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보는 사람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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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이건 네 몫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얼른 편집자에게 책을 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슨 이런 걸 소설로 쓰는 인간이 있나 싶은 마음이었는데 어느새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역자 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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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공감 가는 후기가 아닐 수 없다. 첫 장을 읽고 난 후의 반응, 그리고 나도 모르게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나의 모습도 딱 이러했다. SF 소설 장르를 처음 접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어렵고 괴상하다 느껴지는 단어와 표현들이 좀처럼 이해가 안 되어 첫 장을 읽으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읽는 방식을 좀 달리해보면서 페이지가 나도 모르는 새 쓱쓱 넘어가고 있었다.

 

보통은 책을 읽으면서 공간과 이미지를 그리면서 읽는 편인데, 아무리 상상을 해보아도 도통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아 일단 그냥 '이해'보다 '읽는 것'에 집중했다. 여태껏 읽었던 그 어떤 SF 소설보다도 하드코어적이었고 상상할 수 없는 기괴한 내용들이 담겨 있어 때론 등장하는 인물들조차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단편에 등장하는 각 인물들 역시도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 정의가 모호해 사람을 지칭하는 방식도 다양했고, 실제 살아있는 사람인지, 기계인지, 가상 인간인지 혹은 남녀 구분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배경의 주 무대는 대체로 우주였는데, 어떤 소설은 영화 승리호의 장면이 비슷하게 그려지기도 했으나, 그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짐작이나 개념이 명확하지 잡히지 않았다. 그저 불가사의했고, 때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듯 선명하게 잡히지 않는 파편들 속에서 축축하고 파괴된 현장 속에 혼자 덩그러니 떠도는 느낌들이 가득했다.

 

이처럼 이 책은 최초의 하드 SF를 담고 있는 컬렉션으로 기존 SF 소설보다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그래서 처음에 접할 때는 어렵거나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는데 신기한 건 단편 하나의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나면 어려웠던 이야기 하나로 정리가 된다. 이해하기 어려운 각종 논리와 과학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훅 잊히고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진짜'이야기가 톡 하고 튀어나온다. 정신없이 휘말리는 사이 페이지는 쓱쓱 넘어가 하나의 단편은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가 되고, 또 다른 이야기가 같은 과정으로 나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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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SF란?

같은 SF 중에서도 특히 과학적 정합성을 중시하는 하위 장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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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렵지만 어렵지 않은 책이라는 사실을 독자는 금방 알 수 있다. 사람 사는 이야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든 그냥 믿고 따라가면 된다. 그 세계에 흘러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작가가 말하는 이야기의 정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마침내 '이런 이야기였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읽는 내내 과학적 설명들로 인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고 느끼거나, 어렵다 느껴진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한 과학적 설명들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해도 이야기의 재미나 스토리를 파악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읽어나가면 어느새 판타지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 이 점이 이 책의 매력이자 가장 의아한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매혹적이고 특별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에 있어 저자와 역자는 "계산기를 이용하거나 그림을 그려가며 읽길 추천하는 책"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림을 그려가며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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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일단 독자를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이야기 처음에서 그 세계의 설정, 즉 규칙을 설명한다. 그 후에는 역시 논리를 증명하는 식이다. SF에서는 이 세계에 없는 상식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한다.

373페이지 역자 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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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하드 SF 장르에 한번 도전해 보면 어떨까? SF 장르와는 또 다른 매력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SF 장르를 접해보지 않았거나 궁금한 사람들도 하드 SF 장르에 도전해 볼 것을 추천한다. 이 세상에 없는 세계와 이론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펼쳐지는 신비한 경험을 맛볼 수 있다.

 

단편이지만 특이하게 이 단편들 중간중간에는 각 이야기들을 연결시켜주는 선생님과 소녀의 대화로 추측되는 대화가 곁들여 있다. 각기 다른 7편의 스토리가 실려있지만, 이 대화를 통해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대화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각 단편들은 선생님이 소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 대화를 통해 앞 이야기의 내용들을 정리해 주는 것은 물론 생각해 봐야 하는 주제에 대해 짚어주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뒷이야기에는 어떤 스토리가 담겨있는지 살짝 소개해 주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스토리를 접하기 전에 미리 어떤 스토리인지 추측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7개의 단편에 담겨있는 내용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이야기>
기묘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방랑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두번째 이야기>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는 이야기이자 바라는 바를 이루는 이야기이다. 중간에 많이 생략된 총통과 카리야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스토리이다.

 

<세번째 이야기>
희망이 없는 뒤집힌 세계에서 희망을 잃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 사람이 잃은 것과 얻은 것의 이야기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뒤집힌 세계가 진실이라고 믿고 살았던 사람들이 비밀을 발견한 순간, 그 모든 게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행복할까? 아니면 허망할까? 

 

<네번째 이야기>
거짓 세계에 사는 남자의 모험 이야기가 담겨있다. 블랭크(외모/이름/성별 등이 없는 상태)와 이야기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남자는 우주선에 탑승하고 있는 수백 명 중 한 명이다. 탐정인 그가 어느 날 의뢰를 받게 되면서 동면상태로 잠들어 있는 우주선 승객들을 대상으로 세계의 붕괴를 막기 위해 펼치는 모험담이 실려있다.

 

<다섯번째 이야기>
미아가 된 소년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누나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이야기인데 그는 세계를 똑바로 보고 결국 그 비밀을 풀어낸다. 소년의 용기에 가득 찬 일족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소년의 입장에서 보는 관점과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는 입장의 현격한 차이가 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반전의 묘미를 감상해 보길 바란다.

 

<여섯번째 이야기>
영원한 사랑에 둘러싸인 소녀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바닷가 마을에 사는 아이와 산 마을에 사는 아이는 중력도 시간도 풍경도 모두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한쪽은 느리게, 또 다른 한쪽은 빠르게 흘러가 같은 시간도 다르게 나타난다. 서로 다른 마을에 사는 소녀와 소년은 서로 호감을 느끼게 되는데, 멀찍이서 바라보던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가슴 아픈 한편 애틋하게 다가오는 소설이었다.

 

<일곱번째 이야기>
모든 끝과 시작의 이야기이다. 끝이 곧 시작이고, 시작이 곧 끝인 이야기인데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 시작과 끝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묘하지만 독특한 발상과 아이디어로 그려지는 SF 세계지만 이 이야기들에는 사람 이야기와 사랑 이야기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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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은 상대적이지만, 사람은 반드시 분별해야 해.
사람이 사람으로 있으려면 사람 안에서 살아야 해.
선악은 사람들이 결정해.
사람들과 함께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따라야지.
만약 사람이 사람으로 계속 있고 싶다면.

11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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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은 자신에게만 보이지.
타인은 보고 싶은 자신만 봐.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어.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야.
그래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 수 있을 거야.
흐린 구석 하나 없는 맑은 눈으로, 왜곡이 없는 세계를 보는 것.
솔직한 마음으로 물으면 세계는 틀림없이 말을 걸어 줄 거야.

211~21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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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는 끝만 신경 쓰지?
어떤 시작은 무언가의 끝이지.
아침이 밤의 끝이듯.
봄이 겨울의 끝이듯.
끝나지 않으면 시작도 없지.
영원함이 시작될 때 우선 거기에는 끝이 있어야만 해.

30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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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장르를 만나 새로운 책 읽기 방식을 또 하나 배워본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하드 SF 이야기 속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엿보는 건 어딘가 묘한 짜릿함과 흥분을 야기한다. 이과적 속성으로 풀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문과적 속성의 이야기는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 같지만 하나로 통합되는 놀라운 흡입력을 보여준다. 어딘가에 편입된 시선, 선입견, 틀을 벗어나 '무'에서 다시 바라보는 세상은 여태껏 알아오던 세상과는 매우 많이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종일관 황폐함 속에서 펼쳐지는 각 단편들은 연속성과 또 다른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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