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 일기 1 - 수박 서리
한즈 지음 / 좋은땅 / 2023년 4월
평점 :
품절


소심하고 내성적이지만 상상력은 풍부한 한 소년의 시골 적응기가 담겨 있는 유쾌한 소설로 한국 정서와 시골 감성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스토리다. 요즘에는 찾아볼 수 없는 '수박서리'를 주제로 소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아이일 때 할 수 있는 다양한 상상과 풍부한 감정 상태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시골로 전학 온 이후 겪는 이 모든 '처음'은 불안함과 동시에 모험심을 자극하는데, 특히 하루가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주인공의 '수박 서리'를 통해 잃어버린 동심 속 추억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르고 갑작스레 시골로 이사 오게 된 주인공.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전개되기에 어른들의 사정 같은 것은 알 길이 없다. 그저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 시골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고, 하필이면 방학식 당일에 전학을 하게 되면서 반도 정해지지 않은 애매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
돌이켜 보면, 아리송한 내 어릴 적 기억에 이사는 심심치 않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학교를 옮겨야 하는 전학은 이번이 처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갑작스럽게 닥쳐 온 일이기도 했다.

13페이지 中
=====

 

아는 친구도 없고, 선생님도 어쩐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 뻘쭘한 상황에 놓인 소년은 소심해서 누군가에게 선뜻 말을 건네는 것도 어쩐지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 겉모습과는 상반되게 머릿속은 온갖 상상으로 혼란하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마음속 이야기는 한가득이다.

 

=====
그때 이미 나는 선생님께서 나를 미워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게다가 방학이 끝나고 나면 반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차례에 걸쳐 애써 강조하시면서 아이들에게 내 소개도 해 주지 아니하고, 자리도 없이 뒤쪽에 한참을 서 잇게 만들고, 투명 인간 취급을 하고.

29페이지 中
=====

 

말 한마디 내뱉는 게 조심스러워서 전학 전 학교에서 이미 맞고 온 예방접종을 다시 맞는 일까지 겪게 되는 주인공의 다사다난하고 뜨거웠던 그 여름의 시골 적응기를 함께 살펴보자.

 

 

낯을 가리기에 타인과 함께 하기보다 혼자 상상하며 노는 것을 좋아하는 주인공은 자신만의 생각 속에 풍덩 빠져 사는 날이 많다. 언제 어디서나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여러 장르의 스펙터클한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리지만, 정작 타인이 보기에는 말 못 하는 아이라고 생각할 만큼 과묵하고 수줍음이 많다.

 

=====
가슴이 저려 오며 진땀이 흐르고 숨쉬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불안하고 초조하면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데, 나만 그런 것인지 다른 아이들도 다 그런 것인지는 모른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려운 주인공(16페이지 中)
=====

 

이 책의 스토리는 갑작스레 시골 학교로 전학 가게 되면서 우연히 합류하게 된 '수박서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소년의 상상력에서 벌어지는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지켜보는 재미가 은근 쏠쏠하다. 더불어 초등학교 1학년 또래들이 으레 하게 되는 고민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확인해 볼 수 있다.

 

=====
내 오랜 경험으로는 시간이 잘 안 갈 때는 밥을 한 번 더 먹는 게 최고다. 밥을 먹는 동안에는 세상만사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무아지경이 되니까 시간이 아주 잘 간다.

엉뚱한 생각에 웃음이 나왔던 장면(56~57페이지 中)
=====

 

=====
어떻게 할까? 큰 딸은 너무 무거워서 집에까지 업고 갈 일이 걱정이고, 작은딸은 너무 어려서 혹시 덜 익은 게 아닐까 그게 걱정된다.
사실 익지 않은 허연 수박은 가져가 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 맛이 없어서 먹을 수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잘 익은 걸로 바꿔 달라고 수박을 들고 다시 한번 여기에 와야 하나? 서리한 수박도 바꿔 주나?

서리하는 과정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엉뚱하고 귀여웠던 장면(126페이지 中)
=====

 

아이들만이 가진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 표현과 더불어 낯선 환경에서 타인과 나를 동떨어진 대상으로 바라보고 자신을 외계인이라 말하는 주인공의 귀여운 일면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아이 같다가도 문득 성숙함이 묻어나는 생각들을 엿볼 때면 어쩐지 아빠 옷을 입은 아이 같아서 자꾸만 웃음이 난다.

 

=====
여기 붙박이라면 몰라도 어차피 나는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게 될 외계인이니까.

잦은 이사로 인해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주인공의 심리를 알 수 있는 문장 (55페이지 中)
=====

 

처음 보는 동네 형을 따라 모험을 하듯 떠난 캄캄한 밤 수박 서리는 소년에게 설렘과 불안, 통증, 상처, 사기당한 기분, 무서움, 안도감, 고마움 등의 다양한 감정을 선사하는데 읽으면서 단편적으로나마 우리네 성장과정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단순히 어릴 적 한 번쯤 겪게 되는 짓궂은 장난이라 볼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과 과정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형이 시킨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그냥 믿음 하나로 행동하는 순수성과 여기에 소년의 상상력이 더해져 전개되는 이야기는 유쾌함을 담는다. 속임수에 당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던 소년의 수박서리 모험은 어쩌면 소년을 한 뼘 더 성장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직접 겪은 그 밤의 일들은 결코 그냥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
혹시 똥구멍에 꼽혀 있는 수박 줄기가 몸속에 뿌리를 내려 영양분을 빨아 먹으면 어떻게 하나?

영양실조에 걸려 차츰 말라 죽는 게 아닐까?
그러게 꼬챙이를 잘 챙겼어야 했는데.

 

동네 형이 시킨 짓궂은 장난을 진실로 믿고 따른 주인공. 그리고 더해진 상상력을 통해 순수함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문장(142페이지 中)
=====

 

결론을 보게 되면 어쩌면 조금 허무하거나 허탈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컴컴하고 어두운 세상 속에 혼자 동떨어진 소년에게는 세상 처음 경험하는 놀라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기준에서 '살짝 버겁다' 느낀 '나쁜 일'을 호기심 때문에 처음 보는 형을 따라나선 길.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고 진행한 첫 일탈이자 모험을 통해 소년은 무엇을 얻고 깨달았을까? 내심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
단지 내가 아는 것은 그게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질이라는 것과, 붙잡혀서 맞아 죽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키가 훨씬 더 커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인데, 적어도 3~4학년쯤은 되어야지 아직은 시기 상조라는 말이다.

'서리'에 대한 주인공의 생각을 살펴볼 수 있는 문장

(10페이지 中)
=====

 

이 책은 동심을 따라 즐거이 읽어봐도 좋고, 자신의 성장담에 빗대어 '처음' 경험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수박서리'라는 글자만으로도 이젠 옛이야기가 되어 왠지 그리움이라는 글자가 떠오르는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