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으로 돌아오다
호르바 지음 / 좋은땅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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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학 교사의 첫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가볍게 넘기기에는 여러모로 되돌아보게 하는 문장들이 쏙쏙 눈에 띄어 나의 발목을 잡았다. 이 책에 담긴 주요 쟁점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외에도 생각해 보게 되는 여러 내용들이 가득하다.

 

경험치에 따라, 나의 상황에 따라, 고민하고 있는 내용에 따라 어쩌면 이 책은 그 가치가 달리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기종을 비롯해 이 책에 등장하는 각 인물의 상황들은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문제이자 현 상황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특별한 모임을 통해 '우리'가 된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만의 특별함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기종은 수학 교사 퇴직 후 현재 카페를 운영 중이다. 수학 교사라는 직업에 회의감이 들어 일찍 퇴직을 했고,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 카페를 차렸다. 그리고 여기에서 취미로 수학을 공부할 수 있는 모임 '나누고파'를 만들고 저녁시간 카페에서 수학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나누게 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모임이 이루어진 이후부터 시작되지만 사실상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기종의 첫사랑 이야기는 끊임없이 전개된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그 줄기들은 어느덧 하나로 어우러져 하나의 꽃을 피워내는데, 그것은 곧 원점으로 돌아온 기종의 첫사랑에 얽힌 대단원의 전말에 관한 이야기다.

 

이처럼 이야기는 기종의 첫사랑의 시작과 끝점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핵심적으로 살펴봐야 할 주요 쟁점은 두 가지가 더 있다.



1. 주인공 기종의 원점인 첫사랑 '미수'와의 이야기
2. 수학적 표현으로 서술되는 감정 표현과 삶에 대한 이야기
3. 어쩌다 시작하게 된 ‘나누고파’라는 모임에서 나누는 그들만의 이야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다고 느끼는 수학을 통해 삶의 고리를 만들고, 이를 통해 감정 서술을 하는 독특한 형태는 자꾸만 되새기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또 세대, 나이, 성별이 다채로운 ‘나누고파’ 모임에서 나누는 그들의 속 깊은 이야기는 세대 간의 갈등과 선입견을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한 사람으로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평소라면 스쳐 지나갔을 사람들이 모임을 통해 점차 특별한 인연으로 다가오게 되면서 각자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외로움과 고독함에 대한 치유를 얻게 된다.

 

기종이 일찍이 수학 교사를 퇴직한 이유는 가르침에 대한 좌절 때문이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수업을 간신히 하고 교실을 나오는 순간의 공허함, 교육철학도 없는 자신은 교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지 가르칠 자격을 갖춘 교사가 아니라는 생각, 입시 상담 시 자신의 의견이 묵살당하는 상황들을 통해 주변 사람보다 못한 신뢰를 가진 교사라는 생각이 점차 커지기 시작하면서 자괴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런 시간들을 꽤 오래 버텨내며 마침내 지루했던 시간들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게 비로소 카페를 열면서부터다. 이는 그가 교사로서 근무하던 때와 처음 그가 카페를 열면서 느끼는 시간 흐름에 대해 서술한 장면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극명하게 대비되는 서술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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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바쁘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시간은 느렸다. 술자리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 예순 살이 돼 있으면 좋겠어.'라고 버릇처럼 말했다. 20년은 지루하게 흘렀고 작년 2월 퇴직했다. 사람들은 왜 좋은 직업을 일찍 퇴직하냐고 물었다.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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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그만두니 할 일이 없어 주로 카페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카페나 할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학원에 등록해서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요즘 카페에서 빵도 파는 게 대세라는 말에 제빵기능사 자격증도 땄다.
(...)
카페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생각과 행동이 느려졌기 때문이다.
(...)
나른함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카페를 연 지 석 달이 지났다.

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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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최근 교사들의 지위가 바닥에 떨어져 교사라는 직업을 떠나고 싶어 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기종이 느낀 자괴감과 수없이 느낀 좌절감, 선생으로서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은 비단 기종만 느끼는 부분은 아닌듯하다.

 

더불어 카페에서 보내는 기종의 시간을 살펴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일상에서 느끼는 주말의 시간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기종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보다 자신의 공간을 갖고 싶어 카페를 열게 되는데, 카페 오픈 이후 하나씩 드러나는 그의 과거와 그 자신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면 참 기묘하고 특별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 년에 두 번씩 원인도 이유도 모르게 펑펑 흘리던 눈물의 이유, 그것이 다시 일 년에 한 번으로 바뀐 것 또한 이유였음을 추후 알게 되는데, 첫사랑 미수와의 첫 만남부터 4년 후 재회, 그리고 블루마운틴에서 만난 후 8개월 만의 이별, 그리고 27년 후의 특별한 만남까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기종의 시간을 따라가보면 운명 같은 그들의 사랑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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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점을 중심으로 맴도는 원이 될 것이다. 때론 거리가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며 타원을 그리겠지만, 포물선이나 쌍곡선처럼 영영 멀어지는 일은 없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15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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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무한대로 커져 감당할 수 없게 됐다. 28년간 미수에 대한 그리움이 쌓여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나타났다. 원점을 다시 찾았다. 내 삶은 원점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방향을 잡고 움직일 것이다. 그녀가 원점으로 돌아왔다.

20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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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고 명료한 답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렵다고 느껴 기피하는 수학을 새삼 다시 보게 만든 기종의 서술 방식은 철학적이면서 깊이 있는 감정을 담아내고 있어 자꾸만 읽어보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취미로 수학을 공부할 수 있는 모임 '나누고파'에서 여실히 드러나는데, 여태껏 접한 수학과는 그 괴가 달라 재미있게 수학을 접하는 것은 물론, 수학의 창시자들에 대한 궁금증까지 유발하게 만든다. 특히 이 모임에 속한 이들의 다양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함께 나누며 위로와 위안을 얻고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은 어쩐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나누고파' 이름의 시작점
나누기 곱하기를 줄이면 '나누곱하'이고, 그걸 발음하면 '나누고파'가 된다.

 

■모임의 규칙
첫째, 의무적으로 참석할 필요 없다.
둘째, 상대의 의견을 부정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셋째, 별칭을 사용한다.

 

■모임의 멤버 및 별칭(수학자를 별칭으로 지정)
기종(탈레스), 어머니(홍정하), 제빵제과 학원 선생님(가우스), 쉬리 공시생(오일러), 여중생(칸토어), 중절모 할아버지(데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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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상혁도 애어른이다. 40대인 나는 아직도 사춘기를 겪고 있고, 10대인 상혁은 어른을 걱정할 줄 안다. 애어른은 아이와 어른의 중간쯤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둘을 모두 포함하는 표현이다.
(...)
나와 상혁은 아이도 어른도 아닌 복합적인 애어른에 속한 원소다. 철없음이란 허수 부분을 가진 나와 어른스러움이란 허수 부분을 가진 상혁은 누가 더 나은지 더 못난지 비교할 수 없다. 둘 다 그냥 각자의 위치에서 존재하는 원소로서 가치 있다. 우린 꼭 아이일 필요도 어른일 필요도 없다. 어른이 아이 같다고, 아이가 어른 같다고 창피하거나 이상한 게 아니다.

2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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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머니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데, 바보처럼 그 간단하고 분명한 사실을 잊고 산다. 분모가 0이 될 수 없는 반면 분자는 0이 될 수 있다. 분자가 0이면 '1분의 0'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분모를 생략해서 0이라고 쓴다. 분자가 없으면 부모를 생략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존재도 그렇다. 자식이 없어지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는다.

4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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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미지수 x를 찾기 위해 고민했듯이 어르신도 꿈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나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세대'라는 뜻으로 x세대라고 불렸다. 기성세대가 우리 세대를 알 수 없듯이 나 자신도 몰랐다. 여전히 x 세대답게 꿈의 방정식을 풀지 못해 오답만 구하고 있다. 정답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풀고, 풀고, 또 푼다. 언젠가 답을 찾고 싶다. 데카르트가 인쇄공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듯이 어르신도 나도 나누고파 모임에서 해답을 얻길 바랐다.

10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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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수학자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 읽다가 어느새 기종의 감정을 담은 수학적 해설을 마주하고 보면 자꾸만 이 구절을 반추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곤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수학적으로 우리의 삶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세상의 편견 아래 가지고 있던 틀도 깨버리고, 잊고 사는 사실도 다시 한번 깨우친다. 현실적으로 풀지 못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계속해서 풀고 있는 나 자신도 발견한다. 어쩐지 현실 속 또 다른 '나누고파' 모임을 갈망하게 된다.

 

정체불명의 다채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속 얘기를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세상에 외롭고 친구가 필요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친구가 되는 것에는 세대, 나이, 성별이 무의미하다는 것도 깨닫는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그 사람 전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모임을 통해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불량해 보인다고,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 아무 문제 없어 보인다고 그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

 

이 모임 사람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외로움과 친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카페에서의 모임이 그렇게 시작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런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통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행복이란 어쩌면 이런 소소하고 작은 것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를 알아봐 주는 것, 인정해 주는 것, 또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인생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이것을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나누고파' 같은 모임이 있다면 어떤 것도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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