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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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완독한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서평을 작성하지 못한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담고 있는 무게감을 과연 내가 얼마나 잘 담아낼 수 있을지, 어떻게 담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참을 고심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다 다른 독자들이 쓴 글도 읽어보고, 다시금 내용을 정리하며 마침내 생각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리고 낸 결론은 여태 그래왔듯 내 방식대로, 내 스타일대로 쓰되, 무게감은 조금 줄여보자는 생각에 다다랐다.


이 글을 읽는 또 다른 독자들 역시 함께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이기를 바라기에, 이 책을 읽으며 뜨겁게 달아올랐던 이야기들을 천천히 풀어보고자 한다.



총 7편의 소설로 구성된 이 책은 각각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의미와 상징이 남달라 여러 의미로 들끓게 만들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가볍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소설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강한 몰입력과 호소력에 깊이 매료되는 작품들이었다.


보통은 특정 작품이 유독 마음에 남거나 유달리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어 손꼽아 이야기하고는 하는데, 여기 실린 7편의 작품은 비등비등하다 말할 수 있을 만큼 모두 임팩트 있는 작품들이라 한두 가지를 꼽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7편의 작품을 간략한 줄거리 소개와 함께 인상 깊었던 내용들을 함께 기록으로 남겨보려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중심이 되는 인물들은 모두 여성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모두 깊은 상흔과 아픔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 모두는 연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들이 그렇게 된 사연을 살펴보면, 개인적 혹은 사회적인 부조리, 구조의 문제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점 등 다양한데, 공통점은 하나같이 가슴 아픈 절절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부분은 소설이 아닌 현실처럼 느껴져 당혹스럽기도 하고, 때론 비극적으로 다가오거나, 혹은 고통스럽게 다가와 온통 감정을 뒤흔들어 놓기도 하는데, 결론에 다다르다 보면 어느새 이 감정들도 서서히 가라앉음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라는 생각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등장하는 이들 대부분이 조금씩 변화를 겪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과 화해할 수 있기를 응원하게 된다.


경험만큼 좋은 인생 공부도 없다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몇몇 내용들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도 담겨있는데, 아직까지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처단이 시급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조금 먼 과거의 이야기부터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까지 두루 만나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던가 '무엇이 문제일까?'를 고심하며 함께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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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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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스물일곱 살, 늦깎이 대학교 3학년 영문과 학사 편입생이 된 희원은 매주 금요일 오후에 듣는 영어수업의 강사를 보며 자신의 미래를 꿈꾼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을 비롯해 모든 것이 설렘으로 다가와 그저 좋았고 행복했다. 그렇게 자신의 미래가 될 강사의 수업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러던 중 당황스러운 사건을 맞닥뜨리게 된 희원을 강사가 도와주게 되면서 둘은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후 희원은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에 검색을 통해 그녀에 대해 알아보게 되고 이후 그녀의 에세이 책까지 어렵게 구매하면서 그녀와 자신의 공통점도 발견하게 된다.


그녀의 영어 에세이 수업을 통해 희원은 자신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되고 이와 동시에 나아가 대학원 진학을 꿈꾸는데, 이에 대해 먼저 그 길을 가고 있는 강사는 "공부는 대학원이 아닌 곳에서도 할 수 있다" 말한다.


이에 상처를 받은 희원은 그녀의 말을 오해하게 되고 이에 따라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내뱉게 된다. 이후 시간이 한참 흘러 대학원을 다니고, 마침내 강사가 되고 난 뒤에 비로소 그녀가 그때 한 말의 의미를, 그녀가 경험하고 감내해야 했던 감정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그제야 희원은 자신의 감정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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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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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위해 기존의 일들을 포기하고 새롭게 도전한다는 것은 무언의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온다. 와중에 자신의 미래가 될 수도 있는 강사를 보며 어쩌면 막연한 희망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컴컴한 미래에 한줄기 빛과 같이 느껴졌을, 약간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강사는 그래서 동경의 대상이자 미움의 대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녀가 진심을 담아 전한 말이 유독 더 큰 상처로 다가온 것이리라.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던 희원은 마침내 자신이 그녀와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현실과 수많은 경험과 감정들이 그렇게 표현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누구나 비슷한 상황이라면 느낄만한 심리적 압박감과 두려움, 기대감 등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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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한 대학의 교지 편집부에서 동기로 만난 '해진'과 '희영' 그리고 이들의 선배' 정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스토리는 줄곧 '해진'을 '당신'이라는 2인칭 대명사로 지칭하며 이야기가 서술된다.


교지 편집부의 일원이 되면서 인연을 맺은 희영과 선배 정윤은 유독 해진에게 자극을 주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유는 해진이 그들의 글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은 선배인 정윤의 글이었다. 때문에 편집부에도 지원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희영의 글에 또다시 반하게 되는데, 그녀의 글은 타고난 관찰력과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지력이 있었다.


그들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하다 느끼는 솜씨였지만, 그래도 해진은 그곳이 좋았고,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교지에 실을 주제를 논하던 중 '여성문제'에 대해 다루다가 갈등과 논쟁이 심화되면서 정윤과 희영의 틈이 벌어지고 그렇게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이후 시간이 흘러 결국 끝까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은 건 해진이었고, 정윤은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떠나고 희영은 기지촌 활동을 하다가 병을 얻어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희영의 부탁으로 해진은 희영이 죽은 후에 대학 시절의 사람들에게 대신 보내달라는 메일을 보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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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야기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나 주제들이 여럿이지만 유독 이 이야기에서 도드라졌던 부분은 '여성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여성들과 그리고 글이 주는 힘에 대한 부분이었다.


특히 셋 중 가장 솜씨가 부족했지만 편집부 활동을 통해 글쓰기에 매료되고, 이를 통해 가파른 성장세를 이뤄내며 마침내 기자라는 직업까지 갖게 된 해진의 모습에서 글이 주는 힘의 위력을 다시 보게 만든다.


그런 해진의 성장세를 이끌어 낸 세 번의 읽기 경험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대동제 기간 'A 여자 대학교'의 학생들에게 집단 폭력을 가한 사건에 대해 명백히 '폭력'이라 명명하며 논리를 펼친 정윤의 글이다.


두 번째는 'B 대학교 대학원'에서 일어난 교수 성희롱 사건을 분석한 희영의 글이며, 세 번째는 희영의 제안으로 함께 조사하면서 알게 된 '맞아 죽은 여자들'에 대한 내용과 희영이 쓴 '남편을 죽여야만 아내가 살 수 있는 사회구조의 잔인함'에 대한 글이었다.


이 세 번의 특별한 '읽기 경험'을 통해 해진은 글이 발휘하는 힘에 대한 이해는 물론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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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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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성문제'로 갈등을 겪다 관계가 어그러질만큼 이들에게 있어 당시 '무엇을 어떻게 읽을지'를 치열하게 묻는 일은 곧 글쓰기를 통해 '특정 사한을 누군가에게 제대로 직시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더불어 이들 모두 여성이었기에 사회적으로 낮았던 여성의 지위라던가 뿌리 깊은 역사, 타인의 시선 등과 같은 것들이 버무려져 쉽지 않은 관점으로 부딪히게 된 것이었다.


또 각자의 시선에서 각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거침없이 쏟아냄으로써 자신의 신념과 확고한 가치를 알리고자 했기에 이들은 그렇게 사이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다른 관점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듯하다.


이들은 마지막 순간, 글쓰기(메일)와 말하기를 통해 각자의 마음을 전한다. 자신이 전해야 할 마지막 몫을 그렇게 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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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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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스물일곱, 삼 년차 사원일 때 만난 일 년 계약 인턴으로 들어온 다희. 풍력발전기 공사현장을 매일 직접 다니며 그날 발생한 문제와 민원을 파악해 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만만치 않았던 일정에 불쑥 인턴사원이었던 다희가 함께 하게 된다.


여기에는 중국어에 능통해서 중국인 기술자와 협력업체 직원들을 지원하기 위해 다희가 인턴 생활 한 달 만에 그녀의 어시스턴트로 현장에 파견되어야 했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다희는 운전을 하지 못했고 공사장까지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카풀을 제안했고 그렇게 그들은 늘상 같은 길을 함께 오가게 된다.


다희는 다른 인턴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이었는데 오래 방송국 피디 시험을 준비했으나 잘 되지 않아서 작년에 포기하고 이곳에 지원했기 때문이다.


약 1년간 둘은 함께 하며 나름대로 친분을 쌓게 되고, 서로를 사적으로 알아가는 시간도 갖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희가 함께 있는 시간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데, 계약 기간인 일 년이 거의 다 되어갈쯤 이들은 서서히 서로에게 다 말하지 못하는 말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서서히 멀어져 간다.


이 이야기는 그런 일 년을 함께 보내고 마지막을 고했던 다희를 팔 년 만에 우연히 수술 후 회복 중인 병원에서 만나게 되면서 다시금 직장 생활 중 가장 편안하고 다정했던 다희와의 일화를 회상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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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로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돌아서면 남의 험담하기 바쁜 사람들, 나에게 상처 주었던 직장 동료들 속에서 유달리 솔직하고 다정했던 다희는 동갑내기 직장 후배로 1년을 함께 하게 된다.


일 년 계약 인턴직 후 정규직 전환이 되지 않아 단 1년뿐이었지만, 카풀을 하며 함께 한 시간들은 그녀에게 있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아마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토록 기억에 오래 남아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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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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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마지막 순간에는 마음속에 담아둔 말들을 다 꺼내지 못하고 아쉬운 작별을 고했지만, 직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인연을 만났기에 우연한 만남에서도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만난 인연 중 헤어진 후 다시 만났을 때 반가운 인연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참 귀한 인연이자 소중한 한때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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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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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에서 이모가 조카에게 쓰는 편지 형태로 쓰인 이 이야기에는 어린 시절 언니와 자신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시작으로 자신이 감방에 들어오게 된 사연과 마지막으로 왜 이 편지를 남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문이 담겨 있었는데, 이 책에 실려있는 7편의 이야기 중 유달리 더 아픈 이야기였다.


아빠의 가정폭력으로 내가 네 살 무렵에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 엄마와는 헤어지게 된다. 이후 자매는 고모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생활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사랑받고자 애쓰는 두 딸에게 아버지는 무심한 것을 넘어 언니만을 지명해서 늘 상처 주는 일들을 서슴지 않게 된다.


이에 함께 상처를 받게 된 나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생각을 단념하게 되고 두 자매가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게 된다. 언니는 공부도 잘하고 생활력도 강해 추후 대학에 가서 은행원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나에게 용돈도 주고 필요한 것들도 사주는 등 든든한 언니 역할을 자처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집 골목 앞 큰길에서 언니를 내려주는 검은 세단을 발견하게 되는데, 나와 마주친 언니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알고 보니 언니 학교 교련 선생님이었는데 학생인 언니와 몰래 연애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는 언니보다 열다섯 살이 더 많았음에도 거리낌 없이 사람들 눈을 피해 언니와 만남을 지속해 나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언니는 은행원이 되겠다는 꿈을 접고 백화점 의류 매장에 취직해 생활을 이어 나갔고, 나는 고등학생이 된다. 나는 그런 언니의 상황이 못마땅해 그에 대해 조사해 보는데, 그는 언니가 졸업한 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고 학생들에게 잘하고 평판이 좋은 사람으로 알려진 것을 알게 된다.


언니는 스물하나가 되던 해에 임신을 하게 되고, 아빠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그와 언니는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고 처음 우리 집에 인사 온 날 인사도 하기 전에 처음 나를 보고 한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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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를 줄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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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이었다. 이후 그는 내 다리에 시선을 고정했고, 내가 짧게 묵례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의 시선은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 이때 쑥쑥 크는 키로 인해 치마가 짧아진 상태였음을 언니가 이야기했음에도 그의 시선은 한결같았음)


시간이 지나 나는 언니의 도움 덕에 대학의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서울의 한 대형 호텔 레스토랑에 취직해 해산물 파트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형부의 차에 올라타는 한 학생을 목격하게 되고 언니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 일을 여러 번 목격하게 되면서 현장을 급습한 나는 학생에게 다시는 만나지 말 것을 요구하며 학교에 알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모든 화살은 나에게 돌아오게 된다. 이에 학교 측에서는 학생에게만 처분을 내리게 되고 언니와 형부는 사과를 요구하는데, 억울하게 어이없는 상황에 나는 황당함을 넘어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형부는 집 근처 골목에서 기다렸다가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언니를 꼬드겨 집으로 불러들여 협박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보란 듯이 나의 약점인 언니를 내가 보는 앞에서 때리고 언니가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순간 눈이 돌아 형부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이내 그의 뒤에서 한쪽 팔로 거의 목을 조르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손목을 뒤로 꺾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의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를 아프게 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그는 빌었고,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를 풀어주게 되는데, 그는 곧장 일어나 냉장고 앞에 서 있는 언니에게 가서 대뜸 언니의 머리를 때리기 시작한다.


언니는 마치 내가 그를 자극해서 언니를 때리게 했다는 듯이 나에게 사과를 종용한다. 그 일 이후 나는 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 순간마저 언니는 남편이 자기를 때린 적이 없다고 증언함으로써 나는 없던 사실마저 자포자기하듯 시인하는 것으로 감옥에 가게 된다.


나는 감옥에서 지내며 스물넷에 출소하는 날까지도 언니가 찾아올까 기대하지만 언니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다. 나는 꽤 오랫동안 나를 버린 엄마와 이런 상황을 만든 언니에게 분노를 느끼지만 결국 그 상황을 감당 못한 엄마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출소 후 팔 년 후 고모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언니를 만나게 되지만 그저 마주 보는 것이 다였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시는 조카인 '너'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마지막 편지를 남기게 된다. '네'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온전히 사랑했던 마음을, 소중한 사람이었음을 전하기 위해서.


결국 전해지지 못할 마지막 편지에는 조카의 스물세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그렇게 조카의 행복과, 안전을 비는 편지로 마무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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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인해 엄마가 집을 나가게 되면서 이 화는 곧 언니에게 옮겨가게 된다. 그렇게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언니는 작은 호의에 기대게 되면서 홀로 위험한 사랑을 시작하게 되고 이것은 곧 가스라이팅으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 혼전임신으로 결혼하게 되는 며느리가 못마땅한 시어머니와 일상이 폭행과 가스라이팅으로 이어지는 열다섯 살이 많은 교사인 남편.


여기에 더해 젊고 어린 처제를 보는 불순한 시선과 결혼 후에도 제자인 학생을 대상으로 이어지는 성폭력과 가스라이팅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그 밖에도 자신은 바람을 피우면서도 아내를 대상으로는 의처증 증세를 보이며 끝없이 조종하고, 심지어 처제가 보는 앞에서 협박과 폭력을 일삼는 행동들은 누구라도 눈이 돌 것 같은 상황을 만든다.


끝끝내 그는 어떤 반성이나 법적인 조치도 받지 않고 희희낙락하며 살아가고, 오히려 약자이며 희생자인 '내'가 없는 사실마저 인정하며 감옥생활을 한다는 것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진다.


이 일로 한 가족은 사이가 요원해지며 평생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고, 한 사람의 창창한 미래는 저 밑에 처박히는 상황이 된다. 또 다른 누군가는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쫓겨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앞으로 '내'가 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그의 앞에 무릎 꿇으며 진창에 빠지게 될까?


이모인 '나'는 그런 상황들을 겪어내며 하나뿐인 조카의 안위가 걱정되는 한편 전하지 못할 사랑을 담아 편지로 마음을 전한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일들이 자신들에게 벌어졌는지, 또 마지막에는 그럼에도 너만은 끝까지 사랑한다고, 안전하기를 바란다며 마지막 글을 맺는다.


이런 유의 이야기는 현재도 종종 뉴스를 통해 목격되는 일들이라 더 마음이 아팠던 이야기였다. 한 가정의 파탄이 불러온 파급력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또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목도할 수 있었다.


더불어 사회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여기에서 희생되는 것은 결국 힘없고 백 없는 사람들이라는 분명한 사실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면서, 그런 사회 안전 보장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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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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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인 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이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던 엄마 민주는 학교를 찾아가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이에 교사는 "지쳤대요. 자기가 이십사 시간 내내 돌아가는 컴퓨터 같다고. 잠시 전원을 꺼두고 싶다고요."라는 소리의 말을 대신 전하면서 소리가 교지 공모에 쓴 글을 건네준다.


여기에는 삼촌인 민혁이 죽기 전 함께 텃밭을 가꾸던 시절에 관한 내용과 그의 죽음 이후 더는 텃밭에 가지 않게 된 일에 대해 담담하게 담겨 있었다.


이 일로 엄마인 민주는 다시금 오빠인 민혁이 살아생전 자신에게 어떤 사랑을 베풀어 주었는지, 또 텃밭을 가꾸며 함께 살던 시절에 대해 회상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열다섯 살이 많은 오빠가 어릴 적부터 얼마나 자신을 희생했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실질적인 부모 역할을 하며 얼마나 정성껏 자신을 돌봤는지를 깨닫게 된다.


더불어 이혼하고 아이를 데리고 돌아온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면서, 자신이 다시금 작가로 꿈을 꿀 수 있게 도와주는 한편, 함께 텃밭을 가꾸며 살뜰히 조카까지 키워주었던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민주는 오빠가 살아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오빠의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 소리에게 텃밭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 오빠의 사랑 표현 방식과 돌봄 행위의 소중함에 대해 알게 되면서 다시금 소리와 텃밭을 가꾸며 삼촌의 가르침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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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텃밭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고 크다. 소리에게는 성장의 발판이 되는 장소이자, 삼촌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우는 공간이며, 엄마인 민주에게는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을 가꿔나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소리는 이곳에서 '아무거나'는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삼촌의 가르침을 통해 배우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분명하게 표현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또 작은 씨앗을 세심하게 가꾸면 그로부터 커다란 세계를 품은 생명이 자라난다는 사실을 삼촌과 함께했던 시간으로부터 배우고 이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게 되면서 소리에게 텃밭은 쉼이자 배움의 공간이 된다.


민주에게 텃밭은 소리의 글을 통해 다시금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되는 장소이자, 오빠로부터 받았던 보살핌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공기처럼 너무 당연한 듯 있어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소중한 이의 사랑 표현 방식과 돌봄 행위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음을, 존재할 수 있었음을 깨달으며, 마음속으로 나마 감사를 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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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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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인 '희진'은 어릴 적 이모의 손에 자라게 된다. 아마도 여러 번의 유산 경험이 있던 엄마와 그 외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이모가 희진네 집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렇게 함께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모가 주 양육자가 되었던 것 같다.


엄마인 '숙경'과 이모인 '숙희'는 스물두 살 차이가 났는데, 때문에 주변에서는 이모를 두고 '희진이 할머니 시구나'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모는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관둬야 했는데 이 말은 내가 중학생이 되고 독서실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듣게 되었다. 혹시나 내가 실수할까 봐 엄마가 알려주는 거라며 결코 내색하지 말라는 당부가 뒤따랐다.


그 즈음 이모는 홀로 스탠드를 켜놓고 수학 문제를 풀거나 공부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이모는 졸업도 할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때가 이모 나이 예순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그렇게 이모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면서 나보다 먼저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내가 중학교 3학년을 마무리할 때쯤엔 고등학교 과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한번은 이모가 과거에 오랫동안 일했다는 곳을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미군 부대에서 물건을 떼와서 대량으로 팔기도 하는 등 규모가 꽤 컸다고 한다. 아마 학교를 관두고 살림에 보태기 위해 일을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아빠와 이모의 관계를 살펴보면, 아빠가 일을 일 년간 놓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모의 태도에는 언제나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그 존경심의 바탕에는 아빠가 서울대를 졸업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있었다. 반면, 이모를 대하는 아빠의 태도에는 늘 옅은 무시가 깔려있었다.


그날은 중간고사가 끝난 열여덟 살의 봄이었다. 이모는 갑작스럽게 이 집을 떠날 거라 선포했고, 내가 방학 시작할 즈음 정말 이모는 집을 따로 얻어 이사하게 된다. 그리고 이모가 떠나고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가세가 기울면서 우리는 십삼 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다.


이때쯤 엄마와 아빠는 점점 더 싸우는 일이 잦아졌는데, 나는 엄마와 아빠가 차라리 헤어지기를 바랐지만 두 사람은 이혼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즈음 나는 공군사관학교에 관한 정보를 들었고, 마침내 입학하여 그곳 기숙사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스물다섯, 공군 소위로 임관한지 이년 차에 되었을 때 나는 애써 조정해놓은 마음의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자주 악몽을 꿨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났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누군가 실수로 어깨를 치고 가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그 시기에 이모를 다시 만났다.


이모를 보지 못한 칠 년 동안 나는 이모를 향한 그리움을 조금씩 지워나가는 것은 물론 그저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런 이모의 찾아오겠다는 연락은 돌연 반가움보다는 오히려 미움이 앞섰다. 그럼에도 막상 이모와 가까워지자 이모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금 일었다.


한파주의보에도 얇고 낡은 코트를 입고 있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멀리까지 찾아와준 이모와는 밥 한 끼 먹고 금방 헤어지게 된다.


추후 일흔아홉이 된 이모는 뇌졸중을 앓았는데, 마지막 오 년 동안 이모는 말을 아주 느리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엄마는 이모가 쓰러진 직후에 이모의 집으로 들어갔고, 그때가 엄마 아빠의 공식적인 별거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칠 년 만에 다시 만난 이후로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은 얼굴을 보고 지냈고 엄마가 이모네 집에 들어간 이후로는 그전보다 자주 보게 됐다. 그 십오 년 동안 나는 이모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갔다.


일평생 그토록 개를 싫어하던 이모는 예순일곱에 군밤이라는 이름의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것과 칭찬받는 걸 어색한다는 것, 그리고 칭찬을 들을 때면 쥐구멍을 찾는 표정을 짓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모는 검정고시 학원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일흔세 살에 후쿠오카로 패키지 여행을 갔고 그 여행을 계기로 이모는 캄보디아와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이모의 마지막 여행지는 미국이었다. 이모는 LA를 거쳐 그랜드캐니언으로 갔다.


이모가 떠난 새벽에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세시 오십분이었다. 우두커니 앉아 있다 전화가 울렸는데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어떤 용건인지 전화를 받지 않아도 용건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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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함께 했기에 몰랐던 이모의 소중함을 갑작스런 사정으로 떨어져 살게 되면서 희진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조금 무심해 보였지만 사실은 이모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이모에게 받은 것들로 인해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넓어지고 깊어졌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학업중단이라는 스스로의 아킬레스건 때문에 이모는 늘 아버지를 존경한 한편 그런 자신을 무시하는 아버지에게도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그저 나이차 많이 나는 동생과 조카를 돌봐주며 늘 헌신했다.


칠 년 만에 만난 이모, 그리고 이후 뇌졸중을 앓는 이모와 함께 한 십오 년, 어쩌면 이 시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알아가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어릴 적 희진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카와 동생을 위한 돌봄의 시간들은 이모에게는 완연한 희생이었을 것이다. 반면 희진과 그의 가족들에게 그 돌봄은 그들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그들을 살리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모의 부재와 칠 년 만의 만남은 희진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롭게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뇌졸중을 앓게 된 이모,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생략된 나머지 십오 년의 시간 속에는 짐작건대, 이모와 희진, 엄마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들이 받았던 보살핌을 되돌려주는 시간인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지게 되면서 희진은 아마 이모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희진은 그런 변화들 속에서 스스로 발을 디디며 살아가는 지혜와 꿈을 꾸며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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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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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남은 모처럼 만에 둘째 딸 우경의 초대를 받아 홍콩으로 딸을 만나러 가게 된다. 하지만 공항에서 맞이하는 첫걸음부터 어쩐지 불안하게 삐꺼덕거리기 시작하는데, 한참이 지나도 두 개의 캐리어 중 하나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빨간 모자를 쓴 젊은 여자가 한국어로 도움을 주게 되면서 분실물 접수를 마치고 게이트를 나가 둘째 딸 우경과 손자 마이클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이들을 따라 우경이 사는 고층 아파트 십칠층에 들어서고 거기서 헬퍼인 제인과도 인사를 나누게 된다. 사위인 제임스는 현재 중국 출장 중으로 편하지 않은 관계라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기남이다.


우경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대학을 나와 컴퓨터 관련 일을 하다가 이십 대 중반에 재미교포인 제임스와 결혼하고 마이클을 낳았다.


미국에 간 뒤로 우경은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거리를 뒀는데, 끔찍하게 아끼던 제 아버지에게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언니 진경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진경과 우경은 여덟 살 터울로 진경은 남편의 첫 결혼 실패에서 얻은 딸이었다. 남편은 기남이 일하던 공장의 거래 업체 직원으로 끊임없이 정성으로 구애하는 것에 감동해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전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종종 늘어놓곤 했는데, 기남은 그를 믿었기에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믿었다. 또 마음을 열어 자기 상처도 모두 보여주게 되는데, 일평생 그 사실이 약점으로 작용해 대가로 작용할지는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어쨌든 그랬음에도 한 가지 만큼은 확실히 긍정적으로 작용했는데, 바로 진경의 존재였다. 그 애는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남에게 주고자 했고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했다.


기남은 사실 아홉 살 때부터 식모 일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부모가 부유했음에도 그저 키우기 귀찮다는 이유로, 아들 없는 집의 여섯 번째 딸을 참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를  권 사장네 식모로 팔아버린 것이다.


덕분에 기남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김 여사라는 여자와 함께 권 사장이 운영하는 공장의 주방에서 서른 명의 밥을 하는 일을 하면서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김 여사와 시간을 보내면서 기남은 자신이 여태껏 의존해왔던 기만의 뿌리를 뽑아내는 한편 용기를 내어 권 사장에게 월급을 요구하기도 한다. 덕분에 시간이 갈수록 기남은 권 사장에게 깊은 분노를 느꼈고 그 분노는 기남에게 약이 된다.


우경은 진경이 여덟 살 때 태어났는데, 낯가림이 심하고 조용한 진경과 다르게 우경은 활달하고 적극적인 아이였다. 남편은 그런 우경을 눈에 보이게 편애했다.


한번은 진경이 박사과정을 다니고 우경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밤 진경이 이층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게 되는데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 거였다.


그때 이후로 진경은 알코올 중독자로 낙인찍히게 되면서 수시로 술에 빠져 실수하는 모습들을 보이게 되고 점점 더 진경은 고립되고, 가족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경은 진경을 경멸했는데, 그나마 오 년 전에 우경이 진경과 기남을 미국으로 초대했지만 거기서도 술을 먹고 실수를 저지르게 되면서 더없이 멀어지게 된다.


한편 갓 스무 살이 되던 해 기남은 한 여자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는데 그녀는 자신을 기남의 큰 언니라고 소개했다. 그녀가 생모의 생일잔치에 기남을 초대하게 되면서 기남은 뜻하지 않게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가족들로부터 차가운 냉대를 받게 되면서 자살 충동까지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기남은 꿋꿋이 열심히 살아가며 이후 결혼도 하게 되고, 진경과 우경과 가족을 이루며 살게 된다. 하지만 그 결혼 역시 실패작으로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은 상태에 놓이게 된다.


홍콩에서의 생활은 불편한 마음만큼이나 어렵게 흘러가기 시작하는데, 홀로 쇼핑몰을 여행하던 중 지갑과 핸드폰이 들어있던 가방을 잃어버리는 일이 또 발생했기 때문이다. 기남은 이때 낯선 그곳에 앉아 자신이 여전히 미숙하고 여전히 두려움이 많은 아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게 어렵게 다시 만난 우경은 전화가 되지 않는 엄마 기남을 타박하기에 이르고, 냉정하게 돌아서며 집을 향해 걸어간다. 추후 이 장면은 우경이 자신의 시어머니와 다정하게 통화하는 장면과 대조되는데, 기남은 이때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 어떻게 제임스의 어머니에게는 가능했는지 홀로 궁금해한다.


왜 자신에게만은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지, 또 자신에게서 어떤 결정적 결점이 있기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우경에게 마치 얼룩같이 여겨지는지 기남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 · · · ·


이 작품 역시 많은 주제가 내포되어 있는 이야기였는데,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의 결핍이 삶에 미치는 영향력, 헬퍼일(혹은 식모살이)을 통해 국가를 가리지 않고 하위 계층으로 계속해서 전가되는 구조의 불합리성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가 등장하는 기남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딸이라는 이유로, 키우기 귀찮다는 이유로 집에서 버려져 어느 집 식모살이로 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겨우 국민학교는 졸업하게 되지만, 식구 대접은커녕 월급도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살게 된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아주머니 덕분에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점차 자신의 권리를 조금씩 되찾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하나씩 다져가던 중 자신을 향해 적극적으로 구애하던 남자를 믿고 결혼을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의 혓바닥에 농락 당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혼생활을 이어 나갔던 건, 세상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온전한 퍼주기식 사랑을 남편이 데려온 딸, 진경으로 받게 되면서부터다. 어쩌면 그래서 기남에게는 자신이 직접 낳은 딸보다 마음으로 낳은 딸인 진경이 더 애틋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결핍은 또 다른 결핍을 낳았을 것이고 온전히 부모로서 주어야 할 내리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하게 되면서, 둘째 딸 우경은 점점 더 삐뚤어졌을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가 그녀만을 편애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남은 남편의 기에 눌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자신 또한 제대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 가족은 와해되고, 엄마의 사랑을 오로지 받는 언니 진경이 우경에게는 눈에 가시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한편 오랫동안 식모살이를 하면서 체득한 경험은 기남에게 있어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남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을 불러와 자신도 모르게 '수고한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내뱉게 만든다.


하지만 처음부터 헬퍼를 한 사람이 아닌, 그저 돈을 주고 쓰는 고용인으로 생각한 우경은 그들을 함부로 대하며 방치한다. 그들이 무얼 먹는지, 어디서 자는지 궁금하지 않다며 날카롭게 대꾸하는 우경의 모습에서 기남은 어쩌면 자신의 식모살이 시절을 다시금 상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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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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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고 연약한 이들의 속 깊은 이야기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면서 현실을 아주 디테일하고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그래서인지 그저 소설로만 치부하며 넘겨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다. 때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무엇부터 고쳐나가야 할지 막막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지켜보게 되는 건 이들이 결론에 다다라 결국엔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변화를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상처받고 버려지는 상황 속에서도 극단적인 선택보다 스스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하고, 성찰하기를 망설이지 않음으로써 서서히 회복하는 과정을 거쳐간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이들은 포기하기보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한다. 스스로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 어떤 목소리를 품고 있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하지만, 이들은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며 마침내 자신만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 소설이 지닌 힘이자 꽤 큰 매력으로 다가왔는데, 어쩌면 우리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함께 해보게 된다.


소설이 현실과 많이 닮아있는 만큼, 우리가 가진 '나다움'의 빛깔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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