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
작가 水 지음 / 좋은땅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이야기를 시나리오를 통해 만나보는 건 처음인데 소설이나, 에세이 등의 장르로 만나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감독 혹은 삼자의 관점에서 조금 떨어져 무대의 배경과 인물 하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어 색다른 재미가 있다.

 

지문이나 스토리 외의 요소들이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는데, 전혀 그런 느낌은 들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총 다섯 편의 시나리오로 만나보는 단편집들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소재를 중심으로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찰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단지, 네 번째 이야기인 갈릴리 병원만큼은 예외다. 사회적 이슈나 삶의 중요 가치에 대해 논하기 보다 저자 개인의 취향 혹은 종교적 신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시나리오별 콘셉트와 간단 줄거리
=====

 

1.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

 

▶드라마 콘셉트
기억을 팔아 현실을 도피하고자 했던 기막힌 사연을 간직한 중년 여성이 기억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판타지, 스릴러 드라마

 

▶작의
우리는 지난 기억들을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생의 어느 순간, 어느 지점은 떠올리기조차 숨 막히는 기억으로 존재한다. 해서 그 기억만 없다면 자신의 생은 완벽해질 것만 같은 바람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착각이다. 오늘의 나를 '나'이게 하는 그것은, 바로 '기억'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지우개>가 다루고 있는 '기억의 상실'은 기억이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시금 상기하게 할 것이다.

 

 


2. 호상 好喪

 

▶희곡 콘셉트
박판례 할머니가 식물인간이 되자, 무능한 아들 셋은 집안의 기둥인 판사 딸과 좌충우돌한다. 이때 박 할머니가 들어 놓은 보험에서 거액의 사망보험금이 지급된다는 소식을 들은 세 아들들은 마음이 심란해지는데.

 

▶작의
호상은 2020년 대한민국 사회에 물음을 던진다. 대한민국 일원으로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개인이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면, 우리 구성원의 노쇠함과 죽음을 언제까지 개인의 문제로 방치할 것인가를 말이다.

 

오로지 자본주의 경제 논리로 운영되는 사회가 아닌 '자본주의의 인간화' 즉 인간의 존엄한 가치가 우선시되는 사회로 바뀌어야 구성원 모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돌봄의 경제 철학 아래, 국가는 구성원의 안전과 건강, 그리고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각성이 절실히 필요한 때임을 전하고 싶다.

 

 


3. 새순

 

▶희곡 콘셉트
1980년 5월 광주, 평범한 고등학생 달래와 행진 쌍둥이 남매는 서울에서 배낭여행을 온 대학생 상철과 형준을 만난다. 달래와 행진은 묵을 곳을 찾는 상철과 형준을 집으로 데려가 즐거운 한때를 보내게 된다. 그것이 마지막 밤인 줄도 모르고.

 

▶작의
5.18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로, 오랜 세월 '폭도'라 오해받고 사지로 내몰렸던 시민들이 어떻게 시민 군이 되었는지 그 탄생의 날을 돌아보고자 한다. 

 

오늘날 반드시 회상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기억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또한 민주주의 불씨가 된 5.18의 참혹했던 기억을 회상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역사의 '새순'으로 자라날 것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불사하는 광주시민의 숭고한 저항은 폭동이 아닌 참된 민주주의 혁명으로 계승되어야 함을 <새순>에 담아 세계에 전한다.

 

 


4. 갈릴리 병원

 

▶희곡 콘셉트
경영난으로 문 닫을 위기에 처한 심장이식 전문 병원에 새로 부임하기로 한 원장이 행방불명된다. 병원을 빨리 문 닫고 헐값에 팔아 버리려는 재단 이사장과 병원 가족들은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는데, 과연 갈릴리 병원은 회생할 수 있을까?

 

▶작의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이 줄거리는 삶의 곳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난 중에도 주님이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축복이 될 거라는 내용이다.

 


5. 수목장 樹木葬

 

▶드라마 콘셉트
사랑하는 엄마를 안락사시킨 간호사와 그녀를 사랑한 담당 검사,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사회적 통념을 다룬 현실 사회 문제극.

 

▶작의
생사의 결정이 누구의 영역이어야 하는가의 질문을 떠나서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환자를 지켜내야 하는 가족의 고통을 돌아보고, 우리 모두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말하고 싶다.

 

 


=====
자세히 들여다보기
=====

 

다섯 가지 시나리오 중 네 가지 이야기 모두 현실에 도래하고 있는 여러 사회문제와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는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특히 두 가지 이야기가 인상 깊어 더 깊이 들여다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삶에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또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

 

평범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시정은 잊고 싶은 기억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중년의 여성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재회한 고향 친구 유미로부터 젊음과 미모,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성형외과를 소개받는다. 그녀는 그곳에서 젊음과 기억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한편 50대이지만 20대의 미모를 가지고 있는 유미는 이시정의 어릴 적 친구로 본명은 이점순이다. 현재 500억 매출의 '아기 피부화장품' 회사의 대표이사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20대의 미모와 젊음을 이용해 승승장구 중이다.

 

그러나 실상은 유미 역시 기억과 젊음을 맞바꾸어 유지하고 있는 상황으로 더 이상 맞바꿀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유미는 간당간당하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렸을 때부터 놀림과 설움을 당하는 것은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불운한 삶을 살았던 유미에게 어쩌면 그 모든 과거의 기억은 지우고만 싶었던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어렵사리 키운 하나뿐인 아들의 기억마저 지워버리는 상황이 되자 어느덧 끝없는 과욕에 치닫게 되면서, 결국 삶의 끝에 이르게 된다.

 

한편, 최근 삼 년 사이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과 시어머니를 잃게 되면서 우울과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던 시정은 늙고 소외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가벼운 마음으로 성형외과를 찾는다.

 

딱 일 년 치의 기억을 지우고 찾고 싶었던 생기와 아름다움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어느새 유미와 같은 중독에 빠지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

시정(F): 분명, 일 년간의 기억이라고 했어. 일 년... 그런데, 삼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데 난 기억이 나질 않아. 그럼, 그것들이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는 거여 시방? 이것들을 그냥!

53페이지 中

-----


단순히 불운하고 불행했던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것이 결국 정말 소중한 사람들의 기억마저 지워버리게 되면서 어느새 삶의 의미와 방향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

늙은 간호사: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자신의 주름을 지워 버리려고만 해.
시정: (눈에 눈물이 맺혀서) 몰랐응께. 기억이란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인 줄 몰랐응께라.
82페이지 中

-----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가득한 성형외과에서 유일하게 늙은 간호사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자신의 주름을 지워버리려고 한다'고 말한다.

 

이에 뒤늦은 후회를 하는 시정은 '기억이란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인 줄 몰랐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내 이미 허물어진 기억의 구멍들은 더 큰 나락으로 시정을 이끌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암울했던 어두운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불킥하던 순간들만 사라지면 왠지 더 당당하고 아름답고, 완전무결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행의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억의 조각은 케이크 자르듯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도려내는 순간 무수히 복잡하고 많은 관계와 선들은 갈 곳을 잃게 된다.

 

지금의 나는 누구이고, 내가 살아가는 방향은 무엇인지, 또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누구인지 모두 잊게 되는 엄청난 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행했던 순간마저도 소중하게 감싸 안아 주자.

 

지금, 현재의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에 불행과 고난도 섞여 있음을 인정하자. '기억' 이 있음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살아온 과거의 모든 순간을 사랑해 주자.

 

 


■수목장

 

어릴 때 폐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난봉꾼으로 불리던 아버지 사이에서 어렵사리 큰 삼 형제는 칠 년 째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아버지의 병실 앞에서 각자만의 이유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다.

 

특히 어릴 적 술만 먹으면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가 칠 년 전에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돼서 이들의 앞에 나타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삼 형제는 냉혹한 현실 앞에 아버지의 처우를 두고 갈등 중이다.

 

한편 이들 아버지의 담당 간호사인 현주 또한 엄마가 말기 암으로 암 병동에서 치료 중으로, 통증이 심해서 늘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고통이다.

 

그러던 중 현주의 사정을 알고 있던 남자친구는 이별을 고하고, 환자와 보호자로 마주치면서 어느새 민철과 현주는 연인 사이가 된다.

 

그 사이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환자와 보호자가 동반 자살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현주 또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엄마의 요청에 따라 더 지켜보지 못하고 안락사를 감행한다.

 

이에 담당 검사와 피고로 만난 이들은 어쩔 수 없는 대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아직 안락사에 대한 아무런 법안이 없는 상황이라 존속살인으로 인정되는 분위기 속에서 과연 이것이 정당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증인으로 나온 동료 간호사인 은주는 안락사에 대해 '살인'이라고 말하는데, 그녀가 이렇듯 직업적 소명만을 주장할 수 있는 건 그녀가 가진 배경도 한몫한다. 의사 가족과 부유한 집안 덕에 경제적 어려움이나 장기입원에 따른 어려움을 고려 대상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주와 같은 배경을 가지지 못한다. 특히 식물인간이나 암 병동과 같은 장기입원 사례의 경우 경제적인 부분은 물론, 돌봄과 치료에 있어 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치료 과정 중 환자가 겪어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고, 이를 함께 겪어 나가는 가족들조차 현재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많은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결국 안락사와 같은 안타까운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

변호인: 피고와 같이 돈 없고, 빽 없고, 자신이 어머니의 유일한 가족인 사람은 이러한 경우, 존속 살인자가 되어 저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이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고 이현주가 존속살해 혐의로 이 재판정에서 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세계 최고의 초고령화 사회로 가파르게 올라서고 있는 대한민국은 머지않아 수천, 수만의 존속 살인자 공화국이 되고 말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변호인은 피고가 안락사에 대한 아무런 법안이 없는 법정에 나와 재판을 받아야 하는 이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01페이지 中

-----


현주의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변호인은 위와 같이 언급한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대한민국은 조만간 수천, 수만의 존속 살인자 공화국이 될것이라고.

 

돈 없고, 빽 없고, 유일한 가족인 경우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없는 데다 특히 민감한 문제라는 이유로 안락사의 문제에 대해 뒤로 미루기만 하고 아무런 법안이 없는 경우 변호인의 말처럼 이 문제는 조만간 대대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

기욱: 가족이라 생각했으니까 자신들도 그 개만큼 아프고 괴로운 기라. 가족이라면 우째 그걸 따로 생각할 수 있겠노? 가족 모두가 함께 아프다 이 말이다.
307페이지 中

-----


안락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주와 같은 이들은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안락사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가족이기에, 유일무이한 사랑하는 가족이기에 함께 아파하다가 결국 모두를 위한 마지막 결정을 내린 것이다.

 

현주는 판결 이후 민철의 면회를 거부하다 끝내 한 줌의 재로 돌아오는데, 민철은 이에 현주의 엄마와 현주를 같은 나무 아래 묻어주는 수목장을 치러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쩌면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를 칠 년간 지켜보며 자신도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안락사. 사실 그즈음 이미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던 형들은 이미 이것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철은 미루고 또 미루며 버티고 있던 상황에서 가장 힘이 되어주었던 연인인 현주를 통해 맞닥트리게 된 것이다.

 

 

안락사를 한 개인의 문제로 본다면, 이 같은 형국의 문제는 분명 그저 존속살해로 결말 지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그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로 보는 것이 맞다.

 

그렇기에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환자의 가족들까지 고려해 사회적 합의를 거쳐 여러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초고령 사회로 급격히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이 문제를 회피하기보다 깊게 다가서서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의 고통을 마주 보는 것이 필요할듯하다.

 

삶과 죽음, 그리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욕망과 과한 욕심 사이에서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던 이야기들이었다.

 

어찌 보면 젊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구, 잘 살고 싶은 욕구, 편하고 싶은 욕구, 괴로움에서 탈피하고 싶은 욕구 등 이 시나리오에서 거론되는 것들은 인간 본연의 기본적인 욕구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욕구들이 심하게 넘쳐흐르거나 현실적인 문제들에 가로막혀 탈출구가 없어지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잘못된 판단과 사고에 빠질 수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회, 법, 공동체라는 울타리가 필요하며, 이것들이 제대로 작동되어야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저 남의 이야기라며 등 돌리고 있을 게 아니라, 나와 우리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조금 더 주변을 관심 있게 살펴봐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