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자가 전하는 변화를 부르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



여러 감정 중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책이라 궁금한 마음에 읽게 되었다. 더군다나 시선을 잡아끄는 임팩트 있는 제목은 더욱 나의 궁금증을 부채질했는데, 막상 읽어본 책은 생각보다 어렵게 다가왔다.

최근 읽은 철학과 철학자들에 대한 책들 덕분에 그래도 철학이라는 분야와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으로 인해 다시금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 살짝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평소 뒤로 감추거나 모른척하기 일쑤인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에 대한 여러 상황에 대입해서 깊이 살펴볼 수 있었던 점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저자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여러 상황에 대입해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 여성, 정치, 철학, 사회 등 수치심이 어떻게 발동되고 이 감정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는지를 나열하듯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생각의 관념대로 흘러가는 형태라 이해나 공감이 가는 문장에서 급격히 난도가 높은 구간에 다다르기도 한다. 문장의 구성이나 단어 등의 표현에 있어 조금 난도를 낮춰서 표현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철학이라고 꼭 어려울 필요는 없잖아!)



이 책은 전체적인 맥락을 담기보다, '수치심'에 대해 열거한 저자의 문장들을 옮겨보려 한다. 우리에게 적용되는 수많은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어떤 상황에 어떻게 다가오는지, 또 수치심이라는 감정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더불어 평소 내가 느낀 수치심은 어떤 것들이 있고, 타인을 통해 느꼈던 수치심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나의 일상에 대입해 보면서, 왜 저자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혁명적 감정'이라고 표현했는지, 이 감정이 내 삶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고민해 보면 좋겠다.


=====
"수치심!" 수치심은 죄책감과 다르다. 수치심은 막연하고 조밀하며, 견고한 두께를 지녔다. 수치심은 나의 정서와도, 어떤 주관적 평가와도 무관한 객관적인 상태다. 그것은 바윗덩어리처럼 내 위로 떨어진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건 수치심은 객관적이다. 개인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의 입장을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내게 슬픔이 있다면 나의 슬픔은 객관적으로 수치스러운 상황의 산물이고, 효과이고, 결과다.
24페이지 中
=====

수치심과 죄책감이 다른 건 알겠는데, 명확히 구분 지으려고 하니 애매한 느낌이 들어 찾아보았다.

※죄책감: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
※수치심: 수치를 느끼는 마음.
※수치: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

단순히 의미나 뜻으로 구분 지어보려 하니 더 어렵게 느껴진다. 상황에 대입해 봤을 때 실제 의미나 뜻과 다르게 적용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맥락에 따른 의미 해석이 더 적확하게 와닿는 것 같아 스스로 납득이 되는 느낌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든 생각은 수치심은 조건반사적이기에 개인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다 하는 스스로의 이해와 납득을 해본다.


=====
여성들의 성적 순결이 집단의 명예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수치다. 금지된 사랑이라는 실수 한번, 명예롭지 못한 싸움 한 번이면 충분하다.
26페이지 中
=====

'여성+수치'의 조합은 정말 좋지 않다. 전통적으로 여성을 옭아매는 올가미이자, 타인의 명예를 보장하거나 회복시켜주는 도구로 쓰였기 때문이다.


=====
가문의 불명예로 작동하는 이 수치심은 네 가지 특징을 보인다. 객관적이며, 실체적이며, 집단적이고, 가역적이라는 점이다.

객관적. 수치심은 심리학적 치료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서는 부차적이며, 추락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상황이 낳는 결과다.

실체적. 수치심은 주관적 느낌, 내적 구축물, 내밀한 감정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들어가고 흐려지는 하나의 실체다. 또한 그것은 실체의 점진적 손상이고, 위신의 붕괴다.

집단적. 이 피와 부는 나의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피, 나의 부, 나의 명예가 아니라 씨족의, 집단의, 가문 전체의 것이다.

가역적. 이것은 치욕의 수치심에 고풍스러운 아우라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수치심은 최고의 긍정성인 명예에 대한 부정이다. 복수는 이 부정에 대한 부정, 다시 말해 잃어버린 명예의 복원을 의미한다.

균형을 잡는 비극, 보복 행위, 모욕에 대한 복수를 공개적으로 창출하는 것이 관건이다.
27~30페이지 中
=====

'가문+수치심'을 대입해 보면,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흔한 광경들이 펼쳐진다. 추락은 곧 망함을 의미하므로 불명예를 말하고, 위신이 붕괴되고 손상을 입는 것은 곧 실체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다. 가문 그 자체는 개인보다 집단을 형상화하며, 복수는 곧 명예의 회복을 의미한다.


=====
수치심의 얼굴은 달라진다. 덜 씨족적이고 더 부르주아적이며, 덜 비극적이고 더 영리적이며, 덜 의례적이고 더 심리적인 얼굴로... 먼저, 곧 보게 되겠지만, 가난하다는 수치심 혹은 그저 덜 부유하다는 수치심, 명예의 문화 속에서 주변인이라는 수치심이 확장될 것이다. 빈곤은 그리스도의 안개를 후광처럼 부른 운명처럼 체험되는 게 아니라 개인적 실패와 실패한 야심의 기표가 된다. 한편 명예는 변모되어 가족 속으로 이동한다. 이제 그것은 체면, 정상상태로 불릴 것이다.
38~39페이지 中
=====

시대가 변화고 시간이 변함에 따라 수치심이라는 얼굴은 계속해서 다른 얼굴로 변모한다고 전하며, 경제, 명예 등 현재 개인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고 가지지 못했는지에 따라 수치심을 느끼는 기준이 된다고 전한다. 어쩌면 현재 우리의 모습 속에서 느끼는 '수치심'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 명예 역시 변모되어 체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흔하게 쓰는 말속에 깃든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
우리는 어떻게 살고, 사랑하고, 죽고, 말할까를 자문하느라 삶을 보낸다. 그리고 수준을 지키느라 전전긍긍한다. 누구의 수준, 무엇의 수준인가? 그건 누구도 알지 못한다.
87페이지 中
=====

사람들은 자신만의 망상에 사로잡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까' 고민하며 수치심을 느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타인의 그런 시선에 전전긍긍하기보다 스스로에게 어떻게 살고, 사랑하고, 죽을지를 묻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정작 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는데, 우리는 어쩌면 쓸데없는 상상력과 망상에 사로잡혀 없는 수치심을 만들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수치심에서 비롯된 두 가지 태도>

바로 (수직적인) 멸시와 (고결한) 분노다. 그리고 세 번째 태도가 있다. 극복할 수 없는 혐오다. 비참하고, 비열하고, 불결해지거나 그렇다고 느끼는 것, 그것이 수치심이다.
88페이지 中
=====

어쩌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수치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감정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
수치심의 세 가지 큰 영역(사회적 가난, 정신적 치욕, 육체적 불결)은 내게 화상 같은 상처를 입히고, 굴욕으로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
수치를 겪는다는 건 땅이 꺼지는 듯한 추락의 경험이다. 소심한 이는 당황해서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다. 땅이 꺼진다는 느낌 때문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제동을 거는 것이다. 그는 무리에 달라붙어 있었고, 스스로 사회라는 나무의 한 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매달릴 데가 없어진 것이다. 반면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체적 혐오, 사회적 멸시, 정신적 분노는 스스로 "다수"라고 여기는 무리를 하나로 끌어모으는 다양한 방식이라고.
90~91페이지 中
=====

통상적인 '수치심'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엿볼 수 있는 문장이다. 앞선 부분에 서술된 내용은 소히 당하는 입장에서의 수치심에 대해 서술한 장면으로 이때 느끼는 무력감과 공허함에 대해 실감 나게 담고 있다.

반면, 후반부에 서술된 내용은 이와 반대되는 입장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문장으로,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이자 수치심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수치심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정서로서 수치심은 언제나 붙들고, 유지하고, 멈춰 세우고, 억제한다는 사실과 연계되어 있으며, 그것은 편의와 상스러움과 배덕의 문턱에서 타인들에 대한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자제하는 윤리적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눈길을 뿜는 날것 그대로의 잔인한 빛에 붙들리고 노출된 포로처럼 느껴져, 그저 사라져서 땅속으로 꺼지기를 바라는 뜨거운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불공정하고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세상에 대한 저항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치심은 한계를 느끼는 감정이기에 언제나 변화를 향한 부름이다.


· · · · ·

보통,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면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떠올라 회피하기 바쁜데, 이렇게 깊이 있게 들여다보니, 오히려 그렇기에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수치심을 느끼기에 멈출 수 있고, 상상력을 발휘해 윤리적으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으며,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경험을 통해 인생 경험을 하기도 한다. 또 어리석은 세상에 대해 강한 저항심으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수치심을 '혁명적 감정'이라고 표현했나 보다. 단순하게 한쪽으로 몰아넣고 부정적인 것,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이렇게 툭 터놓고 다방면에서 살펴보니 꼭 나쁜 감정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어떤 것이든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