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평점 :
품절


다방면에서 강렬하게 다가왔던 <작은 땅의 야수들>. 일단 남다른 제목에서부터 임팩트가 느껴졌는데, '작은'과 대비되는 '야수들'이라는 말이 어쩐지 더 거칠고 강하게 다가왔다. 또 시각적으로 시선을 확 크는 호랑이 무늬의 등가죽과 손에 착 감기는 부들부들한 촉감에 더해 꽤나 묵직하게 다가오는 두께감이 만만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겠구나 짐작게 했다.

 

예상한 대로 이 소설을 쓴 저자의 계기부터 남달랐는데, 단편소설은 돈이 되지 않으니 장편소설을 쓰라는 에이전트 담당자의 말에 낙심한 마음을 달래고자 들어선 공원에서 문득 떠오른 사냥꾼과 호랑이의 모습이 모티브가 되어 이 소설이 탄생되었다고 한다. 작가 스스로도 기이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한순간에 펼쳐진 이 기이하고 매혹적인 소설이 어쩐지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

 

표지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우리나라의 암흑기라 불리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픽션으로, 기본적인 큰 틀은 사실에 기반하여 그리고 있는 역사소설이다. 가난하고 굶주렸던 조선시대의 적나라한 시대상은 물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들에 대한 내용과, 조선인들의 삶을 주요인물들의 관계와 상황 묘사를 통해 눈에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

 

가장 처참하고 배고픈 시절, 살아남기 위해 소위 최하층 계급이라 불리던 기생으로 살아야만 했던 이들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볼 수 있었다. 각자의 욕망과 성공을 향한 집념, 사랑과 배반이 뒤엉킨 복잡 미묘한 이들의 심리 변화를 통해 이들은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도 되짚어보자!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해당 시점의 주요 거점지역들도 만나볼 수 있는데, 평양을 시작으로 경성(현재 서울)으로 옮겨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이후 상해와 하얼빈도 만나볼 수 있다. 덕분에 역사여행을 하듯 연도별로 당시의 정황과 시대별 사건들을 되짚어 보는 계기도 되었다.

 

이 책은 소설의 형태를 띠지만, 연도별로 구분하여 총 4장으로 구성된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현장에 머물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디테일하고 세밀한 묘사 하나하나가 마치 4D의 현장감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첫 문장이 시작되는 프롤로그부터 강렬한 추위와 끝없이 펼쳐진 설원, 그리고 전율감 돋게 울려 퍼지는 깊은 산속 짐승의 울음소리는 공포감과 무력감을 선사한다. 더불어 한반도 지형의 모습이 마치 호랑이를 닮았다는 속설을 그대로 반영한 듯 호랑이를 등장시켜 단숨에 집중력과 신묘함을 전한다.

 

흔히 영물이라고 말하는 이러한 호랑이의 출연은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앞서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내고, 이로써 본격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1918년~1964년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는 이 스토리는 반세기 역사를 통해 인물의 성장과정과 시대적 혼란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등장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중점이 되는 인물인 '옥희'를 따라 이들의 삶을 투영해 보면 어떨까 싶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기생의 삶. 열 살에 가족들을 떠나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던 그녀의 삶은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웠을까? 사실 이 책에는 기생으로써 성장하는 그녀의 성장담과 사랑에 대한 감정들이 주로 다뤄지는데, 기생을 선택한 그녀를 버린 가족에 대한 소회나 고향을 떠나 홀로 경성에서 견뎌야 하는 날들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는 만나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기방에서 만난 절친을 따라 얼떨결에 오게 된 경성에서 오롯이 혼자 살아내는 감정은 어떠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더군다나 자신을 제외한 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 유일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생각만큼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초반에 옥희는 아무런 꿈도, 희망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
옥희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어딘가에 가고 싶은지 아닌지조차 잘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할 기회 자체가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고, 무언가 불확실한 것들에 대해 생각할라치면 그의 마음은 늘 멍해지곤 했다. 더 나쁜 점은,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호기심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
그의 상상력은 낯설지 않고 친숙한 것들 사이에서 계속 순환하며 흘러갔다. 말하자면 강물보다는 샘 같았고, 특히나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할수록 그랬다.

100~101페이지 中
=====

 

이 소설 속에는 옥희 외에도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관계성을 살펴보면 얽히고설켜있어 조금 복잡하게도 느껴진다. 그래서 대략적인 인물관계도를 정리해 보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인물들의 심정적 변화나 관계가 자주 변하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과거의 인연이 현재에 다시금 이어지기도 하고, 또 알쏭달쏭 알기 어려운 상황들에 접어드는 때도 있어 대략적인 기준점을 잡고 정리해 보았다.

 

이 이야기는 누구를 주인공으로 보든 최소 3대에 걸친 연결성과 관계성이 도드라지는데, 이 연결성 덕에 개연성이 생기고, 지속적으로 이야기가 확장된다.

 

예컨대, 정호를 기준으로 본다면 관계의 첫 포문은 아버지 남경수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연히 도움을 주고받은 야마다와 인연을 맺게 되고, 추후 이것이 필연과 우연 어디쯤에서 다시 도움을 주고받는 상황으로 연출된다. 여기에는 '옛날 옛적에'와 같은 형태를 띠고 정호의 할아버지 이야기도 슬쩍 등장하는데, 예전부터 사냥을 중점적으로 해오던 내력이 있는 집안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정호가 작고 깡말랐지만 힘이 센 캐릭터가 완성이 된다.

 

옥희의 절친으로 나오는 연화의 경우도 미모가 뛰어난 이부언니 월향과 엄마 은실, 그리고 이모 단이가 모두 혈육으로 연결된 한 가족이며, 단이의 엄마 역시 기생이었다는 설정을 통해 이들 가족 모두가 기생을 직업으로 꽤 오랫동안 대대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상류 기생으로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은 물론 그들이 관계하는 권력과 부를 거머진 이들의 이야기까지 확장되어 더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추후에는 월향과 연화의 아이들도 등장하는데, 이 소설에서 전개되는 스토리를 통해 이들이 누구와 관계를 맺고 어떤 기승전결을 통해 지속성이 생기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스토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인 '경성'은 등장인물들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인 화양연화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한참 꽃다운 나이에 능력과 미모가 활짝 만개한 옥희와 연화를 만나볼 수 있었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인력거를 몰던 한철이 대학 진학은 물론 자동차를 만드는 일을 하는 꿈을 이루는 모습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화려하게 꽃피웠던 만큼 또 초라하게 저무는 곳이기도 했는데, 예측할 수 없는 사랑의 작대기가 수도 없이 좌절을 안겨 주었고, 독립을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장소이기도 하다. 또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 사랑했던 이도, 가족도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인연은 참 묘한 것이어서 마음처럼 되지 않은 인생처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 모습도 목격되었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의 예측 불가능한 관계를 통해 마지막에 누가 눈물을 흘려줄지, 또 마지막 순간 그들의 옆에 어떤 이가 자리하고 있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살펴보기를 바란다.

 

=====
내가 말했지, 호랑이를 죽이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만이라고. 그리고 그건 호랑이 쪽에서 먼저 너를 죽이려고 할 때뿐이다. 그럴 때가 아니면 절대로 호랑이를 잡으려 들지 말아라. 알겠느냐?

23페이지 中
=====

 

이 책에서는 종종 호랑이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초반에는 단순히 진짜 호랑이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중의적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총칼이 난무하던 시대이니만큼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나오는 것보다 신나는 것도 없거든. 슬플 땐 그걸 기억하렴."

102페이지 中
=====

 

처음 아이들이 경성에 도착해 남대문을 지나면서 들떠있는 아이들에게 건넸던 단이의 이 말이 유독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미 겪어본 이가 짐작이라도 한 듯 미리 전하는 조언으로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
소년의 아버지는 과묵한 사람이었으나, 죽기 전에 그는 아들에게 한 말을 남겼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을 거라고.
(...)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거라."

104페이지 中
=====

 

비슷한 시간, 경성에 조금 더 이르게 도착한 정호가 아버지가 건넨 말을 떠올리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이들의 앞날을 암시한 문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
"내가 어른이 되면 이것보다 백배는 더 좋은 걸 너한테 갖다 줄 거야."
(...)
정호가 옥희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건 바로 그런 모습 때문이었는데, 그가 평생 벌 수 있을만한 것보다 더 값진 것을 주겠다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그 당당한 자신감이 옥희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

그는 결코 자신의 상황을 탓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마치 텅 빈 그릇 같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162페이지 中
=====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바로 이 부분이 이 옥희가 처음 정호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심 정호와 옥희가 알콩달콩 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직진이었던 정호에 비해 옥희는 우정과 사랑 그 어디쯤 머물러 있었나 보다.

 

=====
성수의 도덕적 해이함은 단이에게 일종의 여지를 주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명보의 청렴하고 정직한 태도는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게 했으며, 그래서 그를 더욱 존경할 만한 인물로 보이게 했다.

172페이지 中
=====

 

단이가 두 남자를 동시에 마주한 순간, 들이닥친 복잡 미묘한 감정이 잘 드러난 문장이 아닐까 싶다. 사랑했던 옛 연인이지만 한순간 자신을 두고 도망가 버린 전 애인 성수와 그와 반대되는 매력으로 다가왔던 명보.

 

단이와 함께 있는 명보의 모습은 독립운동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어쩐지 수줍은 소년의 첫사랑을 보고 있는듯하다.

 

=====
결혼 생활 내내, 명보는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바로 그 지점을 아내에게는 결코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에 깊은 실망을 느꼈다.

 

그가 단이에게 그처럼 매력을 느끼고 이끌렸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
명보가 바라보던 단이의 얼굴은 깊은 지성과 순수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더하여 단이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감동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건 강하고 높은 자긍심이 포함된 동시에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개방적인 활력이었다.

186페이지 中
=====

 

아내가 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단이에게 끌리는 사유를 언급하는 장면이다. 자신이 가장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함께 협력하여 해나간다는 것에서 어쩌면 명보는 큰 위로와 위안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
"물론 연화 양이 노래 실력이 더 출중하다는 건 나도 알죠. 하지만 사진발이 더 잘 받는 건 옥희 양인걸!" 연화를 진정 화나게 하는 건, 노래 실력으로 따지면 그저 평범한 수준인 옥희가 밤마다 무대에 올라 관객 앞에서 노래할 기회를 얻는다는 사실이었다.
(...)
물론 연화는 옥희를 사랑했지만, 친구를 향한 다정함과는 별개로 매일 밤 가슴속에서 치미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303페이지 中
=====

 

그토록 친했던 절친 사이가 어그러진 계기이자 첫 시발점을 꼽으라면 바로 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출중한 실력에 비해 조금 부족했던 외모로 인해 빈정이 상해버린 연화는 마음속에서 서서히 옥희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이를 감지한 옥희는 연화와는 다른 이유로 거리를 두게 되는데, 이 때문에 이 둘은 꽤 오랫동안 마음을 터놓는 사이에서 체면을 차리는 사이로 변모하게 된다.

 

=====
"앞으로 정호 동지의 이름을 걸고 쓰는 모든 글은 정직하고 선한 믿음으로 쓰여야만 합니다. 그게 바로 좋은 이름을 갖는다는 의미니까요. 가문이 어떤지, 얼마나 부자인지, 얼마나 유명한 지가 아니라요."

314페이지 中
=====

 

독립운동을 하고자 모인 모임에서조차 온갖 차별이 난무하던 시대, 유일하게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대우해 준 것은 이명보가 유일했다. 지식, 재산, 권력 등 가진 것이 많았음에도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로 대해준 명보는 정호에게 틈틈이 쓰고 읽는 것도 가르쳐 주었는데, 이름을 쓰는 것조차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에 따라 쓰라고 가르친다.

 

=====
그는 또래 남자들과 어울리며 자유로워져야 할 시기에 한 여자의 사랑 안에 갇힌 채 고립되어가는 스스로를 발견한 터였다. 옥희 역시 그런 한철의 마음을 직감했기에, 그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노력했다. 비록 그로 인해 옥희 자신이 불행으로 가라앉더라도 말이다.

362페이지 中
=====

 

정호, 옥희, 한철의 삼각관계에서 정호가 옥희에게 모든 것을 다 퍼줬다면, 옥희는 한철에게 모든 것을 다 퍼주는 관계였다. 더 사랑했기에 더 약자가 된 이들의 미묘한 관계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초반에는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던 관계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면서 맞이하게 된 처절한 최후!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한 관계의 끝은 어디일까?

 

=====
"아무도 믿지 말고, 불필요하게 고통받지도 마. 사람들이 하는 말 뒤에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그게 널 위한 내 조언이야."

512페이지 中
=====

 

잊을만하면 나타나던 이토의 뜬금없던 충고!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던 그가 옥희에게 마지막 순간에 전한 진심. 그가 옥희에게 품었던 진짜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
"일본이 항복했다!"
"한국은 독립국이다!"
(...)
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서 정호는 크게 울부짖었다. 황홀함의 절정에 빠져 목을 놓아 흐느끼는 순간, 비로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530페이지 中
=====

 

광복 이후 부르짖는 '대한독립만세'의 순간은 얼마나 황홀했을까? 어릴 때부터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경성까지 흘러들어와 움막집에서 굶주림을 견뎌야 했던 정호. 어쩌다 보니 독립운동 모임에 끼어 목숨 걸고 임무를 실행하기에 이르는데.

 

생각해 보면 본인 자의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진행한 것들이 너무 많다. 움막에서 대장이 된 것도, 독립운동 모임에 들어가게 된 것도 모두 누군가의 추천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떠밀리듯 된 상황들이다.

 

해방을 맞이한 후에야 비로소 느낀 행복을 느꼈다는 대목에서 그동안 얼마나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인내하며 열심히 살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
새벽달처럼 옅은 분홍색과 회색으로 빛나는 진주 한 알이었다.

한참이나 그걸 바라보던 나는, 정호가 아직도 나를 돌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저세상에 가서도 말이다.
(...)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603페이지 中
=====

 

뿔뿔이 흩어지고 비로소 혼자 남은 시간. 그녀는 정호의 죽음 이후 더는 경성에 남지 못하고 홀연히 제주도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진주 한 알.

 

그것을 보고 정호가 아직도 자신을 돌봐주고 있다고 깨닫게 되는데. 이건 뒤늦게 깨달은 사랑의 감정일까? 아니면 끝까지 자신을 돌보아주던 정호에 대한 그리움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토록 사랑했던 한철의 배신으로 상처를 입은 그녀, 임무를 앞두고 사랑을 속삭이는 정호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녀. 마지막 순간 누명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정호를 바라보면서 옥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페이지를 펴는 순간 앉은 자리에서 다리가 저려올 정도로 읽게 되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기에 적당한 휴식과 자세 바꾸기는 필수다. 책의 내용은 앞서 언급한 대로 우리나라의 격동기인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내용이 무겁거나 전혀 지루함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 시대에 살았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더 푹 빠져들게 된다.

 

혼란과 차별,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 허덕이면서도 꿈을 찾고 성장을 이어나가며 사랑과 투쟁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특별할 것이 없기에 더 공감이 간다. 등장하는 이들 역시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어 특정한 시선에 갇히지 않는다. 예컨대,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에서 실존 인물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 역시 먹고, 자고, 사랑하고, 수줍어할 줄 아는 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어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게 한다.

 

메인으로 등장하는 기생에 대한 서술에서도 돈과 술, 여흥을 즐기는 쾌락적 요소나 여성스러움만을 강조하기보다는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당당하고 멋진 모습, 적극적으로 3.1운동에 가담하는 박력 넘치는 모습도 함께 서술함으로써 특정 모습에 국한되지 않는 캐릭터를 그려낸다.

 

디테일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당시 평양의 모습부터, 시대상에 따라 서서히 변화해 가는 경성의 모습, 고즈넉하고 한적한 매력을 품은 제주의 모습까지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도 추천해 본다. 

 

세계지도 속에서 매우 작은 땅에 불가한 대한민국. 어쩌면 이 책이 말하는 '작은 땅의 야수들은'은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고 살아남아 이 땅을 지킨 우리들을 일컫는 말은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