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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키드의 생애 - 테이프는 사라져도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 갈 줄을 모르고
정율리 지음 / 카멜북스 / 2022년 12월
평점 :
이 책을 읽으며 모처럼 어린 시절을 추억해 본다. 즐거운 상상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게, 함께 공유하고 떠올릴 추억이 있다는 게 이토록 소중하고 달콤한 것이었나 깨닫게 된다. 추억이 가지는 힘이, 어릴 적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던 보고 듣고 느꼈던 경험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참 많은 것을 지탱해 주고 있었구나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비디오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그 시대를 추억하며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소히 아날로그 세대에서 디지털 세대로 넘어가던 시대를 경험한 이들은 많은 변화를 겪으며 그 과정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그 시대만이 주는 전유물 같은 비디오는 잊고 있던 보물 같기도 하고, 시간을 담고 있는 추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는 성장과정 속에 늘 함께 했던 비디오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이 책에 담았는데, 나의 어린 시절도 함께 떠올려 볼 수 있어 반갑고 즐거웠다. 처음 비디오를 접하게 된 계기와 처음 선택한 비디오, 첫 빨간 딱지가 붙은 비디오에 얽힌 추억, 인생에 힘이 되고 버팀목이 되었던 비디오, 비디오에 담긴 인연과 사람들 등 지금은 기억 저편에 묻힌 빛바랜 추억의 모습들이 방울방울 담겨있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그때 그 시절의 정다운 모습들은 책 곳곳에 등장하는 가전제품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었는데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솔솔 밀려든다.
LG가 럭키금성이라 불리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기 위해 텔레비전 앞 손잡이를 돌리던 시절 텔레비전은 집집마다 색다른 무언가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변압기를 달고 있거나 더듬이처럼 솟은 안테나를 삐죽빼죽 머리에 달고 이리저리 방향을 잡아야만 나름 선명한 화질의 TV를 볼 수 있었는데, 그래도 채널이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머리 부분을 툭툭 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러다가 텔레비전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장착되고 어느새 방송되는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가다 조만간 비디오의 세계는 전멸했고, 그 짧은 사이 DVD도 쇠퇴하고 컴퓨터 CD도 사라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가전제품은 수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는데, 그 속에서 나름 선전했던 것이 '비디오'였다. 그래서인지 비디오가 주는 묘한 감성적 느낌이 있는데, 그런 느낌들을 이 책에서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었다.
삶에 고단함이 느껴지는 순간, 문득 떠올리며 살아갈 힘을 얻게 해주는 추억의 힘! 그것을 온전히 담고 있었던 이 책을 통해 진짜 소중한 것과 보물 같은 사람들을 추억해 보길 바란다.
●내가 선택한 첫 비디오 <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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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 마샬 감독의 영화 <빅>은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모두 함께 영화관에서 본 영화였다. 네 살 무렵, 어두운 극장 안이 낯설어 잔뜩 겁을 집어먹은 나는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엄마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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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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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웃음소리. 극장 안 어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중에는 우리 부모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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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행복해 보였다. 그때부터 <빅>은 내게 행복을 주는 영화로 각인되었다.
1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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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저자가 처음 선택한 것은 <빅>이었다. 첫 영화관 나들이에서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서 고단함을 지워주었던 그 행복의 실체를 알고 싶었던 저자는 <빅>을 선택한다. 다시 본 영화는 기대보다 더 흥미로웠고 대번에 <빅>에 빠져들고 말았다.
●한날한시 두 편의 빨간 비디오를 보게 되다!
1. 새엄마는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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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계인이 새엄마가 된다는 감동적인 설정에 혹해 하필 그 옆에 19가 그려진 붉은 당구공을 보지 못했다.
2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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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발마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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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평소 나의 장국영 사랑을 알고 있었고 무협 영화의 시퀀스가 칼싸움, 몸싸움, 만두를 두고 벌이는 젓가락 싸움, 전통 악기를 이용한 기싸움 등 인간이 펼칠 수 있는 온갖 싸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편견 때문이었는지 <백발마녀전> 또한 쉽사리 수락해 주셨다.
2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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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딱지가 붙은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보게 된 두 편의 빨간 비디오는 시각적인 충격만큼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고 전한다. 처음 19세 미만 관람불가를 보았던 기억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삶의 비루함을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날 보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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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삶의 비루함을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날이면 맥주 한 잔을 준비한 뒤 홀로 <스모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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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비디오가 나를 구원했다.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며 오기의 사진첩처럼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100~10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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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영화라 불리는 영화가 꼭 하나씩은 있다. 삶을 지탱해 주고, 무료함과 덧없음을 온전히 버티게 해주는 영화. 저자에게 있어 이 영화가 어쩌면 그런 영화가 아니었을까?
●마음이 바닥을 치는 날 보면 좋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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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로 상처받은 제자를 끌어안은 모습을 보고 나 또한 그 말에 상처를 씻을 수 있었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일까? 아니다. 나는 마음이 바닥을 치는 날이면 다시금 <굿윌 헌팅>의 명장면을 찾아본다. 상처받아 해진 마음에는 사랑만큼 훌륭한 처방이 없음을. 폭력 안에서 배운 것은 분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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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선생님들을 떠올릴 때, 로빈 윌리엄스를 빼놓지 않는다.
11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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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스승, 존경할 만한 사람이 꼭 곁에 있는 누구일 필요는 없다. 마음의 안식이 되는 존재가 영화 속 그 누구이면 어떠랴. 이 영화는 명작이라고 손꼽히는 영화 중 하나로 언제 다시 봐도 좋은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 속 로빈 윌리엄스는 모두가 선망하는 스승의 모습 그 자체로, 나 역시도 마음 깊이 담고 있는 영화 중 하나다.
이 외에도 저자는 자신의 삶 많은 부분에 닿아 있는 영화(비디오)에 대해 다양한 에피소드들과 함께 소개하는데, 주성치 영화 <희극지왕>으로 사랑을 배우고, <타인의 삶>은 저자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애정 하는 배우에 대해서도 소개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탁월한 연기만큼 인간적인 신뢰를 주는 배우로 메릴 스트립을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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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픈 사람이 있다면 단연코 메릴 스트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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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한 개도 아까운 엉망진창인 영화라도 메릴 스트립이 등장하면 오로지 그녀의 연기력으로 별 세 개쯤은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이건 생각이 아니다. 단연코 확신한다.
21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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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배우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신뢰할 만한 좋은 사람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열한 살 차이 나는 남동생과의 에피소드도 잠깐 소개되었는데, 동생이 일곱 살 되던 해 함께 본 첫 영화는 <파워퍼프 걸> 이었다고 한다. 서로 취향이 달라 티격태격할 때도 있지만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2008>를 볼 때만큼은 한 엄마의 뱃속에서 나왔음이 여실히 증명될 만큼 단단한 결속력을 보여 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릴 적 형제자매를 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떠올릴법한 에피소드라 공감이 많이 갔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어릴 적 무언가에 빠져 집중하는 것을 보고 어른들은 이를 저지하거나 부정하는 말들을 쉽게 내뱉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반대로 오히려 무언가에 흡족할 만큼 충분히 빠져봤기에 더없이 좋았다고, 그래서 더 다른 것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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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는 마치 마법의 열쇠를 쥐어 주듯 내게 온 세계의 관문을 넘나들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
시간을 낭비했다고 하기에 비디오는 나를 '너무나도' 견고하고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라는 유일성을 지킬 수 있게, 나에게 닥칠 불행에 부서지지 않도록.
10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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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알려주고 윤리적 화두를 제시하고 좋은 어른이 되고자 노력하게 해 준 것은 8할이 비디오였다.
2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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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엿한 어른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도망치듯 달리다 내 발에 내가 걸려 자빠질 때면, 어김없이 비디오 속 인물들을 떠올렸다. 현실에는 생각보다 그럴싸한 조언을 건네 줄 어른들이 많지 않았다. 인생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 비디오를 통해 미리 가 본 세계의 풍경들이 오히려 더 훌륭한 예제가 되어 줬다. 내가 본 것들을 마음에 담아 힘이 들 때면 그것들을 꺼내 먹었다. 비상식량이라도 되는듯.
22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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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들을 통해 저자가 얼마나 비디오를 애정 했는지, 또 비디오가 삶에서 어떤 역할들을 해줬는지 엿볼 수 있었다. 비디오는 마음을 다독이는 스승이자 길잡이였으며, 때론 존중과 사랑을 알려주고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물론 다양한 영화를 통해 온 세계를 누비며 미리 경험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또 차곡차곡 쌓인 비디오 속 예제들은 추후 힘든 순간 달콤한 양식이 되어주곤 했다.
어떤 순간 과거의 무언가를 떠올리고 꺼내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주는 힘에 대해 이토록 당당하게 말하는 자칭 비디오 키드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 흠뻑 빠져들었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좋아하고, 가슴 깊이 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 따뜻하고 유쾌한 이야기들을 통해 함께 공감하고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