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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예들
심아진 지음 / 솔출판사 / 2023년 9월
평점 :
제목과 표지 디자인에서부터 느껴지는 분위기는 여태껏 읽었던 여느 소설과는 상당히 다른 묘하고 새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기본적인 배경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스토리의 첫 시작과 이야기의 근간을 살펴보면, 오래도록 '아름답게 홀로' 살아온 후예들의 정신과 생활방식을 바탕으로 한다.
'고전'이라고 부르기에는 맛이 다르고, 오히려 인디언 부족이나 신화적 존재들이 머물렀던 시대적 배경에 더 가까운 이들의 존재와 사는 방식은 단순하면서 단출하다.
후예들은 '머물기' 보다 '떠돌아다니는 것'을, '함께'이기보다 '혼자'이기를 더 선호한다. 그래서 욕심이나 소유, 그리움이나 증오와 같은 감정에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만도 벅차다.
이런 후예들의 모습들과 오버랩 되면서 펼쳐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세 여성들의 홀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의 과정은 과거 홀로 살았던 후예들의 모습과는 새삼 다른 형상을 띤다. 이들이 홀로되고자 함에는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과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발버둥의 의미가 강하다.
상처로 얼룩진 세 여성, 그리고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파헤쳐 가는 과정은 얼핏 추리소설을 방불케 하는데, 이 속에서 이들이 홀로되기 위해서 각자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또 진정한 후예의 면모를 보이는 이는 누구인지 찾는 즐거움도 있을듯하다.
어떤 면에서는 '나 홀로'의 생활이 익숙해진 현대사회의 모습도 엿보여 관계를 맺고, 함께 생활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이 소설을 통해 '홀로'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개념을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도 좋을듯하다.
이 소설은 신화 속 후예들의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전반적인 스토리는 세 여성의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다. 홀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후예들, 그리고 이 삶을 위해 부단히 현재의 삶과 부딪히는 세 여성의 이야기는 여러 장르를 오가며 전개된다. 추리 장르를 포함해 유령 같은 혼어미가 등장함으로써 판타지의 장르도 포함하고 있다.
실제 이 소설을 집필한 작가와는 다른 또 다른 작가(=메타 작가)가 소설 속에 등장하여 종종 이야기의 흐름을 전개하기도 하고, 실제인지 상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혼어미의 등장으로 때론 독자를 혼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스토리는 세 여성 중 한 명인 요세핀이 한국에 도착하기 "D-12"부터 "D-DAY"까지 전개되는데, 불운한 과거를 살았던 세 여성의 관계를 파헤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의 복잡한 관계가 서서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디데이에 다다를수록 드러나는 충격적인 진실과는 다르게 막상 D-DAY에 이르러서 서술되는 내용은 마치 다리 중간이 뚝 절단된 듯 끊어지는데, 소설 속 등장하는 또 다른 작가(=메타 작가)의 서술을 통해 다시금 소설에서 현실로 귀환한 모양새로 마무리된다.
이를 통해 소설 속 또 다른 소설이 전개됨으로써 현실 속 또 다른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전달받는다.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는 이 소설을 일반적인 소설과 같이 스토리에 의존해서 읽는다면 조금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이 책의 저자가 의도한 대로, 디데이의 서문에 서술되는 후예들의 정신과 사고방식에 입각해 세 여성의 각자 홀로서기 위한 고군분투에 집중해서 읽어야 보다 효율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소설 속 등장하는 또 다른 작가의 스토리 상 직접 개입과 끊어내기 신공은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혼어미의 정체도 한몫을 더하는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픽션인지 가늠하기 어려워 스토리의 줄기보다 후예들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세 여성이 각자의 방식으로 헤쳐나가는지를 중점적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은 각기 '나'를 찾기 위한 여정으로, 과거 속 미스터리하게 얽혀있던 관계를 파헤치는 과정은 곧 후예들이 홀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감과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한동안 내면에 꽁꽁 자신의 마음을 묶어두는 '머무는 후예들'의 모습을 취하다 이내 '진실을 찾기 위한', '나를 찾기 위한' 여정에 몸을 던지면서 비로소 옛 영웅의 후예답게 앞으로 기꺼이 나아가는 형상을 취하게 된다.
기존의 상상력을 넘어서 새로운 형태의 소설에서 만나는 소설 속 또 다른 소설, 현재와 상상을 넘나드는 <후예들>을 통해 남다른 세계와 만나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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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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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령
-가족관계: 남편과 딸 윤지
-무당이었으나 신기를 잃고 치매를 앓는 엄마, 도망간 아빠 밑에서 자람
-현재 "치매"인 엄마는 윤 여사가 따로 돌보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생계를 위해 번듯한 찻집을 운영하던 늦깎이 총각과 하룻밤을 보내고 결혼까지 하게 됨
-서류상 이효령의 언니로 등록된 불확실한 이귀연의 존재를 파헤치기로 마음먹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귀연
-스물두 살에 한국을 떠나면서 이십 년 넘게 이국땅(부다페스트)에서 오기 하나로 버티며 살고 있다.
-그림은 그녀 자신이며, 오로지 그녀가 추구하고자 하는 전부다.
-현재 봉사로 하는 미술관 안내일을 하며 갤러리 운영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다.
-프란츠의 적극적인 구애로 원하지 않던 결혼을 했으나 오 년 만에 이혼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고, 마찬가지로 원치 않던 요세핀을 낳게 됨
-이혼 후 프란츠가 양육비 명목으로 넘겨준 식당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간간이 먹고살고 있다.
■요세핀
-엄마와 닮은 모습이 싫어, 자유분방하고 튀는 모습으로 다닌다. 짙은 스모키 화장과 옷, 다양한 피어싱을 하고 다닌다.
-고교를 졸업한 이후 별다른 직업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모습이 자주 엿보인다.
-유람선 침몰사고로 열린 추모제에서 씻김굿을 보게 되면서 헝가리를 떠나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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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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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효령의 아파트 건너편에 살고 있으며 소설을 쓰는 작가다.
-혼어미와 소통하는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자신이 쓴 소설에 등장하여 인물의 내면이나 사건에 관여한다.
■혼어미
-현재 그녀는 백발을 뒤로 묶은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증명할 수 없는 세계에만 존재한다.
-유령 같은 존재인 혼어미는 효령의 눈에 자주 띄며, 흰옷 입은 의문의 노파로 등장한다.
※혼어미: 모두의 어머니이고 누이이고 연인이며 스승인 여자를 의미한다.
※혼아비: 모두의 아버지이고 오라비이고 애인이며 지도자인 남자를 의미한다.
■마태
-현재 요세핀의 남자친구로 마태의 개 난도와 함께 자주 산책을 다닌다.
-요세핀과는 쿨한 관계로 서커스를 보거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프란츠 슈나이더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한국에서 오 년을 살았다.
-라이크스 미술관에서 귀연을 보고 반해 구애 후 결혼했으나 결국 오 년 만에 이혼했다.
■이렌느
-프란츠의 어머니이자 귀연의 전 시어머니
-동양인을 혐오하는 유색인종 차별주의자로, 아들의 며느리로 들어온 귀연을 무시하고 혐오하는 태도를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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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자세히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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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령>
보현보살 혹은 보현 도사로 불리던 엄마는 무당으로, 신기가 떨어지면서 단골들이 발길을 끊었고, 아버지마저 완전히 사라지면서 이내 엄마는 서서히 정신을 놓게 된다. 이로 인해 끼니 걱정을 하게 될 정도로 사는 게 막막했던 효령은 낡고 오래된 동네에서긴 해도 번듯한 찻집을 운영하던 늦깎이 총각이었던 남편과 하룻밤을 보내고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된다. 이때 효령은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않은 나이로 결혼은 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언젠가 엄마는 효령에게 "난 네 엄마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효령이 마침내 '그 여자'의 실체를 확인한 것은 엄마가 발병한 후 짐을 정리하면서였다.
남편과 첫날밤을 보내던 날 자신을 어루만지던 여자의 온기가 생각나면서 문득 그 여자를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지만,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무려 칠 년의 세월이 걸린다. 그 여자 이귀연은 서류상 이효령의 언니였다.
▷▷<머무는 후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
한때 효령은 딸 윤지와 남편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굳이 파란을 일으키려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여자의 딸을 통해 여자에게 복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마음에 품고 산다. 하지만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칠 년의 세월을 보낸다.
효령은 엄마랑 단둘이 있고 싶지 않고, 엄마라 부르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는데, 단어가 품고 있을 법한 따뜻한 기운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매'인 엄마를 돌볼 수 있도록 윤 여사를 별도로 고용한다.
▷▷<머무르지 않는 후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효령의 홀로서기와 나를 찾기 위한 여정)
▶효령은 결혼할 무렵 작정하고 의학과 과학의 힘을 빌려 유전자 검사를 했으나 유전자 검사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략 열여섯 개라는 상염색체 중 돌연변이가 발견되어 추가 검사를 진행했으나 '판정불가'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는 그 여자라 칭하는 '귀연'과의 관계가 후에 분명해지면서 그 사유가 드러나는데, 유전자 검사는 존재의 뿌리를 찾는 아주 적극적인 행동의 첫 시발점이라 하겠다. 효령이 종종 '언니거나 엄마일 수도 있는'이라는 전제를 달아 이야기하는데 깊이 읽을수록 더 모호함만 남는다.
딸 윤지와 함께 방문한 미술관에서 언급한 루벤스의 <시몬과 페로>라는 작품을 언급하는 장면이나(참고로 이 작품은 아버지와 딸을 그린 그림), 유전자 검사에서 판정불가 판정이 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는 '엄마'에 무게가 쏠리지만, 박선주 무당을 만나고 한 행동들을 보아서는 '배다른 언니'쪽에 무게가 쏠린다.
▶이후 이효령은 기획사라고 말하는 흥신소에 의뢰해 그녀에 대한 신상정보를 확인하고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딸인 요세핀을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온라인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친근함을 표시하는 한편, 한국으로 오기를 권유하면서 그녀의 블로그를 자주 염탐한다.
본격적으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존재를 파악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적극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 이 모든 과거의 진실을 알고 있을 돈암동에 있다는 무당을 만나러 그녀를 찾아간다. 그녀는 대금을 불던 아버지의 연인이면서 동시에 엄마의 오랜 친구였던 박선주 무당이었다.
불확실함에 대한 또 다른 진실을 찾기 위한 효령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여러 번 망설이지만, 끝내 어머니를 찾고 싶어서 왔다고 말함으로써 '나'를 찾기 위한 여정에 그녀가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효령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였을까?
딸을 낳고 자신도 엄마가 된 효령의 입장에서 엄마란 어떤 존재였을까? 한 번도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던 어머니는 끝내 정신을 놓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
결혼을 결심한 순간 존재의 뿌리를 찾겠다 결심하고, 그리고 이제 자신도 엄마가 되어 자식을 돌보는 입장이기에 어쩌면 더 '엄마'라는 존재에 더 울분을 토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효령은 자신이 현재 엄마라고 알고 있는 (무당) 엄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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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여사가 효령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이유는 그녀 역시 엄마 곁에 있기가 싫기 때문이다. 엄마가 있어야 돈도 벌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식료품도 빼돌릴 수 있지만, 죽어가는 사람 옆에, 사실상 정신이 이미 죽어버린 사람 옆에 있기가 징그러워서다. 그러라고 돈을 받고 있음에도 그 돈 따위 언제든 던져버리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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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효령도 윤 여사와 하나 다를 바 없다. 엄마 곁에 있기가 싫고 엄마가 징그럽다.
23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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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언제나처럼 부재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어쩌면 '엄마'를 찾는 과정은 스스로 자신은 엄마가 아니라고 말했던 진실을 파헤치고, 기억 속에 어렴풋이 존재했던 그 여자 '귀연'을 찾음으로써 모호했던 '나'를 찾아나가는 여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귀연>
바람기와 방랑벽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와 이기적이고 술 주정을 부렸던 어머니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귀연은 그들 대신 돌멩이를 대신 맞느라 늘 피멍이 들었다.
무책임한 유희, 한계 없는 방탕, 난잡한 성교 등 두 사람이 만드는 오물의 잔치는 끝이 없었다. 그리고 종래에는 세 사람의 삶에 효령이 등장한다. 이때 아버지는 줄행랑을 쳤고, 어머니는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그 덕에 모두 귀연이 떠안아야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때 견디다 못한 귀연은 모든 것을 뒤로 마침내 도망치듯 집을 나서는데, 모든 것을 잃고 자신 홀로 남기를 바라며 한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나라, 유라시아 대륙의 서북쪽 끝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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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생각하고 살 거야. 나만.
스물두 살에 한국을 떠나면서 귀연이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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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 넘게 이국땅에 살면서 오기 하나로 버틴 건, 예전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만 생각하고 살 거야, 나만. 귀연에게 그 '나만'은 언제나 그림을 의미했다. 그림은 귀연의 모든 감각이었고 신체였으며, 영혼 자체였다. 죽음과만 맞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삶이었다.
120~12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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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후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
하지만 프란츠의 구애에 발목이 잡히면서 오 년간의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게 되고, 피임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보기 좋게 따돌리고 태어난 요세핀 때문에 홀로이길 원했던 그녀는 홀로일 수 없게 된다.
귀연은 애초에 사랑이라는 걸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프란츠는 사랑 같은 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그들의 결혼생활은 시간을 낭비한 결혼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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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나'의 쇠락은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귀연은 무시로 터질 기회만을 노리는 갤러리에 대한 욕망을 누르느라 녹초가 되곤 했다.
9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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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대한 열망을 커져간 반면, 현실은 녹록지 않았기에 그저 하루하루 쇠락의 길을 걸을 뿐이었다.
▷▷<머무르지 않는 후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귀연의 홀로서기와 나를 찾기 위한 여정)
딸 요세핀이 한국에 가기로 마음먹고 그녀에게 돈을 달라는 요청을 했을 때 끝까지 자신의 적금을 깰 수 없었던 건, 그녀 자신을 상징하는 '그림'을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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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연은 그림에 관해서만은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 애를 써왔다. 그림에 있어서만은 다른 사람에게 눌리기 싫어 악을 쓰기도 했다. 그건, 다른 것을 포기하고서 귀연이 얻으려 한 유일한 것이었다.
28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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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핀>
흙먼지를 일으키고 다닌 기마인, 그 야만스러운 이미지가 떠오르는 요세핀은 내적, 외적으로 온전히 머무르지 않는 후예를 떠올리게 한다. 특정한 직업 없이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마태와 여기저기 산책을 다녔으며, 짙은 스모키 화장과 화려한 옷차림, 여기저기 뚫은 피어싱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한껏 뽐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람선 침몰사고를 추모하는 추모제에서 하얀 한복을 입은 여인이 희생된 자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씻김굿을 보게 되면서 마침내 헝가리를 떠나 한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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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핀은 전율을 느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가락이었으나 기이하게도 익숙했다. 여인의 손가락이 가리켰고 노래가 명령했다. 한국으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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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잃기 위해서, 알아야만 할 것을 알기 위해 자신을 던질 때라고 막연히 짐작했다. 그 무렵 블로그를 통해 별칭이 파란인 한국 여자를 알게 된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분명한 건 누군가가 자기를 부르고 있다는 거였다.
5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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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핏줄의 당김이었을까? 어쨌든 엄마와 닮은 모습이 싫어 오히려 과하게 자신을 꾸미고 다녔던 요세핀이었지만, 기이하게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가락은 그 자신을 엄마의 나라인 한국으로 이끌었다. 이때 우연처럼 파란이라는 별칭으로 효령이 접근하게 된다.
▷▷<머무는 후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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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핀은 그런 선함과 배려가 불편했는데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유 선생의 어머니를 만나자 조금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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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세핀은 터틀넥 스웨터를 입었을 때처럼 계속 목 조이는 기분이고 싶지 않았다.
13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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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핀은 알았다기보다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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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선생과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또한 언젠가 유 선생의 손가락 하나까지도 낯설어지는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감지했다.
13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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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교회에서 알게 된 유 선생과 잠시 연인 사이로 지냈지만, 어쩐지 요세핀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 불편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내 이별을 말하는데, 자신에게 무한한 사랑을 퍼붓는 유 선생과는 본능적으로 맞지 않음을 느낀 것이다.
▷▷<머무르지 않는 후예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요세핀의 홀로서기와 나를 찾기 위한 여정)
요세핀의 삶은 본능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거의 머무르지 않는 후예의 모습을 띤다. 자신과 맞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앞으로 전진한다.
엄마에게 그림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엄마의 적금을 몰래 서슴없이 깨고, 마음먹은 한국행을 가감 없이 실천하는 행동을 통해 '나'를 찾기 위한 여정에 그 어느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실천력 강한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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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핀은 생존의 방식을 알 것 같다. 아슬아슬해도 확신을 갖고 부여잡아야 한다. 결국, 잡아야 할 것은 타인의 손이 아니라 제 손이다. 제 손을 제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을 확신이 있을 때, 실수인 척 작게 소리도 지를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은 한판 연극이라고 하지 않던가. '척'을 포함하지 않은 진정한 인생은 없다.
20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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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생존 방식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문장을 통해, 요세핀의 자아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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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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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예들>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어쩐지 기마민족을 떠올리게 한다. 전투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투지와 불굴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 책에서 서술하는 <후예들>은 이러한 투지와 강한 의지를 포함해 머무르지 않는 자들을 뜻하는데,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정 혹은 '내가 짊어져야 하는 삶' 등을 내포하기도 한다.
주요 등장인물인 세 명의 여성들은 제각각 불운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의 뿌리를 찾고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선택'한다.
얽히고설킨 관계가 하나씩 진실을 향해 나아갈수록 마음속에 머물러 있던 묵은 감정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들이 마침내 진짜 '나'를 찾는 순간 마주하게 될 종착역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된다.
더불어 직접적 흐름에 관여하거나 서술의 묘사를 통해 등장하는 소설 속 또 다른 작가인 메타 작가의 활약도 기대해 볼 만한다. 특히 건너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효령을 유난히 신경 쓰고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궁금하다.
또 이후 전개될 효령과 요세핀의 만남이 성사가 될지, 이후 삼자대면은 이루어질지도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끼기 위해 앞을 향해 한 발을 내민 이들의 앞날을 축복하며, 인생을 위해 홀로 올곧이 마주하고 걷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