 의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13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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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흘러도 오래도록 내 옆에 남아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받아들여주는 것이 대다수다.
그렇기에 그것들은 귀하고 무해한데,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서글픈 한편, 가지고 있는 것들만이라도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기를, 하고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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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하늘로 보내고 나니까 혼잣말이 많아지더라고요. 근데, 혼잣말은 너무 공허해서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거예요. 애써 나온 말이니까 정착한 곳이 있으면 했거든요. 편지에라도요."
15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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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을 잃고 난 뒤의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붙잡기 어렵다. 이에 원철은 그 마음을 편지에 고이 담아 당사자가 아닌 익명의 누구에게라도 닿기를 고대한다.
그렇게 '진심'이 담긴 어떤 울림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며, 그 파문은 생각보다 널리 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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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글이라는 건 과거라는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 한 동이라는 재료가 필요했다. 서툴고 부끄러워도 물 한 동이를 퍼내야 다음 할 말이 차올랐다. 그렇게 과거라는 우물을 정화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자기 마음을 투명하게 볼 줄 알았다.
20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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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라는 건 무에서 무언가를 창조하기 참 어려운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서툴고 부끄러워도 추억하고 경험한 과거의 무언가를 떠올려야만 결국 다음 할 말이 이어진다는 점에 있어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자, 또 다른 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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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편지가 화답을 받는 건 아니었다. 펜팔 편지를 집어 가서 답장하지 않는 경우도 흔했다. 모르는 사람과 반복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게 피로한 현대인들이 여전히 많았다. 익명인 사람과 편지를 나눈다는 건 조금쯤 설레고 조금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안개를 걷는 것과 비슷했다. 나와 결이 맞는가, 나의 고민이 진심으로 전해지는가. 이렇게 각자의 기준으로 안개를 걷어 가며 인연을 만드는 것이었다.
21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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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익명의 누군가와 펜팔을 주고받는다는 건, 과거 펜팔을 하며 느꼈던 감정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고 느낀다. 특히 반복적인 관계를 맺으며 피로함을 느낀다는 점에 있어 귀찮음과 부담스러움이라는 감정이 왠지 추가된 기분이다.
과거 내가 느꼈던 것처럼, 펜팔이 다시금 약간의 설렘과 조금쯤 걱정스러운 마음이 버무려져 안갯속을 걷는 미스터리한 스릴과 재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도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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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 담긴 아름다움은 종종 무언가에 가려지기 마련이잖아요. 피곤함과 권태, 염세적인 마음 같은 걸로요. 영광 씨가 만드는 창작물은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풀어 줘서, 사람들이 다시 주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24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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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예술 하는 사람들이 느낄 감정을 대변하는 말이자, 이들을 잘 다독여주고 위로해 주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드는 글이라는 생각에 가져와봤다.
과학의 발달로 어느 무엇보다 완벽하게 창조될 것들을 두고 내가 왜 필요한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효영의 말에서 존재의 이유를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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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영아, 인간관계는 이 정물하고 똑같아. 자기가 서있는 위치에서 보이는 면이 다라고. 인간한테 투시 같은 능력은 없어. 그러니까 그런 걸 초능력이라고 부르는 거지."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데."
"그러니까, 말 안 하면 모른다고."
31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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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말 안 해도 다 알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라 말하고 싶다. 관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다. 내 속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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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하고 싶은지만 잊어버리지 않으면 돼. 그럼 좀 더디고 쩔룩대도 다 제 갈 길 가더라고."
37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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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생을 헤매는 이유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다면, 조금 늦더라도 결국 끝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바로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먼저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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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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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만이 주는 따뜻함이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며 마음을 전하는 글에서, 위트가, 사랑이, 웃음이, 슬픔이 배어있다.
메일이나 메시지, 톡으로 전하지 못하는 감성이 편지를 통하면 배가 된다. 그래서 손글씨로 전하는 편지는 귀하고 또 낯설면서 새롭다.
쓰는 펜의 종류에 따라, 컬러에 따라, 종이의 재질에 따라 달라지는 멋은 어떤 것도 흉내 낼 수 없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수많은 편지들을 소중히 간직했었나 보다.
이제는 손글씨를 직접 쓸 일이 거의 없어 필체마저 사라졌지만, 이 책을 계기로 다시 손글씨를 연습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진심과 감상을 붙잡아두기 위해, 나를 되돌아보기 위해 나쁘지 않은 선택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