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할 수밖에 네오픽션 ON시리즈 5
최도담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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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살인이라는 끔찍하고 섬뜩한 주제를 담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따뜻한 인간애와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어 읽는 내내 깊이 빠져들었던 이 책은 중심인물의 덤덤한 독백과 서로의 이해관계를 차분히 풀어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한 이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그리고 마침내 성사되었다고 마음을 놓은 순간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은 또 어떠했을까? 소중한 이를 한순간에 잃고 남은 이들이 겪어야만 했던 상실과 좌절, 그리고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삶의 고통과 성장에 대해 함께 살펴보면 좋겠다.

 

라경의 불행은 어쩌면 엄마의 재혼으로 잠깐 함께 살았던 새아빠 '이기섭'을 알게 된 시점부터가 아닐까 싶다. 짧은 재혼 기간 동안 이기섭은 엄마를 폭행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데 이것은 라경의 삶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자 복수를 꿈꾸게 되는 계기가 된다.

 

10살의 어린아이였던 라경은 쓰레기 같았던 이기섭으로 인해 엄마를 눈앞에서 잃고, 성폭행으로 인해 심한 불면증과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가슴에 큰 상실감을 안고 할머니와 단둘이서 살아가던 그들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에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기도 하지만 때론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 문제는 늘 회피하는 문제이자 슬픔의 근원이었다.

 

라경은 성장하면서 대체적으로 소극적인 태도와 회피하는 방법을 사용해왔는데, 그러다 서서히 옆에서 항상 적극적이고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친구 지나와 고난을 함께 겪어나가면서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겨나가는 마인드를 갖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복수를 갈망하게 되고 이를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준비하기에 이른다.

 

그녀에게 있어 불행의 시작이기도 한 이기섭을 청부 살인하기 위한 준비는 오랜 시간 촘촘히 이루진다. 어떠한 증거도 물증도 없는 상태로 진행될 수 있도록 라경은 다양한 확률과 가설을 세우며 마침내 이를 실행해 줄 가장 적합한 살인청부업자 '연'을 찾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기섭을 향한 라경의 복수 의뢰는 실행으로 옮겨져 '성공'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나 이내 곧 '실패'라는 메시지와 함께 착수금 일부를 되돌려 받기에 이른다. 자신의 복수는 비록 실패했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이기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형사들은 이기섭의 죽음을 두고 살인과 사고 사이에서 원인을 밝히기 위해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기 시작하는데 이 범주에는 라경도 포함된다.

 

서서히 이기섭의 죽음과 관련하여 진실이 파헤쳐 지기 시작하면서 라경은 미처 자신이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가까이 있던 이들의 깊은 애정과 사랑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복수가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라경에게 있어 삶의 의미를 잃고 결핍된 삶 속에서 복수는 한때 살아가는 힘이자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거스르지 않고 사랑의 힘으로 끌어안고 간 이의 마음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오랜 시간을 멀찍이서 지켜봐 주고 보듬어 안아주며, 마지막을 정리한 이의 사랑과 소중한 마음이 느껴져 먹먹함마저 든다.

 

복수는 허무하리만치 한순간에 끝났다. 그러나 그 죽음에는 많은 이들의 아픔과 상처가 숨어있었다. 복수의 끝에서 만난 '연'과 친구 '지나', 그리고 이기섭의 현 아내 '김지연', 우연을 가장해 다시 재회한 전 남자친구 '준', 비슷한 아픔을 다시금 마주하게 된 학원 수강생 '상하'와 제2의 이기섭인 학원 인기 강사 '박민우'.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각자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제각각의 이유가 담겨있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상실과 결핍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 살아가는 방법 또한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무기력증과 우울감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적극적으로 이를 탈피하기 위해 당당히 맞서는 이들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우리 모두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살인청부'와 '복수'를 다루고 있지만,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악의 집합체였던 '이기섭'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데, 저마다의 방법으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모습들에서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반전과도 같았던 결론은 사랑과 이해를 담고 있어 더 와닿았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어두운 주제에 비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장소와 등장하는 소품들은 딱딱한 사람들의 표정이나 말투와 대조를 이뤄 묘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런 구도들이 주는 긴장감과 미스터리함은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들도록 하는 중독성이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살인을 의뢰하기 위해 방문한 연의 상담소 내부의 벽면에서 발견한 두 개의 액자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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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핑크색의 벽면에 하늘색 톤 캔버스, 녹색의 야자수는 어딘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산뜻했다. 세 가지 색감이 조화를 이룬 벽면이 그나마 사무실에서 생동감을 주는 인상적인 영역이었다.

18~1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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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의뢰비를 지불할 때마다 접속하는 장소가 그러했다. 홍대 앞 카페 '아이보리' - 교대역 '블랑' 카페 - 개인 서재 감성을 담은 책방 '푸른 밤'. 살인청부와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감성 가득한 카페와 서점의 공간은 아늑함과 따뜻함을 선사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의뢰의 공간이기도 했다.

 

세 번째는 '할머니의 십자수'를 꼽을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십자수하면 생각나는 '정성'을 넘어 이 소설에서 십자수는 다중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라경에게 십자수는 어딘가 고리타분하고 피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는 인내의 시간이자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인 동시에 후반부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품이기도 하다. 이후 십자수로 인해 진실을 파악하게 되면서 라경에게도 그 의미가 변하게 된다.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소품이자 할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이러한 소품과 장소들은 '살인청부'와 '복수'라는 주제와 맞물려 일상의 평범함과 사랑을 더 부각시켜 주는데,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복수극이나 살인을 다루는 소설들과는 달리 피 튀기는 끔찍함이나 섬뜩한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속 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야기는 복수를 위한 살인청부라는 주제로 시작되지만 그 과정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들의 삶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꼬여있는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관계를 재정립하고 서로의 이해관계를 마주 보면서 가족, 친구, 사랑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위로와 위안을 건넨다. 특히 라경의 독백을 통해서 전해지는 문장들은 큰 울림을 전하는데 우리 삶에서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삶, 놓치고 있는 것의 가치,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들을 통해 우리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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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 알고 있는 나와 알지 못하는 나, 그 사이의 간극은 얼마나 깊은 것일까. 누군가 알고 있는 나와 알지 못하는 내가 있다면 어디에 서 있는 내가 진짜 나일까. 그 간극을 오가는 내가 진짜 나일까. 서로를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결국 '보여지는 부분'을 안다는 말이다. 상대에게 '보여준 나'를 알고 있을 뿐이다. 지나는 살인자가 될 수 있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내가 보여준 적이 없으니.

36~3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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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그 무언가를 위해 현재를 버티는 것이 얼마나 피로한 일인지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는 삶은 알차지만 고되다. 목적에 묶이면 다른 부분은 암흑이 된다. 미래 속으로 현재를 구겨 넣어야 한다. 버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들이었다.

5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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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통에 매몰된 인생은 타인을 돌아보지 못한다. 나의 고통 너머를 보는 삶. 이제 달라진 삶을 살 수 있다는 징조를 읽는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5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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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오롯이 현재만의 것이 아니다. 과거의 순간순간이 현재로 오고 미래로 간다. 과거가 과거로써 남으려면 제대로 된 끝을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때를 놓치지 않는 매듭이다. 적정한 매듭이 지어진 과거만이 과거로 남는다.

6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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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살아가는 것,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무겁지만 회피해서는 안 되는 삶의 이면들을 이 소설을 통해 함께 고민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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