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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정세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2년 9월
평점 :
일상 속에서 만나볼법한 7가지 소재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각 단편들은 어딘가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뉴스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나볼법한 주제에 상상력을 덧대어 들려주는 이야기같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속닥속닥 소곤소곤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래서 마냥 허무맹랑하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꾸 더 귀를 기울이고 몰입하여 듣게 된다. 그러다 보면 한 편을 순식간에 독파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내용이 가볍거나 허술하진 않다.
특정 상황이나 인물에 집중에서 주로 전개되는데, 상황적 묘사가 탁월하게 펼쳐져 있어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흠뻑 빠져들어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다음에는 내용이 어떻게 흘러갈지 숨죽이며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이야기의 끝에 남는다.
생각지 못한 기발함에 놀라기도 하고, 한 번쯤 꿈꾸어봤던 일에 나의 생각을 덧대어 보기도 한다. 더불어 행운과 불운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며, 어떤 절실함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최근 들어 많이 거론되는 환경과 지구에 대해, 아동폭력과 범죄에 대해, 희귀질병에 대해 단편 속 이야기를 통해 상상과 생각을 버무려 하나씩 곱씹어 보게 된다.
주제는 중하지만, 무겁지 않게 전개되어 이 소설을 쓴 재담가인 저자의 필력이 남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는데, 첫 번째 단편에서는 유괴범의 색다른 제안과 재치가 엿보였고, 두 번째 단편은 삶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라 기억에 남았다.
1.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어느 부잣집의 아이를 유괴한 유괴범은 집에 찾아가 1억 원을 당당히 요구한다. 이후 부모에게 1억 원의 가치가 될만한 치명적인 비밀을 추가로 요구하는데 생각지 못했던 아이의 부모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헛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 부부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을 1억 원이라는 돈과 치명적인 비밀을 요구하는 의문의 납치범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통쾌하면서 기발한 유괴범의 이야기를 만나보길 바란다.
2. 인터뷰
투자계의 전설이라고 말하는 거물의 인터뷰를 하게 된 한 기자의 단독 인터뷰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가 한 번쯤 상상해 봄직한 주제를 담고 있다.
애널리스트인 강인욱 대표는 투자계의 전설로 10년 전 혜성처럼 등장해 주가의 흐름을 귀신같이 파악하는 스트래티지스트(투자전략가)로 불린다. 증권가에서는 예언가란 별명까지 얻은 그가 '나'를 지목하여 인터뷰를 자청하는데, 거기서 그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자신은 현재 나이가 3만 살이 넘었으며 이번이 3050번째 인생을 리셋했으며 매해 2019년이 되면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는 무한 반복을 지속하고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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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후회 없어? 만약 과거로 돌아가면 다른 선택으로 바꾸고 싶은 미래 같은 거."
4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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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수없이 되풀이해서 살고 있다는 그의 고백이 처음에는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불쾌하고 어이없게 느껴지지만, 차츰 진실인지 거짓인지 혼란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온 기회가 행운이라 생각했던 그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찜찜하고 불쾌한 기분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때로 과거의 언제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때 이랬다면'이라는 가정을 하며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해 상상하거나 후회를 하며 남은 인생을 소비할 때가 있다. 이 순간 현재의 귀함과 소중함을 놓치고 일어나지 않았거나, 이미 놓쳐버린 일들에 더 집중하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매해 수없이 10년을 되풀이하며 사는, 모든 삶을 기억하는 강대표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한다.
후회하지 말라고, 별거 없다고.
3. 어쩌면 운이 좋아 우연처럼
운이 좋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행운이 오면 곧바로 불행이 닥치는 일상을 살고 있는데, 행운에 비례해 불운도 함께 오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게 된다. 불행을 적게 맞아들이기 위해 이제는 제대로 된 삶을 포기하고, 행운마저도 피해 가기 위해 노력하던 그의 앞에 어느 날 계약 종료를 앞둔 계약직 여직원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운과 삶을 다시금 걸어보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4. 도적
일찍이 작가로 성공의 맛을 본 그는 현재는 잊힌 퇴물 작가가 되어버렸다. 유행을 따라가지도, 아이디어가 기발하지도 않아 자신보다 못했던 작가들이 점차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며 부러워하는 날들을 보내던 중 우연히 자고 일어나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두 세계를 오가며 살인은 물론, 남의 작품을 훔쳐 자신의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서슴지 않게 된다. 이로 인해 다시 과거의 광명은 물론, 최고의 핫한 유명인이 된 그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사랑은 물론 타인의 작품을 훔치는 도적이 된 그.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5. 산 자들의 땅
이유 모를 이유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도시는 더 이상 인간이 살 수 없는 황폐한 땅으로 변해버렸다. 방사능 오염지역 출입통제 경고문이 붙은 도시 속에서 사내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귀중품을 대신 수고해 주고 일정 금액의 수수료를 받아 생활하는 살고 있다. 병들고 나약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그는 병든 아버지가 그린 그림을 누나에게 보내고, 누나는 그 그림을 판 수익금으로 살아가고 있던 중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누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홀로 남은 그가 유일하게 아버지가 남긴 완성 작품을 보며 마무리되는 이 스토리는 어딘가 씁쓸함과 고독이 느껴진다. 더불어 대비되는 상황들의 배치가 마치 흑백과 컬러의 그림같이 느껴진다. 이미 죽은 황폐한 땅에서 산자들을 위해 일하는 사내,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의 유명세를 이용해 자신의 생계를 연명하려고 닦달하는 누나, 사람들이 모두 떠난 땅의 요양원에서 돌아갈 곳이 없는 노인들을 돌보며 살고 있는 부탄에서 온 외국인 여자의 모습들은 대비되는 여러 단어들을 연상시킨다. 살 수 없는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산자들의 삶은 마치 황폐하고 메마른 가지 위에 한 송이 꽃을 피운 그림을 연상시킨다.
6. 나를 버릴지라도
어느 날 갑작스레 영문도 모르고 납치를 당한 해영과 은별은 어느 외딴섬으로 끌려들어와 노예처럼 부려진다. 밤이면 부엌 한편에 감금당하고, 낮이면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폭력과 학대를 당하던 중 빈틈을 노린 탈출 시도를 계획한다. 하지만 이는 곧 실패로 끝나고 모진 폭력을 당하고 우물에 갇혀 있던 중 갑작스레 나타난 두 사내로 인해 두 아이는 무사히 섬 밖으로 탈출하게 된다.
기적이 필요한 순간, 짠하고 나타나 도움을 주는 미스터리한 강사장과 동철의 이상한 면접, 그리고 섬에 아이를 납치해 노예처럼 부리는 불건전한 이들의 행태와 모습, 살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는 아이의 감정을 디테일하게 만나볼 수 있다. 보는 내내 숨죽이며 탈출을 응원하게 되고, 배 위에서 엄마를 발견한 아이가 '엄마'를 부르는 모습에선 어딘가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7.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지만 나의 시간은 멈췄다
열여덟 살의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 피부와 뼈의 성장이 멈추고 외관상 늙지 않는 선천적 희귀질병,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고 있는 나. 이 희귀병의 평균 수명은 30살이다. 외모로는 여섯 살 남자아이로 보이지만 이제 곧 만으로 열여덟 살로, 내년 2월이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보육원에서 퇴소 후 사회에 내보내질 예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족이란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문득 한번 가져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같은 보육원 출신의 영아 일시보호소의 입양을 담당하는 사회복지사인 봉팔이형에게 정상 입양이 안되는 가정에 여섯 살 남자아이로 서류를 위조해 입양을 할 수 있도록 요청한다. 어차피 목적이 있어 입양을 하는 가정이므로 조만간 파양할 가정에 잠시 기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상 입양이 안되는 가정에 여섯 살 아이로 서류를 꾸며 입양에 성공한 '나'는 나름대로 만만의 준비를 갖추고 새로운 가정에 입성하게 되는데, 첫날부터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그 위기를 통해 과연 그는 그토록 알고 싶었던 가정과 가족에 대한 감정을 알게 되었을까? 이 이후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는 단편 스토리였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상상력과 기발한 아이디어의 결합은 예측이 불가능해서 더 흥미진진하다. 다음을 외치게 되는 스토리텔링의 흡입력이 순식간에 한 권을 완독하게 만든다. 미묘하고 신비스러운 인물 등의 등장은 이야기를 다채롭고 풍부하게 해주는데, SF나 판타지가 아닌 현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재의 이야기들이라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긴 호흡이 아니라도 어느 순간 어디에서든 몰입도 있게 펼쳐볼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잠자기 전, 출퇴근 시간, 남는 점심시간을 활용하여 잠시 이 책 속으로 빠져들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