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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이런 게 아니겠니!
곽미혜 외 지음 / 모모북스 / 2023년 11월
평점 :
과거에는 새것, 새 상품에 더 시선이 많이 갔는데, 요즘에는 손때 묻은 물건이나 애정이 깃든 것들에 유독 더 시선이 많이 간다. 요즘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과거한정 '리미티드 에디션'과 같은 느낌인데, 다시는 만나볼 수 없기에 더 귀하고 값지게 느껴지는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옛 추억담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어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요즘의 세대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이야기들도 가득 담겨 있어 이색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떼시절'이라고 하면 꼰대라던가 부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떠올리는데, 여기 담긴 '라떼시절'의 이야기들은 정이 넘치고, 하나같이 감성 돋는 이야기들이 많아 한 번쯤 그 시절에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서술한 11인의 공동 저자들은 인천광역시 교육청 소속 사무관 이상 관리직 공무원들로 구성된 글쓰기 동아리 '글힘' 회원들의 글로, 대부분 20년 이상의 공무원 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기본 연령대가 높고,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을 버티고 살아낸 분들의 진솔한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전문 작가가 쓴 글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마음이 가는 따뜻한 글들이 많았는데, 일상을 살아가면서 소소하게 느끼는 행복과 치열하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있어 더 마음 깊이 다가왔다.
사실 처음 쓰기를 배우고 책을 써보자는 제안에 고민하고 망설이기도 했지만, 어느새 작가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채우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들을 솔직하게 담아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경험과 당시의 이야기들은 생생하게 담기기 시작했다.
작가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한 33편의 이야기 속에서 정감 넘치는 따뜻함을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1명의 작가가 담은 33편의 이야기들 중에서 유독 눈에 들어왔던 이야기는 지금은 볼 수 없는 추억 돋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를테면 똥 봉투 이야기, 조청에 담긴 추억 이야기, 통금시간 이야기, 이웃 덕에 사랑으로 자랄 수 있었던 딸 이야기 등이었다.
그중에서 유독 더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 몇 가지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살아온, 살아낸, 그들만의 진솔함이 묻어나는 글을 통해 시린 겨울, 따뜻한 온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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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맛볼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의 맛, 조청의 추억!
권영남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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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준비할 때마다 늘 집에서 빠지지 않던 조청 만들기는 끓이는 과정이 가장 중요했는데, 불이 꺼지지 않게 보고 있으라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사그라들던 아궁이 숯불 위에 장작을 밀어 넣으면서 결국 활활 타는 장작과 함께 조정도 타버리고만 추억 돋는 이야기는 지금의 세대에게는 절대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 중 하나다.
이후 함께 일을 저지른 사촌 여동생과 불호령이 무서워 부엌에서 제일 먼 윗방의 이불장 안으로 숨어들었다가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다가 잠들어버린 이야기에서 옛 정취와 진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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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하는 모든 물건을 파는 대형마트나 백화점.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곳에서 척척 살 수 있는 조청, 그러나 그 시절 추억은 없다. 편리함과 즉각 소유로 길이 들여진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그 시절, 즐거움과 기대감으로 가득 찬 명절 준비와 조청 만들기에 대한 추억은 그래서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건 아닐까.
4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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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쉽게 구하고 얻어지는 현재 우리의 모습에서 추억을 상기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저자에게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은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 싶다.
다르게 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있어 추억은 무엇일까? 새삼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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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면 행운을 가져다주는 호야 꽃
김승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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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라는 식물은 아내가 근무하던 학교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선물 받으면서 몇 번이고 집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베란다에서 키우다가 떨어뜨리면서 버려질뻔 하기도 하고, 이사하면서 버려질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버려질 처지에서 몇번이고 버티게 되면서 이제 호야는 저자에게 있어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그 사연을 들여다보면, 호야가 꽃을 피우면서 시작된다. 그 처음은 이사 후 처음 호야가 꽃을 피우면서 아내가 셋째를 임신하게 된 일이다. 몇 해 후 또 호야 꽃이 피면서 앞서 낙방했던 승진 시험이 합격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면서 점차 저자는 호야 꽃이 '행운의 상징'이라고 믿게 된다.
호야 꽃은 매년 피지는 않았는데, 지금 현재 저자는 다시금 호야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내가 항암치료를 하고 있는데, 호야 꽃이 피어야 아내에게 예전의 건강을 되찾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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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야는 2년에서 3년간 자란 후, 꽃이 핀단 사실을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 꽃을 보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보상이나 보답이 즉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보상이 일찍 오지는 않는 것 같다. 무슨 일에든 항상 임계점이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호야 꽃이 피는 걸 보기 위해 2~3년 이상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61~6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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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닐 수도 있는 식물 하나가 어느새 저자에게는 '행운'으로 자리 잡았다. 누군가는 미신이라거나 어이없는 헛소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현재 저자에게 있어 호야 꽃은 간절한 소망이자 바램을 담은 꽃이다.
어쩌면 희망이 다시금 피어오르길 바라는 염원을 호야 꽃에 비추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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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가져다준 선물
유인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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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식주 생활이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하고 싶은 것이나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당시 저자는 '세계 명작동화 전집'과 '바비인형'에 대한 남다른 추억을 가지고 있는데, 유달리 갖고 싶었던 물건이자 소유하지 못했던 결핍의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동네 친구 집에 놀라갔다가 발견한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세계 명작동화 전집을 보고 너무 갖고 싶었던 저자는 밥도 거른 채 울고불고 엄마에게 떼를 썼지만 끝내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며칠을 고민하다 친구 집에 매일 놀러 가서 그 책들을 읽는 것으로 대리만족했다고 한다. 나중에 보니 책 주인인 친구보다 빌려서 본 저자가 더 많이 읽었다고 하니 얼마나 열성적으로 책을 읽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덕분에 그 시절의 결핍이 계기가 되어 지금도 꾸준히 책을 읽고 기록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일단 사두는 버릇도 생겼다고 한다.
또 다른 결핍이었던 바비인형은 어려서부터 유난히 좋아했던 인형 중 하나로 명절에 받은 세뱃돈을 몽땅 털어 인형을 사는 바람에 엄마께 심한 꾸중을 듣기도 했다. 인형을 갖고 나니 한 벌뿐인 옷이 신경 쓰여 옷이 갖고 싶은데 돈은 없고, 인형 옷까지 산다고 하면 엄마에게 혼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손뜨개로 인형 옷을 만드는 거였다. 어릴 적부터 손수 떠주신 뜨개 옷을 입혀주시던 엄마의 뜨개질 솜씨를 어깨너머로 배워 직접 인형에게 옷을 떠서 입히며 가지고 놀았다.
그 후로 뜨개질은 저자의 취미가 되어 도안을 보고 가방, 목도리, 모자 등을 떠서 선물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 느꼈던 결핍감을 해소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독서나 뜨개질 덕에 평생 즐길 수 있는 취미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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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평생 갖고 가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이 결핍을 느끼고, 결핍된 것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 나가는 과정 중에 해소되기도 하고, 부수적으로 평생 즐길 수 있는 취미나 좋은 습관이 생겨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결핍'을 그저 부정적인 단어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에 따라 그것이 선물이 될 수도, 평생 전전긍긍하는 말 그대로 '결핍'으로 남아 불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나에게 있어 결핍이란, 자신에게 준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말이다.
14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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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고 발전시켜나간 저자의 경험담에서 비슷한 기억을 추억하는 것은 물론 또 다른 삶의 교훈을 배웠다.
나의 기억에는 없는, 엄마의 입으로 전해 들은 어릴 적 추억담에서 꽤나 갖고 싶어 했던 인형 하나가 있었음을, 그리고 제 또래에 맞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린 생떼가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보통 결핍이라고 하면 무언가 부족하거나 부정적인 뉘앙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저자의 글을 읽으며 결핍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추억을 되살리는 것은 물론, 평생의 취미이자 특기로 항상 함께 하는 결핍을 불러왔던 '독서'와 '뜨개질'이 저자에게 있어 얼마나 큰 선물이자 의미일지 알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11명의 저자가 전하는 진솔하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에서 라떼시절의 정과 그리움, 추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이전 세대들이 겪은 치열하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에서는 부모님이 생각나기도 했다.
산다는 건 어쩌면 이런 소소하고 작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당시에는 그저 고달픈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후에 훈훈한 추억이 되는 것,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 이것이 산다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