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서덕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2월
평점 :
품절
사랑의 모든 계절에 써 내려간 시인의 뜨거운 마음이 담긴 시선집 한편을 만났다. 그가 머무르는 공간,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의 모든 것들은 시구가 되어 글로, 문장으로 엮였다.
오롯이 자신의 내면에 담긴 마음을 모두 쏟아내기라도 한 듯 이 책에서 발견되는 일상의 모든 사물과 풍경은 모두 필터를 씌운 듯 특별하게만 보였다.
무엇이 이토록 그것들을 특별하게 만든 것일까? 어쩌면 시인의 마음속에는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촉촉이 젖어드는 감성 엔진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그만큼 사랑하고, 아프고, 그리워하는 경험을 지독하게 누렸기 때문은 아닐까?
이 책에서는 141편의 시와 짧은 수필, 그리고 82컷의 사진을 감상할 수 있는데, 볼거리가 풍성해 보는 재미가 있다.
특히 중간중간 포착되는 감성 사진들은 시와 잘 어우러져 더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데, 그래서 읽다 보면 쉼 없이 돌아가는 눈동자를 잠시 쉬게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의 대상이 되는 주체는 상상 그 이상의 일상의 모든 것들을 담아낸다. 사물뿐만 아니라 날씨, 꽃, 밤하늘의 별, 여름밤, 이끼, 바늘 등 시인의 시선이 머무르는 모든 것들이 소재가 되고 시가 된다.
그래서인지 무심코 지나쳤던 내 곁에 머물던 것들을 새롭게 보게 된다. 출퇴근 길의 칼바람, 펑펑 내리던 함박눈, 꾹꾹 눌러 담겨 있는 쓰레기통,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 찻길을 가득 메운 빽빽거리는 자동차와 같은 것들이 시인의 손을 거치면 어떻게 그려질까 새삼 궁금해진다.
낡고 헤진 것들에 새롭게 옷을 덧칠하듯 그려진 대상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갈급할 수도 있구나 새삼 깨닫는다.
아래는 141편 중 인상 깊었거나 새롭게 다가왔던 것들을 위주로 꼽아 소개해 보려 한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사물을 통해 보는 새로운 관점과 추억거리, 일련의 감정들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
잠수부
너는 너무도 맑아 도무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네 머릿결 같은 수초와 살결에 숨 쉬는 산호초
그리고 무지개처럼 산란하는 물보라의 빛깔들이
마치 나를 초대하듯 내게 수문을 열듯 너울대지.
좋아, 네게 기꺼이 빠져보도록 하지.
달갑게 잠수해 볼게
깊이조차 알 수 없는 너에게
나 영영토록 가라앉아보도록 하지.
121페이지
=====
사랑에 빠진 대상자를 향한 표현력이나 그 대상에게 깊이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이 '잠수부'로 표현된 시로, 깊고 깨끗한 바다를 탐험하는 잠수부가 떠오르는 동시에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을 안고, 사랑하는 이를 향해 깊이 빠져들고 싶어 하는 모습이 생각나는 시였다.
특히 도무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너에게 영영토록 가라앉아보도록 하겠다는 시구는 보통 부정적 느낌으로 다가오기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오히려 더 깊이 사랑하겠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깊은 사랑에 빠진 이의 마음이 저절로 그려지는 시였다.
=====
낡은 고백
당신 사진 옆에 슬픔 한 줌 내려놓고
좋아한다는 고백 하나
꺼내보았습니다.
서랍에 담겨 있던 이 고백은
시간에 덮여 먼지가 앉았는데
하나 조금도 바래지 않은 사진 속 당신 모습에
나의 가슴은 하염없이 삐걱거렸습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 밤
당신 얼굴에 조용히 입을 맞추고
나의 추억이 세월 속에 빼앗기기를
다만 당신의 서랍에도 내가 담겨 있기를
소매에 눈물 하나 놓고
기도했습니다.
161~162페이지
=====
사별 혹은 이별로 인해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이를 그리는 마음이 절절히 다가오는 시로, 이제는 함께 할 수 없지만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둔 그리움을 모처럼 꺼내들며 뒤늦은 고백과 추억을 되새기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쩐지 손때가 묻은 낡은 서랍장과 조금도 바래지 않은 사진이 절묘하게 대비되며 더 울컥하게 만드는 시다.
=====
장마
빗소리가 마치 타박타박
내게로 뜀박질하는 넌 줄만 알고
나는 몇 번이고 뒤돌아보기 일쑤였다.
내게 사랑은 이런 것이었고
너는 내게 있어 이다지도 미련스럽고
지독했던 한철 장마였다.
170페이지
=====
한철 장마처럼 훅 지나간 미련한 사랑인데, 매년 장마가 돌아올 때면 어쩐지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사랑을 그린 시로,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
바늘
나의 인연은 너로 꿰매어진다
꿰어지는 실은 통증이며 바늘은 곧 당신이다.
그때는 왜 알지 못했는가
실이 꿰매어진 뒤엔
항상 바늘이 떠난다는 것을.
171페이지
=====
실과 바늘이라고 하면 꼭 붙어 있어야만 할 것 같은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 시를 읽으며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구멍이 난 곳과 뜯어진 곳을 꿰매기 위해 둘이 만나지만 이내 바늘은 꿰매어진 뒤에는 떠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시각을 통해 만남과 이별의 아픔을 볼 수 있었던 시였다.
=====
이끼
마음가에 한참 너를 두었다.
네가 고여 있다 보니
그리움이라는 이끼가 나를 온통 뒤덮는다.
나는 오롯이 네 것이 되어버렸다.
184페이지
=====
이끼의 습성과 더불어 그리움에 잠식 당한 마음을 잘 표현한 시로, 그저 읽는 것만으로 이미지가 절로 떠오르는 시구다.
이끼로 뒤덮인 나는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오롯이 네 것이 되어버린 나는 잠식 당한 채 그대로 머물렀을까? 아니면 더 넓게 퍼져나가다 새로운 누군가를 찾았을까?
=====
환절기
네게는 찰나였을 뿐인데
나는 여생을 연신 콜록대며
너를 앓는 일이 잦았다.
193페이지
=====
누군가를 향한 갈망과 사랑, 앓이가 엿보이는 시로, 상대에게는 찰나의 만남이, 나에게는 깊이 박혀 오래도록 빛바랜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는 모습이 생각나는 시다.
어떻게 보면 기발하기도 하고, 또 독특하게 다가오기도 하며, 생각의 전환을 불러오는 저자의 시와 수필을 통해 나의 감정을 내 시선이 머무르는 것에 투영하여 담아보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내 감정과 느낌, 생각들을 조근조근 담아보면서 내가 사랑하고, 추억하고, 갈망했던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상기함으로써 못내 거두지 못한 내 감정들을 끌어안아 주고, 다독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냥 어렵게만 느껴지는 시를 이처럼 나만의 감성을 담아 부담 없이 써보면 어떨까? 어떤 이는 사물에서, 또 길거리에서, 누군가의 사진에서, 말에서, 일상에서 소재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어떨 땐 나열하는 문장보다, 짧게 담아낸 시가 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뜨겁게 마음이 차오르는 날 펜을 들고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