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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포르투갈 - 산티아고 순례길, 지금이 나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면
한효정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11월
평점 :
예전에 차승원과 유해진이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을 통해 영상으로나마 미리 순례길을 걷는 이들의 모습과 이야기를 확인해 보았듯이, 순례길을 걷는 일은 단순히 종교적 신념만 가지고 있다고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 신념보다 그 이상의 의지와 결심으로 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나름의 사연과 사정을 가지고 이 길을 걷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먼 길을 오로지 걸어야 하기에 순례길을 오르기 전에는 남다른 각오와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마음먹는다고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루트가 아니며, 마음먹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오르는 이들이라면 그만한 무언가 동기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쓴 저자 역시도 불현듯 맞닥뜨린 번아웃을 극복하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이다. 처음 순례길을 도전했을 때는 7년 전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걷는 '프랑스 길'을 통해 900km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다시, 순례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번에는 포르투에서 시작해 해안길을 따라 걷는 '포르투갈 길'을 통해 300km을 걷는 일정에 도전한다.
시인이자 이 책의 출판사를 운영 중인 저자는 적은 인원으로 꾸려가야 하는 상황에 매일을 일에 파묻혀 지내다 마침내 번아웃을 경험하고 휴식과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어 혼자 걷는 순례길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 경험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에는 간단하게 짐을 꾸려 길을 떠난다.
이 책은 총 3개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전 포르토에서의 일정, 산티아고 순례길, 마지막으로 리스본의 일정을 각각 담고 있다. 에세이 책인 만큼 스토리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포르투갈의 다양한 모습과 색다른 해변길을 따라 걷는 순례길의 일정들을 그리듯 마주할 수 있어 힐링 포인트를 여럿 만나볼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걷는 '프랑스 길'이 언덕과 평지를 주로 걷는다면, '포르투갈 길'은 독특하게 해안길을 따라 걸을 수 있어 다양하고 예쁜 카페는 물론, 곳곳에서 감성적인 풍경들도 만나볼 수 있다.
저렴한 물가와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맛있는 빵과 와인은 순례길을 걸으며 위안과 위로를 전해주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맛있는 식사 자리는 새로운 이들과 친목을 쌓을 기회를 만들어 준다. 때론 호탕하고 즐겁게, 때론 진지하고 진솔한 이야기로 만남과 추억들이 하얗게 쌓인다.
이 길에는 수많은 이야기와 걱정, 고민들이 담겨있는데 딸의 임신으로 새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저자, 위독한 아버지를 두고 길을 떠나온 사브리나, 이혼을 앞두고 생각을 정리하러 온 소냐, 더 늦기 전에 아기를 갖고 싶어 하는 스테파니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이 길을 걸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답을 얻었을까? 순례길을 걷는다고 해서 무작정 문제점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무작정 걷고 또 걸으며 '나'를 돌아보고,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서로의 대화 속에서 인생을, 삶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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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걸어라. 난 곧 떠날 사람이니, 넌 너의 길을 가거라."
16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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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의 아버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딸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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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소풍처럼 생각하고 살아라."
에필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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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거리며 사는 저자에게 아버지가 건넨 이야기.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며 보낸 순례길에서의 13일은 두 번째 도전이었기에 조금은 더 느긋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려놓음과 나눔을 행하고, 잠시 멈춰서 쉬어가며 천천히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눈에 담으며 현재를 즐기게 되었다.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겪으며 나를 돌아보는 것은 물론, 관계, 인연, 감사함, 반가움, 외로움을 경험해 본다.
그저 순례길만 걸은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에서 보낸 앞뒤 일정들도 인상적이었는데, 포르투에서 보낸 일주일과 리스본에서 보낸 일정이 바로 그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아 눈물을 보이고 만 포르투갈어 수업, 외국에서 맞이한 예순한 번째 생일, 와인 공정 과정과 맛있는 와인을 맛볼 수 있었던 와이너리 투어는 포르투에서 일주일간 알차게 경험한 일들이다.
리스본에서 보낸 경험은 이보다 좀 더 버라이어티한데, 도착하자마자 분실한 배낭과 한이 담겨 있는 우리나라의 민요와 비슷한 파두 공연 관람, 세상 가장 맛있었던 에그타르트, 한밤중 화장실에 간다고 나왔다가 바깥에 갇히는 일화 등 뒤돌아보면 기억에 남을 추억들이 가득하다.
울고 웃으며 보낸 포르투갈에서의 스토리를 읽으며, 이게 바로 여행의 묘미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 같지 않아 때론 속상하고 불편한 일들도 발생하지만, 의외의 부분을 발견해서 더 기쁘고 반가운. 그래서 현실로 되돌아왔을 때 그 기억으로 더 힘차게 살아갈 힘과 계기가 되기도 하는 그것이 진행한 여행의 목적이자 묘미가 아닐까?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들 속에서 포르투갈의 풍경과 여유, 날씨, 바람, 해변, 햇빛 등을 만나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꿈꾸고 있는 나에게 '프랑스 길'만이 전부가 아님을, 또 다른 길도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아 이 책을 읽고 난 뒤 또 다른 꿈을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