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
이자혜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과 표지 디자인에서 풍겨져 나오는 느낌은 어딘가 모르게 간절함과 성스러움이 느껴진다. 주인공 밀알의 이름과 '양식을 주시옵고'는 그래서 더 찰떡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절실하고, 가장 원하던 순간에 맛보는 미식의 세계! 맛있는 것, 배부르게 먹는 것, 새로운 것을 맛보는 것. 이 책에는 이 모든 순간들이 담겨있는데, 한 번쯤 현실 속에서 겪어봄직한 에피소드들과 엮어있어 흥미롭고 공감 가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무채색의 세상 속에서 유독 유채색으로 시선을 끌던 수많은 음식들이었다. 이 음식들은 밀알의 성장담과 환상과도 관련이 깊은데, 도장 깨기 하듯 하나하나 새로운 음식들을 맛보며 보이는 표현들은 어딘가 웃음이 나기도 하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어 다음에는 어떤 음식을 먹을까 은근 기대가 되기도 한다.

 

친구 없고, 가난하고, 어리숙하고, 허접하고, 덕질하는것을 낙으로 사는 한밀알. 서울 상경 이후 취준생으로 사는 삶은 퍽퍽함 그 자체다. 살기 위해 먹고, 돈을 아끼기 위해 맛은 포기한지 오래. 그래서 그녀의 삶은 무채색 일색이다.

 


 

그러다 식당 근처를 지날 때면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식욕이 폭발한다.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들은 저마다의 맛과 비주얼로 한밀알을 유혹하지만 그저 모두 그림의 떡인 셈.

 


 

취직은 맘처럼 되지 않고, 거듭되는 실패에 좌절하는 날이면 4캔에 만원하는 맥주로 쓰린 속을 달래곤 한다.

 


 

그러다 드디어 고대하던 취직에 성공하고 출근하는 길은 어딘가 설렘반 두려움 반으로 두근두근한다. 여기서 특히 공감 갔던 내용의 작화와 글귀에 웃음이 터졌는데, 구직상태에서는 취직만 되었음 좋겠다 하고 간절히 바라지만, 막상 사회의 일원이 되면, 마음속에 독기와 사표를 품고 하루하루 버티는 직장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드러나있어 웃픈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어 제대로 먹거나 돈을 쓰는 것에 궁색했던 한밀알은 점차 돈을 쓰는것과 어른이 되는것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어른스러운 '음식'과 '물건'으로 표현되는데, 주로 많이 다뤄지는 것은 '음식'으로 그 외에도 향수나 주식투자, 데이팅앱 이용 등을 통해 어른이 되기 위한 그녀의 고군분투가 이어진다.

 


 

여기에도 직장인들이 공감할 만큼 내용들이 엿보이는데, 사치품이나 품위유지를 위해 혹은 어른의 생활을 위해 쓴 지출로 인해 느끼는 양가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한걸음 더 성장했다는 생각에 느끼는 만족감, 다른 한편에는 큰 지출로 인해 느끼는 약간의 후회와 허망함 같은 것들을 한밀알의 독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부분도 발견할 수 있는데 출근하기 싫어하는 직장인의 모습을 '미지근의 녹아내리는 모습'을 통해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취준생에서 사회 초년생으로 그리고 사회에 적응해 가는 한밀알의 리얼한 성장담이 큰 틀이지만, 디테일한 설정들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요소다. 그녀가 최근 입덕한 애니메이션의 미청년들을 엮어 BL 연성을 보며 망상하는 장면들은 묘하게 그녀의 삶에 녹아들어 은근한 영향을 끼친다. 자신의 월급으로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향수를 좋아하는 BL 캐릭터들에 대입해 구매하기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으며 BL 캐릭터의 성격이나 이미지를 그려보기도 한다. BL 연성을 통해 온라인으로 알게 된 미지근과 직접 만남을 가지며 처음 스시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공통적인 취미생활을 공유하기도 한다.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누구나 겪는 좌절과 어설픔. 먼저 겪은 팀원이나 선배들을 통해 얻는 배움과 동경. '처음'의 순간에 겪는 환희와 행복감. 하나씩 넓혀가는 세계와 경험하는 만큼 무던해지는 감정들.

 

한밀알의 환상은 음식과 덕질에서 최고조에 이르는데, 이 만화를 읽는 동안 한밀알이 되어 함께 그 순간순간의 상황과 감정을 함께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멋모르고 따라 하는 어설픈 몸짓과 추해 보이지 않기 위해 힐긋거리며 타인을 훔쳐보고 배우는 행동들, 어른 되기에 심취해 가랑이 찢어지는 줄 모르다가 대가를 치르던 일들. 이 모든 것들은 어쩌면 어른이 되기 위해 다채로운 음식만큼이나 다양하게 겪어야 했던 과정이 아니었을까?

 

 

온통 무채색의 세상 속에서 오직 유채색을 띠는 것은 음식뿐이다. 종류도 맛도 가지각색인 눈과 귀, 입이 열리는 음식에는 그만큼 다채로운 색이 입혀진다. 하지만, 단순한 끼니에는 아무런 색채가 없다. 먹는 것의 의미 혹은 그 이상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음식마다 담겨있는 의미와 감각들은 군침을 돌게 하고, 맛을 음미하게 하며, 향을 상상하게 한다.

 

 

첫 직장 첫 회식에서 먹은 음식, 우연히 혼자 들른 혼술집에서 먹은 안주,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와인, 퓨전음식점에서 처음 먹은 이색음식,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즐겨보는 차 등 미식은 그저 배를 채우는데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미식 만화 속에서 인생과 맛을 배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