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남은 시간 -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는 시대, 인류세를 사는 사람들
최평순 지음 / 해나무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꽤 오래전부터 언급되었던 지구 위기! 시간에 무뎌진 건지 아니면 논외의 일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와 주변의 반응은 무덤덤 혹은 무관심 둘 중 하나였다. 

 

해외의 반응은 직접적으로 확인이 불가해 국내 분위기만을 살펴보자면, 대체적으로 뉴스와 언론을 통한 보도는 거의 만나볼 수 없었으며, 가끔 전해지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지구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가늠해 볼 뿐이었다.

 

예전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다가오는 자연재해가 눈앞에 닥쳤음에도 순간의 위기를 넘기고 나면,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가는 일이 일상이 되어가면서 사람들은 대체 무얼 보고 듣고 있는 걸까 새삼 궁금해지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당황스러움과 궁금증, 그리고 또 다른 질문과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소망, 나의 아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작 태도나 행동에 있어서는 당장 눈앞에 떨어진 이익과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는 이들이 부디 이 책을 빌어 더 크고 넓게 보고, 사고하고, 행동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지구 온도의 상승을 막기 위한 세계적인 탄소 배출 감소 대책과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하던 이야기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서 그때의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제대로 지켜지기는커녕 오히려 상승한 곳도 부지기수다.

 

지구 온도가 1도 올라갔을 때 나타나는 여러 생태계 변화와 영향력에 대해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취급하며 나 몰라라 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저자는 '인간과 지구에게 희망은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뜨거워지는 지구 속에서 쉴 틈 없이 불어닥치는 홍수와 태풍, 가뭄, 산불 등의 자연재해는 물론 심상치 않게 일어나는 감염병과 원인 모를 일들을 이제는 덮어두거나 모른척하기보다 제대로 마주하고 시간을 더 늦출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는 인류세 현장을 찾아 전 지구를 누빈 환경 피디가 우리 사회의 현주소와 한국 언론이 위기 뉴스를 소홀히 하는 이유를 살펴보고, 지구 환경과 관련 있는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접 전한다. 또 기후 위기의 시대를 헤쳐 나갈 방법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전하면서 우리에게도 그 물음을 던진다.

 

지구 위기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피하기만 한다고 답이 나오지도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답을 알고 있기에 더 회피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불편을 감수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주하고 실천해야 다음 세대가 살아갈 터전이 남는다. 아니 다음 세대를 걱정하기에 앞서 우리 세대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 현 상황을 제대로 알리고 공유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적 재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관심을 가져야 더 많은 방법과 실천들이 행해질 수 있다.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는 질문을 수없이 하게 만든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이들도 경각심과 위기의식에 대한 관심, 그리고 작은 실천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날 방송을 보다가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쓰레기 산을 이룬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둥둥 떠다니는 각종 플라스틱이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쌓여 하나의 섬처럼 보인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그냥 두고 보고만 있다는 것이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이게 현실이구나 싶었다.

 

'바다니깐 괜찮을 거야'라는 안일함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저것이 어디까지 연결될까 하는 두려움이 곧 남의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철저히 하는 분리수거는 왜 끝까지 이어지지 못할까라는 생각으로까지 연결됐는데, 아마 그것은 재활용과 재사용에 대한 간절함과 관심이 없어서이지 않을까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해내는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 플라스틱의 재활용 방법이나 대체방안이 아예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당장 편하고 크게 바꿀 마음이 없기에 난무하는 국가 정책 속에 분리수거라는 이름으로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가 어떤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공존을 위해 힘써야 하는지 지금부터 하나하나 살펴보자. 그리고 무엇보다 '나'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잊지 말자!

 

 


=====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

 

신흥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고, K-컬처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지구의 위기에 대해서 만큼은 '돈 룩 업!(위를 보지 마)을 외치고 있다. 정말 왜 그런지 너무 궁금했다.



※참고사항
2021년 제작된 영화<돈 룩 업>은 에베레스트만 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달려와 멸망이 목전이어도 대부분의 사람이 그 사실을 걱정조차 하지 않는 세상을 풍자한 영화

 

 


인간에 의해 행성 전체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왜 국내에서 주류 담론이 될 수 없는 걸까?

 

이 책은 그 의문과 답답함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묻고, 여러 저자들의 책과 논문 등을 탐독하며 답을 찾고자 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기후 위기'를 넘어 중첩된 문제를 안고 있기에 저자는 더 범위를 확대해 '지구의 위기'라는 이름 아래 세계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를 다방면에서 다뤘다.

 

국내에서는 지구적 문제가 국내 여러 이슈에 묻혀 외면받고 있는 상황으로, 이 책이 지구 위기로 관심을 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본다.

 

 


=====
'인류세' 그게 뭔데? 
=====

 

"넌 왜 그런데 관심 있냐?"라는 주변 친구들의 말을 종종 듣던 저자의 사회생활은 왜 많은 이들의 관심사와 나의 그것이 다른지를 설명하는 일의 반복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류세'라는 단어와 함께 상황이 바뀌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저자에게 찾아온 이 단어에는 게임의 법칙을 바꾸는 힘이 있었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찰리가 초콜릿 속에 숨겨진 황금티켓을 복권처럼 발견하고 인생이 바뀌는 유명한 장면이 나오는데, 저자에겐 인류세가 그런 황금티켓이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PD로서 그 단어를 처음 접하는 순간, '인류'라는 이름을 붙인 지질시대 용어가 지구상에서 인간에 의해 벌어지는 대다수 문제의 심각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또한 '인류세'라는 개념이 주는 새로움이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적 피로감을 상쇄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관심 없어 하던 사람들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바꿔줄 기회로까지 느껴졌다고 한다. '왜 우리나라만 유독 인류세에 무관심하지?'라는 생각이 일순간 들었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아이템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듣거나 발음하면서 명확하게 인지되는 단어 하나의 파급력을 저자는 '인류세'에서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구환경과 맞서 싸우게 된 시대를 뜻하는 '인류세'를 살고 있는 현시대 사람들은 이 단어의 탄생을 결코 자랑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지구적 문제는 대체 왜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걸까?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말처럼 인류세에서 지구적 문제는 우리 모두가 죽느냐 사느냐와 다름없는 아주 중요한 우선순위의 문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답답할 만큼 꽤 동떨어진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그 몇 가지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개별 과학 지식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과학 지식을 가지고 일을 하는 국가와 사회제도에 대한 신뢰의 차이 때문이다.

 

즉,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배운 과학지식을 받아들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지식을 가지고 정책을 펼치는 기관, 정부에 대한 신뢰가 결합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후 위기와 관련한 에너지 정책이든 몸에 맞는 백신이든 모두 자신의 건강과 경제적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러면 그것을 수행하는 제도와 정부에 대해 믿음과 의심으로 갈리게 되고, 그와 결부된 과학 지식을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갈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코로나 19는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과학을 불신하는지, 정확히는 얼마만큼 과학 지식에 기반한 정책과 사회제도를 불신하는지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둘째, 위기가 위기로 안 느껴지게 범주화되기 쉬운 사회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생존이 달린 위기가 아니라 다른 여러 문제 중 하나로 인지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되짚어보는 데 있어 출발점부터 잘못 설정된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인데, '확증편향'이란 것이 등장한다. 쉽게 말하면 수많은 뉴스 중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크게 들리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대중은 자신의 가치와 맞는 뉴스만 소비하고, 좋아하는 것만 찾다 보니, 알고리즘까지 가세해 좋아하는 것만 들리게 만들어 버린다.

 

-----
"내 신념에 맞는 메시지가 더 좋은 거야. '내가 옳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타인도 생각할 것이다'라는 사고방식이지. 이건 사실 영유아한테 보이는 '자기중심성'이라는 인지적 특성인데, 이게 성인들에게도 여실히 드러나는 거지. 내가 옳으니까."

34페이지 中
-----

 

문제는 유치한 사고방식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란 점이다. 기후 위기가 진짜여도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팩트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사회적 논의가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면, 지구 시스템이 붕괴하고 인류와 다른 비인간 생명체 모두 파국을 맞이할 수 있다.

 

----
위기를 위기라 인지하지 않고 북극이나 남극의 일, 혹은 죽을 때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먼 미래의 일로 여기는 사람이 다수다. 예상은 했지만, 사고의 작동원리를 알고 나니 허탈하다. 심리학자와 대화를 나누며 마신 커피는 참 쓸쓸했다.

35페이지 中
----

 

 


▶셋째, 인류세적 재난이 체감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재난의 예고에서 발생까지 진행되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인류세 현장은 누적된 산업화의 결과일 뿐 아니라. 재난의 전조를 방기한 사회의 공동 책임이기도 하다. 행성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인류세 현장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투발루와 히말라야의 위기는 곧 우리와 연결된다. 그렇기에 만성화된 위기감이 선사하는 '그게 뭐?'의 무감각함을 더 경계해야 한다. 무감각하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 긴급하다.

 

-----
우리가 지구적 위기를 외면할 수 있는 것은 외면해도 아직은 살 만하기 때문이다. 역대급 폭염이 오면 에어컨을 켜서 온도를 낮추면 되고, 최장의 장마가 오면 제습기로 습도를 낮추면 된다. 살 만한 이들의 손쉬운 해결책은 양의 되먹임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역대급 폭염과 장마로 이어진다.

73페이지 中
-----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며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구나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한다. 어떤 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없는 너무 적나라한 이유 덕에 더 현실을 뼈아프게 직면하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과학지식을 가지고 일하는 정부를 믿지 못하는 성향이 강하고, SNS의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점점 더 확증편향이 강해지고 있는 것은 물론, 만성화된 위기감과 나름대로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사이에서 외면받고 있는 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한 고통을 되돌려 받게 되기라는 것은 지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 언론은 지구적 문제를 왜 충분히 다루지 않을까?
=====

 

이에 대한 답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는데, 기획 기사나 탐사 기사가 많아지면 출입처 시스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기획이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온라인의 페이지뷰 성과도 무시할 수 없는데, 언론사의 수익이 클릭 수에 따른 트래픽에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기후 위기를 공부하고 전문가를 발굴해 인터뷰하는 것보다는 정치인, 연예인, 운동선수 등 유명인의 발언이나 SNS 포스팅을 기사화하는 것이 손쉽고 결과물이 보장된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구적 문제는 등한시되는 것이다.

 

언론사 수익의 다변화와 방식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결국 어떤 방식을 쓰더라도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추세를 살펴보고, 해외 언론은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고 이끌어 나가는지, 또 지구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도 배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지구 위기에 대한 '국내'와 '해외' 인식 차이의 원인
=====

 

1. 언론의 역할
독일의 언론을 예시로 살펴보면 언론의 역할에서 그 차이를 발견해 볼 수 있다.

 

"언론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생각해요. 독일 사람들은 공영방송 ARD의 저녁 8시 뉴스를 즐겨 보는데, 전체 분량의 15분입니다. 거기에 거의 매일 기후 관련 뉴스 꼭지가 하나씩은 나와요."

 

2019년의 호주 대화재 때 독일 저녁 8시 뉴스는 첫 꼭지나 두 번째 꼭지 헤드라인으로 호주 소식을 다뤘다.

 

해외 뉴스는 뒤에 배치되는 한국의 저녁 프라임 타임 뉴스를 생각하면 비교가 된다. 독일 방송사는 해외 뉴스임에도 기후 관련 소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앞부분에 배치한 것이다. 그 순서와 비중으로 독일 시청자들은 사건의 무게감을 느끼게 하고 뉴스의 가치를 반영한다.

 

이렇듯 두 나라 간 지구적 문제에 대한 인식 차이의 원인 하나는 '언론'의 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2. 확실한 방향 설정과 협의된 사회적 합의의 유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부족 현상이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의 경우 같은 상황을 두고 가스 수입의 어려움으로 인한 난방 에너지 부족 및 전력 가격 인상을 가장 큰 논조로 꼽았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오히려 재생에너지로 더 빨리 전환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외부에 에너지를 의존해선 안 된다는 에너지 자립 개념이 강해진 것이다.

 

주변국 전쟁이 에너지 전환에 큰 혼란을 야기하기보다 오히려 독일은 방향이 확실하다 보니 혼란이 비교적 적은 것이며, 분열과 정책 번복보다는 고통을 함께 감내하면서 정해진 길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쓰레기 같은 기사를 배포하는 기자를 '기레기'라고도 표현하는데, 독일 언론과 비교해 보니 언론인의 진정한 자세에 대해 곱씹게 된다. 경쟁사와의 차별점을 제대로 된 기사를 내는 것으로 구분할 수는 없는 걸까 새삼 의문이 든다.

 

보통 메인뉴스에서 초반에 언급되는 것들은 그날의 헤드라인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그런 만큼 그 영향력 또한 상당한데,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잘 이용해 세계적인 이슈를 잘 전달하고 있는 독일의 언론은 그 역할을 매우 잘하고 있다고 보인다.

 

두 번째 차이점을 살펴보면서 최근 다시 불거지고 있는 요소수에 대한 이슈가 떠올랐다. 중국에 90%를 의존하고 있는 요소수 부족의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우리나라는 우왕좌왕 난리가 났었다. 그때 정부는 중국의 수입의존도를 낮추고 다른 방안을 찾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다시 불거진 현시점에서 대안은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세계적 정세가 불안한 요즘 국가는 중요한 에너지 자원에 대한 대책 마련을 하고 이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이행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신재생 에너지와 대체 에너지에 대한 방향과 방법들이 강구되어야 할 때,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 위기에 대한 문제 또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라고 해서 손놓고 있기 보다 서서히 준비해서 국민적 합의와 대책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은 요소수 하나로 넘어가겠지만, 앞으로는 더 큰 문제들이 연이어 발생할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남 탓만 하다가 시간만 허비하게 될 것이다.

 

 


=====
30년이라는 시간으로 살펴본 우리 사회의 객관적 지표!
=====

 

1991년부터 2019년까지 보도된 기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기후 위기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 살펴보면 더 확연히 드러난다.

 

▶1991년 기후 변화 관련 기사가 11건에 불과
▶2009년 기후 관련 기사가 2611건 보도됨
  (코펜하겐에서 COP15가 열리던 해)
▶2015년 2399건으로 올라갔다가 떨어짐
  (파리에서 COP15가 열리던 해)
▶2019년에는 2000건

 

이처럼 기후 관련 소식은 '국제회의'라는 이벤트나 사상 초유의 재난이 발생하는 정도는 되어야 뉴스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았다.

 

30년 동안 언론계에 종사한 기자는 "뉴스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니까 기사가 안 될 때가 많았어요. 데스크를 이해시켜야 지면에 실리는데 이해시키지 못한 적이 있죠."라고 말한다.

 

지금도 기후 위기 관련 뉴스는 열심히 써도 클릭 수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독자들의 수요가 받쳐주지 않으니 예나 지금이나 기자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

 

이를 통해 지구 위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
기후 위기 vs 미세먼지 대응의 차이를 불러온 이유는 무엇일까?
=====

 

한 가지 놀라운 점을 살펴보자면, 기후 위기 대응은 더디기만 한데, 미세먼지 대응은 생각보다 꽤 빠르고 국민들의 인식도 달랐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이유를 살펴보면 미세먼지는 일단 뿌옇게 눈이 보이고 그 피해가 우리에게 호흡기 질환처럼 직접적으로 오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반면 기후 위기는 우리에게 오기도 하지만 피해가 지구 전체로 흩어지는 거고 눈에 안 보이니 달랐던 것이다.

 

더불어 미세먼지는 저감이 상대적으로 쉬운데, 자동차 배기가스를 규제하고 공장 굴뚝을 관리하면 미세먼지를 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기후 위기는 차원이 다른 문제로 산업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각이 바뀌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난제 중의 난제다.

 

그런데도 우리의 관심사는 부동산과 정치권 뉴스에 쏠려있다. 관심사가 멀어지기 때문에 언론사가 판단하는 뉴스 가치가 떨어져 기사량이 부족한 상황이 되면서 양의 되먹임 구조가 되는것이다. 누군가 각성해야 끊을 수 있는 악순환의 고리라 할 수 있겠다.

 

 


>>확실하게 눈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통해 미세먼지처럼 기후 위기를 인지시키고 관심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방법을 찾는 노력도 필요할 것 같다. 뒤에 해결 방안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방법이 있는데, 두 가지 만남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 듯하다.

 

 


=====
표현 단어와 언어의 변화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변화
=====

 

프랑스 언론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프랑스 언론은 '기후 변화' 대신 '기후 고장' 혹은 '기후 비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대표적인 신문사 르몽드는 지구 위기를 다루는 전담팀을 환경팀이라고 부르지 않고 '플래닛 팀'이라고 명명한다.

 

이런 식으로 꾸준히 지구의 위기를 고민하며 언론사로서 바꿀 수 있는 것을 하나씩 바꾸는 시도한 과정들이 엿보인다.

 

진민정 박사는 프랑스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단순히 대중에게 보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이해를 높여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큰 목표를 느낀다고 말한다.

 

지구 반대편 프랑스 미디어에 불고 있는 변화는 우리에게도 작은 희망을 품게 한다.

 

지구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지금의 사회를 보여주는 단어나 심리를 드러내는 적확한 용어를 떠올려보자.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마음을 표현할 상상력이 더 많이 필요한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한계와 그 언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이들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인류세를 더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이 위기의 긴급성을 드러낼 단어가 우리의 입에서 계속 오르내린다면 언젠가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게 된다.

 

 


=====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태계에 대한 인식
=====

 

저자는 전국 곳곳의 사람들을 만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야생에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고 전한다. 좁은 국토에 5000만 명 넘는 사람이 살 땅도 부족한데 무슨 야생동물이냐는 생각이 만연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다양성을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절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순간이다.

 

지구의 주류 기관인 유엔은 지난 2011년부터 2020년까지를 '생명 다양성의 10년'이라고 정했다.

 

 

=====
우리나라에서는 '생명다양성의 10년'이 지정된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지나가 버렸다. 물론 개인이 그런 소식을 모르는 것은 언론의 무관심과 구조적 요인 탓도 있겠지만, 태도는 개인적 차원이 문제다. 모르면 인지하고 빨리 쫓아가려 하는 게 바람직할 텐데, 여전히 사람들은 뒷짐을 지고 '내게 조금 더 와닿도록 나를 설득해 봐'라는 자세를 취한다.

186페이지 中
=====

 

우리는 기후 위기 외에도 수많은 지구 위기를 겪고 있다.

 

▶야생 조류 유리창 충돌 문제
▶대멸종이 진행 중인 시대(꿀벌과 야생의 수분 매개자들의 개체 수 급감)
▶비인간 유인원 개체 수의 급감과 그들을 위한 땅의 멸종 상황

 

도래한 큰 문제들은 많은데, 우리의 인식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만 가득하다. 뒷짐지고 있기 보다 따라가려는 노력에 더 귀를 기울여 보자. (제발!)

 

 


=====
우리가 지구의 위기를 외면하는 이유
=====

 

1. 생존 의식 때문
한국의 20세기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생존'이다.

 

-----
식민 지배, 한국 전쟁, 분단을 겪으며 고생했는데, 또 당할 수는 없다는 생존 의식이 20세기를 지배한 것이다. 지금 당장 한국 사회의 생태 감수성이 낮고 인류세 담론이 더 확산하지 못하는 것에도 그런 배경이 있다.

 

어떤 억울함이라고 해야 할까. 지겹게 당해서 이제 좀 발전하려고 하는데 선진국, 강대국들이 지구를 망쳐놓고는 갑자기 고치겠다며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에 분개심으로 볼 수도 있다. 인구수가 많은 중국이나 인도보다는 지구에 끼치는 영향이 적다는 셈도 있을 것이다.

210~211페이지 中
-----

 

 

2. 시간 감각의 무딤 때문
우리가 지구의 위기를 외면하는 이유는 시간 감각이 무뎌서다. 46억 년이라는 지구의 시간을 고작 1950년대 이후 70여 년 동안 본격적으로 망쳐놓았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인간은 길어야 백 년밖에 못 사는데, 2050년의 지구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그때 자신은 몇 살이고 악화된 환경에서 남은 생은 얼마일지 계산기를 두드려봐야 시간 개념이 어렴풋하게 잡힌다.

 

 


>>과거는 과거로 두고, 현재를 바라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46억 지구의 시간을 인간은 고작 70여 년 동안 망쳐놓았다. 그리고 그 시기는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정신 차려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
다른 관점으로 살펴보는 지구 위기의 원인!
=====

 

1. 젠더 문제
산업화와 과학기술 발전이 남성의 주도로 이뤄졌기 때문에 그 반대편에서 해결책을 모색해 보자는 것으로, 인류세는 서구 백인 남성의 반성문이기에 '지금 우리가 위기다'라고 하는 이 담론조차도 선도해가는 배긴 남성들에 의한 것이기에 우리한테 와닿지 않는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돌봄의 전략을 제안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주로 백인 남성들을 사용자로 가정하고 만들었던 기술들을 다양한 인종, 여성, 장애인, 지역 주민, 동식물을 포함한 비인간 존재들의 요구에 맞춰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을 말한다.

 

과학기술 밖으로 몰아냈던 것들을 복권시키고 지금껏 배제되었던 것에서 혁신과 창의성이 나올 것이라며, 숲을 돌보고, 가축을 돌보고, 야생동물을 돌보면서 시대와 공명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2. 이분법적 사고
인간/자연, 남성/여성, 인류/동물 식의 이분법적, 분리적 사고가 지구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주장이다. 인류세 시대를 넘으려면 분리적 사고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감수성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

 

▶홍성욱 교수가 정의하는 감수성
외부 세상을 받아들여서 인지하고 느끼는데 그치지 않고 몸으로 행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다양하고 복잡하게 엉켜있는 세상을 포용하고 공감하며 애정 하는 적극적인 심성을 말한다.

 

지구의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근대성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그게 감수성을 정의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다.

 

인류세 시대의 감수성은 분리적 사고가 아니라 통합적인 실천까지 포함하는 감수성이다. 무해의 태도가 다른 존재에게 가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인 실천을 동반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단순하고, 작고, 덜 쓰는 세상을 상상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감수성을 철학에서는 '포스트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데 포스트 휴머니즘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은 자기중심적인데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변방에 갖다 놓는 것 그러면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많이 보인다.

 

▶두 번째는 내가 있던 위치에 다른 존재들을 갖다 놓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남성이면 여성을, 동양인이면 아프리카의 흑인을, 그 위치에 놓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많이 보인다.

 

▶세 번째는 그것들을 연결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보통은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친구와 애인을 사귄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살고 있고 그 관계의 합이 나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있어서 관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관계의 총체가 나다. 그 관계의 총체가 인간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포스트 휴머니즘 감수성이다.

 

 


=====
분열된 한국 사회를 기회로 만들 해결책
=====

 

현재 한국 사회가 분열되어 있는 것은 팩트에 가까울 정도로 명징하다. 정치적으로도, 세대로도, 젠더적으로도 분열이 심하다. 이러한 한국 사회에 지구의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홍성욱 교수는 두 가지 만남에 주목한다고 한다.

 

▶첫 번째. 과학과 종교의 만남
지구의 위기 앞에서는 과학과 종교가 힘을 합쳐야 상당한 동력이 생긴다. 

 

▶두 번째. 과학과 예술의 만남
인류세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고 피부로 잘 느껴지지도 않다 보니 과학적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어렵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할 수 있고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것을 느껴지게 할 수 있다.

 

실천적 연대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벽을 깨고 인접 분야와 같이 협력하고 다른 사람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실천을 넓혀가는 것이다. 그 무해한 삶의 태도와 실천적 연대가 함께 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무사히 착륙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스템을 의심하고 변화와 대책을 요구하며 연결되어야 한다. 텀블러와 종이 빨대를 쓰는 착한 소비자 운동에서 그치지 않으려면 주변 사람 및 그 너머에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자기의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을지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 현재 나의 생각의 지점은 어디쯤에 있는지, 또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고민하면서 지구와 우리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들을 하나씩 실천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