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희 - 난설헌의 사라진 편지, 제42회 여성동아 장편소설상 수상작
류서재 지음 / 파소출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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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다양한 책을 읽어왔지만, 우리나라 역사서에 기록된 이들에 대한 위인전은 생각보다 많이 접해보지 못한 것 같다. 그저 초중고의 기본 교과과정을 통해 듣고, 배워온 겉핥기 식의 정보만 알고 있을 뿐이다. 특히 역사 관련해서는 암기 위주의 교과과목 중 하나였기에 특별히 재미있거나 흥미를 가지진 못 했던 것 같다. 그래선지 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내용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특히 더 박하게 대했던 것 같다. 

 

그러다 성인이 되면서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역사 부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일부러 전시회나 박물관 등을 찾아가거나 책을 읽는데도 거리낌이 없다. 흥미가 생기고, 재미가 붙으니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게 되는 내용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 책을 선정한 이유도 그러한 흥미와 궁금함이 한몫했는데, 무엇보다 한국사에서 여성으로서 이름을 널리 알린 몇 없는 인물 중 하나임에도 생각보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소설이기는 하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인물을 바탕으로 쓰인 글이기에, 약간이나마 엿보고 싶은 궁금증이 일었다.

 

조선 중기 5문장 가로 유명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8살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지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일찍이 27세에 요절한 허초희. 우리에게는 허난설헌으로 더 잘 알려진 그녀의 일생과 그녀가 남긴 시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이 책에서 그녀의 기구한 삶은 물론, 그녀가 남긴 다양한 문장들로 만나볼 수 있었다.

 

팩트 위에 허구가 실려있지만 그녀가 짧은 생 동안 겪은 시집살이나, 허 씨 일가의 글에 대한 재능, 그들이 나눈 시문들은 거짓이 아니기에, 보는 내내 대견함과 먹먹함이 동시에 일었다. 특히 더 여성에게 가혹했던 조선시대, 온 가족이 문장가이며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났음에도 제대로 실력을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한순간에 생을 마감하게 된 그녀의 삶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녀 부모님의 만남부터, 출생, 어릴 적 모습, 첫사랑, 결혼과 시집살이, 마지막 순간, 그리고 허균이 그런 누이의 글을 모아 출간하기까지의 여정이 담겨 있는 이 책을 통해 그녀의 삶과 더불어 찬란했던 문장들을 만나보길 바란다.

 

허초희는 조선 중기 문(文)으로 유명한 집안의 딸로, 아버지 허엽, 맏형 허성, 둘째 형 허봉, 셋째 허난설헌, 막내 허균까지 5명 모두가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면서 5문장 가로 불리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맏이인 허성에 대한 내용은 많이 언급되지 않는데, 책을 읽고 나서 찾아보니 실제 허성은 유일한 이복형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 속에서는 둘째 허봉과 허균이 주로 등장한다.

 

초희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뒤주에서 책을 읽다 잠드는 등 유난히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아마 집안사람들 모두가 유난히 책을 읽거나 시문을 쓰는 것을 즐겨 했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더불어 이러한 딸의 행동에 있어 제지를 하기보다 오히려 아들과 동등하게 대해주는 집안 분위기도 한몫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분제에 엄격하고 여성과 남성을 같은 선상에 두지 않았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오히려 허 씨 집안의 이러한 모습들은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때 이상하게 여겨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딸임에도 글을 쓰고 읽는 것은 물론, 마음껏 서책을 읽도록 독려해 주고 아이가 쓴 글을 어떠한 편견도 없이 인정과 칭찬을 해주는 점들이 그렇다. 더불어 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스타일을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아버지 허엽과 어머니 김 씨 부인의 육아 방식도 남다르게 느껴진다. 

 

초희는 당시 여성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남성들만이 갖는 다른 이름을 갖고 싶다 아버지에게 조르기도 하는데, 허엽은 이를 너무나도 쉽게 허하여 준다.

 

당시 남성들은 태어날 때 지은 이름, 어릴 때 부르는 별호, 어른이 되는 자, 시를 짓게 되면 시호, 혼인하면 짓는 당호, 벼슬을 가지면 갖게 되는 이름 등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되는데, 반면 여성들은 부르기 쉬운 이름을 짓거나 고향을 이름 삼아 짓는 이름(예: 청주댁, 금산댁), 김 씨 부인, 이 씨 부인 이라고 성을 이름으로 대신 부르거나 자식을 낳으면 누구 어머니라는 식으로만 불리는 점을 언급하며 관례를 치른 남자처럼 '자'도 갖고 싶다고 말한다.

 

이에 아버지 허엽이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며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인데, 얼마나 딸을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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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엽: 글자를 알면 생각을 가지게 되고 생각을 가지게 되면 상대방에게 따지게 되어 있다. 여자는 시시비비를 따지면 안 되느니라. 그게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다.
초희: 남자들의 생각이겠지요. 그건 옳지 않아요.
허엽: 그래? 옳지 않다면 바꾸어야지.
초희: 아버지. 지어주세요.
허엽: 이름을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오직 집안사람들만이 네 이름을 부를 것이다.
초희: 나중에는 세상 사람들이 부르게 될 거예요.
허엽: 하하하. 먹을 가는 것보다 네 말을 듣는 것이 더 후련하다. 시름이 없어졌어.

129~13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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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엽은 '난설헌(난설은 고결하고 뛰어난 문재를 가진 여자를 의미)'이라는 시호를 지어주고, 후원에 방을 따로 마련해 주는 것은 물론, 난설헌이라는 당호까지 써서 처마 밑에 달아준다. 더불어 '자'는 스스로 지어보라며 권유하고, 중국 시인 번부인의 이름을 딴 '경번'이라 지었다는 말에 좋다는 말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어머니 김 씨 부인도 딸 초희에게 '난설헌' 글자가 새겨진 은 수저를 주며 응원을 아끼지 않는데, 밥 먹일 걱정을 먼저 하며 서책 속에 빠져들어도 끼니를 거르지는 말라며 염려하는 마음을 내보인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허엽은 문(文)에는 차등이 없다며 좋은 스승도 초희에게 붙여준다. 서자이지만 추후에 문제가 되지 않을 사람으로 이달을 초희의 스승으로 붙여준다.

 

초희는 그렇게 어릴 때 아버지와 형제들의 틈에서 서책을 접하고 읽고 쓰면서 자연스럽게 문(文)을 접하게 되고, 스승인 이달과 남동생 허균을 통해 보다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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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운문도 압축된 산문이지. 모두 이야기이다. 허나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이야기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 스님이 일상생활에서 깨달음을 얻듯이 순간적인 느낌을 잡아라. 그것이 화두를 놓지 않는 의식이다. 그러니 생각하기에 게으르지 마라. 가야금 줄처럼 적당히 팽팽하고 좋은 긴장은 몸에 이로우니. 몸에도 현이 있다.  줄을 잘 고르고 음을 내라. 너는 문자로 음을 내야 할 것이다.

스승 이달의 가르침(137~13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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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문장가의 네 명의 아이들은 각기 성격과 스타일이 남달랐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특히 허균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허균의 사상과 그의 문필 스타일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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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나는 성현의 말을 인용하지 않고도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글을 쓰겠어. 여름 장마처럼 거세고 파도처럼 분연히 일어서는 문장으로 말이야.

19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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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더더기 없고 힘 있는 문체의 글이 허균이라면, 섬세하고 그림을 그리듯 화려한 컬러가 입혀진듯한 초희의 글에서는 읽는 것만으로도 절로 상상이 덧대어지는 힘이 있었다. 특히 연작시를 많이 쓴 그녀는 유선사에서 신선세계를 통해 자신이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꿈들을 담아내곤 했는데, 사실적 표현과 풍부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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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깔린 높은 산봉우리에 부용꽃이 촉촉하고
붉은 언덕 구슬 나무는 이슬에 젖어있네.
경판각 염불 마친 스님은 선정에 들고
재 끝낸 법당에는 학도 소나무로 돌아가네.
넝쿨 우거진 오래된 벽에는 도깨비가 울고
안개 낀 가을 연못에는 촉용이 누워있네.
밤이 되며 향 등은 돌을 밝히고
흐린 달 동쪽 숲에는 종소리만 울리네.

<차중씨견성암운> 둘째 오빠의 <견성암> 시에 차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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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끈 풀어내어 비단 치마를 매고
설도가 만든 담황색 종이 열 폭에 파란 구름을 염색하네.
천 년 옥청궁 단 위의 약속
웃으며 세 마리 새를 날려 양군에게 부치네.
<유선사 86> 신선세계에게 노니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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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녀는 스승님을 통해, 또 허균과 무륜당이라는 세상을 통해 점차 자신만의 문장을 발전시켜 나가던 중 무륜당에서 어울리던 왕 견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중 모함에 빠지면서 그녀를 짝사랑하던 김성립과 그의 아버지 김첨의 농간에 휘말리면서 마음에도 없는 김성립과 혼례를 올리게 된다.

 

자신보다 뛰어난 文을 가진 아내에 대한 무력감, 계속해서 떨어지는 과거시험, 그럼에도 자신이 돋보이기를 원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김성립과 며느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시어머니 송씨 부인 속에서 모진 시집살이를 하던 초희. 기생과 바람나 후처를 데려와도 그저 여자이기에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던 삶을 오랜 시간 견디며 살아간다.

 

어디 한군데 마음을 둘 곳도, 기댈 곳도 없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시집살이 속에서 세 아이마저 잃으면서 몸도 많이 허약해지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 허엽은 실종되고, 임금에게 올린 상소로 인해 역모로 몰린 둘째 허봉은 유배후 사망했음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모든것을 내려놓은 초희는 어느 날 잠자듯 그렇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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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얼굴을 보세요. 병자의 얼굴이 아닙니다. 사람의 몸은 병에 걸리면 괴로워하게 되어있는데 저 얼굴에는 병색이 없습니다.

43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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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자신이 쓴 시를 모두 불태우려 했던 것을 가까스로 마동이 일부를 건져냈는데, 모든 세상의 미련과 끈을 놓아버린 그녀였기에 어쩌면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쓴 시도 모두 태워버리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는 듯 평온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어쩌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사랑을 받으며 마음껏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며 살았던 그녀였기에, 새장에 갇혀 사는 듯 갑갑한 시집살이는 어쩌면 더 모질고 고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한순간에 사랑하는 이를 잃고, 사랑하는 친정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세 명의 아이들도 하늘나라로 보내고, 그나마 마음 풀 시마저 쓸 수 없게 되면서 모든것을 놓아버린 그녀의 삶. 27세의 젊은 나이는 그래서 더 안타깝고 먹먹하게 다가왔다.

 

실종된 아버지를 찾다가 뒤늦게 누이의 죽음을 알고 찾아온 허균이 그런 누이의 시문들을 거두어 서책을 내고자 명나라까지 간 것은 어쩌면 그런 누이의 한을 풀어주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천재 화가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였던 허난설헌.

 

실제 허균에 의해  발행한 그녀의 문집은 당대와 사후에 명나라와 일본에서 크게 인정받았으나 조선과 중국 양국에서 오랜 기간 표절 의혹이 존재해 왔다고 하는데, 그녀의 삶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대조적이었던 어린 시절과 결혼생활, 어쩌면 그녀가 남긴 시화들은 그녀가 품고 있던 마음의 소리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의 작품들을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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