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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눈물 ㅣ 딱지 시리즈 5
유승환 옮김 / 두두 / 2023년 5월
평점 :
절판
처음에 딱지본 소설이라고 해서 어떤 걸까 궁금했는데, 이것저것 검색을 통해 알아보고, 또 이 책의 해설을 통해 궁금증을 풀게 되면서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딱지본 소설은 20세기 초반 조선에 새로 도입된 활판 인쇄술을 통해 간행된 일련의 대중 소설로, 얇은 두께, 큰 활자, 저렴한 가격과 함께 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화려하게 색칠한 표지가 유명하며, 특히 울긋불긋한 표지가 아이들 딱지를 닮았다고 하여 딱지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딱지본 소설을 검색해 보면 장르별로 구분되어 다양한 딱지본 소설이 190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까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는데, 대중들에게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짐작게 한다.
이 책은 딱지본 중 1936년 홍문 서관에서 펴낸 딱지본 소설로, 딱지 시리즈 5편 노동자 '하원근'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노동자로 살아가는 원근이 겪게 되는 괴로움을 통해 일제강점기 노동자들의 실태와 현실을 적나라하게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실제 1936년에 쓰인 소설을 현재의 '내'가 읽고 있다는 점이 어쩐지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다.
특히나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경제 대공황 시기로,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 지배 아래 있던 시기다. 가뜩이나 일제의 핍박에 가난하게 살아가던 시민들이 경제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삶이 더 곤궁해지던 시기의 이야기라 노동자로 사는 하원근의 삶이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더불어 시대가 변했음에도 달라지지 않은 노동자로서의 삶과 현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했다. 생계를 위해 반강제적으로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적성과 관심, 흥미와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이 과연 행복으로 이어질지, 또 자본주의 최고라는 미명 아래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공포를 선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했다.
길지 않지만 굵직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소설을 통해 시대만 달라진 적나라한 현실과 벽을 마주하면서 왜 당시 딱지본 소설이 대중들에게 인기 있었는지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노동자 하원근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1930년대, 하원근은 상해의 어느 제자 회사(인쇄용 활자를 만드는 회사)에서 십여 년 일하다 날로 달라지는 세파(모질고 거친 세상의 어려움)에 밀리며 그만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어린 처자를 데리고 할 수 없이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서 한동안 백모님 댁에서 거쳐하며 일자리를 찾아다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적합한 곳을 찾지 못하게 되면서 넉넉하지 못한 백모님집에서 나와 서울 동촌에 조그마한 사글셋방을 하나 얻어 살림을 차리고 매일 사람을 구한다는 곳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이런 생활이 이삼 개월 지속되면서 전기도 끊기고, 전당포에 저당 잡힌 물건도 빼앗기도 만다.
그러던 중 하원근은 구직 비서를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 윤충원이란 부호의 집 재정 고문을 맡고 있다는 최문섭을 만나게 된다. 그는 원근에게 경성에 일가가 많은지, 중국어를 잘하는지, 친구가 많은지 이것저것 이상한 것을 묻고는 단번에 채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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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오늘부터는 이백 원에 봉급생활을 하게 되었구나. 아! 이것이 누구의 덕일까. 그리고 영자와 정선이가 알면 얼마나 기뻐서 뛸까."
2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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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월급으로 생각보다 큰 금액인 이백원을 받기로 하면서 기쁜 마음에 그 길로 우체국에 들러 아내인 영자에게 이백원과 함께 즉시 채용되어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편지를 남긴 후 최문섭을 따라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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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일은 다른 일이 아니라 -그런데- '하게' 한다구 어찌 알지 말게, 응!"
이렇게 수작이 변하는 그 신사는 원근을 아주 자기 수중에다 집어넣어 버리려고 그와 같은 수작을 꺼냈던 것이다.
31~3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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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후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 묻는 원근에게 최문섭은 구체적인 내용은 함구하면서 어느 순간 상대방을 보통으로 낮추는 격식 표현인 하게체로 이야기 하겠다는 것을 내포하며 말을 낮추면서 수작을 부리기 시작한다.
내막을 살펴보면, 최문섭이 삼청동 윤충원이란 부호의 집 재정 고문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그 집의 사정을 알게 되는데 이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었고 여기에 전덕술과 닮은 하원근을 발견하게 되면서 이용하기에 이른다.
윤충원의 집 사정을 들여다보면, 윤 씨의 미망인 황 씨가 그 집에 하나밖에 없는 딸 혜순과 대련에서 기자로 생활하고 있는 전덕술이라는 서른쯤 된 청년을 수양자 겸 사위로 데려오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찾는다. 그래서 그의 소식을 알아보던 최문섭은 그가 이달 초순 만주 어느 곳에서 행방불명되어 죽었다는 것을 알고 그와 닮은 사람을 면접을 통해 찾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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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자네가 얼굴이라든지 체격이라든지 조금도 그 사람과 다른 점이 없으니까, 오늘부터 성명을 전덕술이라고 하고서 나 하라는 대로 하란 말이야. 응, 알아듣겠나? 바로 말하자면 그 사람은 죽었단 말이야."
3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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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최문섭은 황 씨 부인과 하원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원근에게 음흉한 말을 흘리며 서울 황 씨에게 거짓말로 자기는 만주로 전덕술을 찾아간다는 편지를 하고 하원근을 철저히 전덕술로 만들기 위해 교육하면서 한동안 시간을 번다.
하원근은 최문섭이 하는 일이 좀 이상하였으나 황 씨를 위하여 한다든지, 자기에게 하는 일이 고마운 생각에 '아무렴 어쩌랴' 하고 일단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그렇게 이 개월이 지난 후 황 씨 앞에 하원근을 전덕술로 위장시켜 데려가게 되고, 이후 원근은 전덕술을 대신하여 황 씨의 집에서 오륙 개월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보내면서 원근은 그리운 아내와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보고 싶어 꿈에 그리지만, 주인 황 씨의 명령이 있고 또 어쨌든 자기를 먹여 살린 사람에게 대접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찌할 수 없이 참아 오면서 전덕술의 행세를 해나간다.
그러던 중 자꾸만 최문섭이 황 씨의 딸 혜순과 자신을 엮어 결혼을 권하는 것은 물론 황 씨로부터 추가 금액을 빼돌리려 술수를 쓰는 말에 점차 반항심이 일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원근은 폭발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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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황 씨 부인의 부탁인 동시에 나의 명령이란 말이야. 응! 알겠나!"
그러나 하원근은 점점 반항심! 아니 이제까지 꾸던 악몽이나 깬 듯이,
"명령이오····· 이 명령이 어느 때까지나·····"
"아니, 이 사람이 미쳤나! 그게 무슨 소리야."
"미쳤어요. 내가 미쳤어요. 나를 왜 이 집의 양자를 만들었으며 처자가 분명히 있는 나를 혜순이와 왜 결혼을 자꾸 권하시오, 나는 이제는 다- 그만두겠어요."
5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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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최문섭과 실랑이를 하던 중 분개하다 쓰러지게 된 원근은 마침내 집을 뛰쳐나갈 계획을 세운다.
한편 면접을 보러 나간 남편이 취직이 되어 즉시 출장을 간다는 전보와 이백원을 받은 후 오륙 개월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어 답답해 하던 중 서울 어느 신문사 기자로 있는 남편의 친구 김영근으로부터 만주에서 한 편지를 받게 되는데, 하원근이 만주에 출장을 왔다가 비적에게 총살을 당해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게 된 것이다.
이는 하원근의 얼굴이 전덕술의 얼굴과 똑같음으로 김영근이도 한원근인줄 알고 그와 같은 편지를 보내게 된 것으로, 오해가 진실이 된 상황이다.
때문에 아내 영자는 남편이 죽은 줄 알고 김영근이 보낸 자기 남편의 시체를 경성까지 운반하여 안장한 후 살 수가 없어 마침내 친정으로 떠나게 된다. 한편 그 집을 뛰쳐나온 원근은 처자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만 춘천 친정으로 아주 갔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게 된다.
이때 뒤쫓아온 최문섭에게 그만두겠다며 모든 사실을 황 씨에게 다 고백하겠다 말하는데, 이에 최문섭은 그만둘 거면 잠자코 그만두라며 진실을 밝히지 말라며 말하자 이에 흥분한 하원근은 버럭 소리를 부르짖고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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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어쩌고 어째! 나는 너의 고용살이를 그만둔 이상 말하고 안 하고 내 자유가 아닌가? 여러 잔소리 말고 비켜라! 나는 이 악몽을 깨어 가지고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사나이다!"
7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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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하원근은 착실한 노동자가 되어 어린 아들과 사랑하는 처자를 데리고 재미있는 살림을 한다는 말로 끝맺음 되고, 한편 황 씨 부인의 집에서는 최문섭의 그간 모든 행동을 다 알고 재정 고문이라는 직함을 떼어버리게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어쩐지 노동자로 사는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아 있어서인지, 자꾸 씁쓸함이 감돈다. 당시는 시대적 상황(일제강점기+경제 대공황)이 워낙 강하게 사회를 뒤흔들던 시대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시대적 배경을 걷어낸 현대사회(자본주의사회)에서 마저도 노동자들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사회적 약자로서 노동자가 느끼는 비애와 공포는 여전하고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차별은 여전하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일반적인 노동자 역시 하원근처럼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어렵게 취업을 해도 별로 마음에 없는 일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그뿐 아니라 매해 해고와 실업 때문에 불안정한 생활을 지속되고 어려움은 가중된다. 이 모습을 통해 대공황 시대라 말하는 그때의 노동자들과 지금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냉혹한 현실 또한 마찬가지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혼란과 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바득바득 살아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 소설에서 원근은 살아가기 위해, 살기 위해 자신과 닮은 전덕술의 행세를 하며 돈을 번다. 이것은 최문섭의 음모에서 비롯되는데, 점차 시간이 갈수록 남은 삶 모두를 저당잡혀 전덕술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살기 위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전덕술로 잠시 위장한 것이지만, 최문섭의 의도대로 황 씨의 딸 혜순과 결혼까지 이어진다면 이것은 이내 가족을 배신하는 결과로 귀결되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되는 것은 물론 이는 곧 원근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또 다른 자기 상실의 공포를 불러오게 된다.
생각해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함을 알 수 있는데, 취업을 위해 일을 시작하면서 원해서 일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보통 '영혼 없이 일한다'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해야 하니깐 하고, 시키니깐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면서 산다. 이렇듯 억지로라도 일을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믿음은 어쩌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공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어쩌면 갑을이 나누어지고, 계약서에 동의 혹은 사인했다는 이유만으로 또 '갑'들은 최문섭이 원근에게 그러했듯이 '명령'을 통해 우리를 회사 혹은 계약에 묶어두고, 우리는 그 '명령'에 따라 나를 잃어버린 채 특정한 목적지 없이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늘 껴안고 산다. 그렇기에 노동의 비애와 공포를 여전히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어쩌면 원근이 마지막 순간 보여준 '광기'와 급진적 '비약'을 통한 나만의 에너지를 발휘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옛말에 '산 입에 거미줄 치랴'라는 말이 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된다는 뜻으로, 우물 안에서 벗어나면 조금 다른 나만의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요즘 유행처럼 번진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가 어쩌면 그것의 좋은 예시가 아닌가 싶다.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길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통해 내가 원하지 않는 노동자로서의 길을 벗어난 또 다른 길을 걸어가 보면 어떨까? 어쩌면 그 길의 끝에 원근의 이야기처럼 행복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