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레슨 인 케미스트리 (체험판)
보니 가머스 / 다산책방 / 2022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샘플북으로 미리 만나본 <레슨 인 케미스트리: Lesson in Chemistry>. 전체 내용을 확인할 수 없어 아쉬울 만큼, 일부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살짝 엿본 샘플북으로 확인해 보건대, 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 해석보다는 다중의 의미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1)주인공이 화학에 남다른 열의와 능력이 있었던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단순한 해석으로 풀이도 가능하지만, 2)주인공 엘리자베스와 연인이었던 캘빈과의 대화들이 실려있는 에피소드들에선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화학반응. 즉 비슷한 듯 다른 둘의 모습을 통해 강하게 끌리는 감정으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3)어쩌면 화학적 성질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엘리자베스라는 사람을 통해 일어나는 어떠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한 단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요리조차도 화학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던 그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고, 여성들의 이야기이며, 과거와 현재를 담고 있는 이야기라 더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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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에게 요리란 그저 여성의 일로 정해진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가 캘빈에게도 말했듯, 요리는 화학이었으니까. 실제로 요리란 어딜 봐도 화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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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딸아이의 도시락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1950년대 화학 분야에 유능했던 한 여성의 삶에 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사회적으로 여성의 인권이 보장받지 못하던 시대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잘 드러나 있는데, 여성교육의 박탈과 성차별이 난무하던 시대의 모습들을 여성의 눈과 남성의 눈 모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박사과정 졸업을 열흘 앞두고 억울하게 박탈당한 엘리자베스의 삶은 학교나 직장, 그 어디에서도 순탄치 않게 흘러가지만 그녀는 당당하고 씩씩하게 삶을 이끌어간다. 

 

그녀의 몇 가지 행보를 보면 선구자적인 모습이 엿보이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있다. 지도 교수의 성폭력 앞에서 연필을 그의 배에 꽂아버리는 행동으로 맞대응함과 동시에 스스로 상황을 벗어나는 주체적인 행동을 한다던가, 동거가 금기시되던 시절 연인과 동거를 선택하는 과감한 행동을 보인다. 그녀는 연인 사이에서도 움츠러들기보다는 여성으로써 겪는 불평등함과 차별에 대해 명확하고 당당하게 주장함으로써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자 한다.

 

샘플북에 실려있는 스토리는 주로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연인이었던 캘빈에 대한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그들의 대화는 감각적이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시대적 배경과 맞지 않는 둘의 생각과 행보는 어쩐지 이방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남들이 어떻게 보고 행동하든 신경 쓰지 않는 그들만의 세상에서 둘은 평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대한다. 좀 더 우월한 조건을 가진 자가 자신이 가진 조건을 활용하여 상대방을 슬쩍 같은 선상에 올려둠으로써, 둘은 같은 것을 경험하고 공유한다. 그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람 대 사람, 화학자 대 화학자로써 서로를 대하면서 일적으로나 사적으로 많은 시너지를 일으키는데, 이는 타인의 입장에서는 심한 질투가 날 만큼 반짝이는 모습이었다.

 

두 연인이 하는 대화를 살펴보면 남녀 관점의 차이와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로웠는데, 특히 성차별에 대한 부분은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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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물품 지원받기가 왜 그리 어렵죠? 헤이스팅스는 돈이 많은데."
(...)
엘리자베스: "성차별 때문이에요."
엘리자베스: "거기에 더해 사내정치와 편애와 불평등과 어디에나 존재하는 불공평함까지 있죠"
(...)
엘리자베스: "하지만 주로 성차별 때문이에요."
그녀의 말에 캘빈은 순수한 태도로 물었다.
(...)
캘빈: "대체 어떤 성차별이 있다는 말이에요? 과학계가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다고요? 말이 안 되잖아요. 과학자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따름인데"

4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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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차별을 받고 있지 않았던 캘빈은 유리천장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저 객관적인 시각으로 순수한 물음을 던질 뿐이다. 과학자가 많으면 좋은 게 아니냐며.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불공평과 불평등, 성차별과 싸워왔던 엘리자베스는 명확하게 말한다. 성차별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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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케임브리지에 있을 때, 여성 과학자들을 얼마나 알고 지냈나요?"
엘리자베스: "여자는 없었습니다. 동료들은 모두 남자뿐이라서요."
(...)
캘빈: "분명 어딘가에선 여자도 같은 기회를 받고 있었을 거잖아요? 여성 과학자를 몇 명이나 알고 있어요? 퀴리 부인 빼고요."
(...)
캘빈은 이제야 문제가 뭔지 인식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
엘리자베스: "캘빈, 문제가 뭐냐면요. 이 세상 인구의 절반이 쓰이지도 않고 있다는 거예요. (...) 문제는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여자들이 대학에 간다 해도 케임브리지 같은 곳은 못 다녀요. 그 말은 여자에게 남자와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고, 따라서 동등한 존중도 받을 수 없다는 뜻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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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은 무시하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 깨닫게 된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엘리자베스는 여성에게 주어지는 역할에 대해서도 명확히 지적하는데, 사이다 발언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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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하지만 여자들은 그 대신 집에서 아기를 낳고 양탄자를 청소하죠. 그건 합법적인 노예나 다름없어요."
(...)
엘리자베스: "당신이 바로잡아줄 필요 없어요. 난 이 상황을 바로잡을 능력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
캘빈: "당신은 그럴 능력이 없다고요.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인생이란 원래 불공평하잖아요."
(...)
캘빈: "봐요. 인생은 원래가 불공평해요.(...) 몇 가지 오류만 고치면 나머지는 알아서 잘 맞아떨어질 것처럼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요. 내가 조언하나 할까요?"
(...)
캘빈: "시스템대로 움직이지 마요. 시스템을 뛰어넘어버려요."
(...)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스템을 굳이 뛰어넘어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싫었으니까. 애초에 시스템을 바르게 만들면 안 되는 거야?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것도 정말 싫었다.

44~4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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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가 말하는 마지막 대목은 나 역시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누군가는 뛰어넘으라고 말하지만, 왜 그래야 할까? 반대편에 서 있는 누군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러한 일을 겪지 않는다. 그저 같은 선상에 세워주는 것! 애초에 바르게 시스템을 만들어주면 안 되는 걸까?

외국에서는 결혼하면 여성이 남성의 성으로 바꾸는 문화가 있는데, 우리나라로 바꿔 대입하면 자식들이 아빠의 성을 따르는 것을 예로 들면 적절할 것 같다. 지금은 부모 성 중 원하는 것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조건 아빠의 성을 따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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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나는 왜 여자들이 결혼하면 중고차 바꾸듯이 옛 성을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어. 성은 물론이고 가끔 이름마저도 잃어버리잖아. 존 애덤스 부인! 에이브러햄 링컨 부인! 마치 자신의 예전 모습은 '가주어'처럼 치부하고 새로 얻은 남편의 이름으로 진짜 사람이 된 것처럼 여기지. 피터 딕먼 부인이라니. 무기징역 선고 같아"
(...)
캘빈: "이런 전통을 만든 건 내가 아니야. 세상 이치가 그렇다고.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게 되어 있어. 그리고 99.9퍼센트의 여자들은 만족하면서 살아"
엘리자베스: "그 주장에는 근거가 있겠지"
(...)
캘빈: "음. 없어. 하지만 불만을 가진 여자가 있단 소리는 못 들어봤어"
(...)
엘리자베스: "네가 성을 바꿀 수 없는 이유는 네가 유명해서라고 했지. 하지만 99.9퍼센트의 유명하지 않은 남자들도 자기 성을 유지하면서 살아."

9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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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진짜 당연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근거 없는 당연함과 확언은 누가 만든 것일까?'세상 이치가 그러니까'라는 말은 누군가에겐 그저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다. 역지사지. 엘리자베스의 한방이 왠지 모르게 통쾌하게 다가오는 문장이다.

 

두 연인을 대등한 관계에 두고 이어가는 상황은 새로운 것을 알고 싶게 하고, 아는 것은 더 알고 싶게 만든다. 유리천장에 막혀있던 금녀의 구역을 둘은 손을 꼭 잡고 하나씩 깨나가기 시작하는데, 조정을 하는 것도 그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둘이 만들어 내는 시너지, 이를 통해 변화하는 모습들은 계속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샘플북의 마지막 한 줄은 놀라운 반전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이 이야기의 시작은 어쩌면 이 이후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은근한 기대감이 차오른다. 다음의 이야기가 너무나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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