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김보리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3월
평점 :
이 책은 '유배기'라 쓰고 '성찰기'라고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제주'하면 떠올리는 푸른 바다, 탁 트인 풍경, 힐링의 공간이라 말하는 제주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불량주부 명량제주 유배기>에는 오십 살에 혼자 떠난 저자의 제주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왜 유배기일까 무척 궁금했는데 이 제목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는 '프롤로그 같은 에필로그'에서 그 사유를 알 수 있었다. 사실 한 달간의 여정이 다 끝나가도록 일기같이 쓴 매일의 기록에서는 정확한 사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두루뭉술한 표현들만 기록되어 있어 간접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슬픔 감정, 쓸쓸한 감정, 지친 감정, 또다시 힘내자는 파이팅의 감정, 잔잔한 감정, 고독한 감정, 침잠한 감정, 즐거운 감정, 깨달음의 감정 등등.
젊지도 늙지도 않은 오십의 나이에 홀로 떠난 제주여행은 행복 찾기가 아닌, 나를 찾고 바로잡으려 떠나온 여행이었다. 한 달의 시간 동안 저자는 걷고 또 걸었다. 무수히 많은 올레길과 제주 곳곳을 걸으며 생각하고, 슬퍼하고, 되새기며 한 달 동안의 시간을 보냈다. 탄소발자국은 남기지 않으려 애썼고 천천히 생각 없이 절제하며 걸었다. 떠돌이 객으로 살며 절반의 시간은 친정 언니들, 친구들, 남편, 회사 직원까지 만나게 되었다. 홀로 하는 시간에는 늘 김밥 한 줄과 막걸리 한 병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한 끼가 되었다.
=====
혼자라 쓸쓸하고, 혼자라 좋은 그런 날이었다. 그런 걸음이었다. 대단한 생각 같은 거 없이, 머릿속이 가벼워 몸도 가벼워진 듯 대책 없이 느려 영혼도 따라오기 쉬운 걸음이었다.
87페이지 中
=====
담담한 기록, 소박한 한 끼, 그리고 매일을 돌아보며 쓴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의 기록들에서는 약간의 명랑함과 자기 성찰이 느껴졌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그날그날 일정을 정해 오름을 오르고, 올레길을 걷고, 후미진 곳에 작은 서점을 방문하며 보내는 일상의 기록은 독자 역시 홀로 제주를 걷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
오름의 기쁨은 높이에 비례하지 않았다.
(...)
얕은 둔덕 하나하나를 오르고 넘다 보면 튼튼한 다리도 생기고 멀리 보는 눈도 생기고 기세도 생긴다. 오름 오르듯, 한 오름 한 오름, 잘 쳐내며 살았어야 했다. 살아야 한다. 오르지 못하고 스쳐 지나온 오름이 많다. 해낼 수 있는데 못해낼 거라 지나친 과업들이 많다. 이제는, 다시 오름. 다 오름. 삶에 좀 더 오름. 때로는 악착같이 때로는 한량하게, 오름 또 오름.
120페이지 中
=====
특히 다양한 오름을 오른 이야기들은 유독 더 눈에 들어온다. 얕든 높든,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오름이든 오르기 전과 오른 후에 느끼는 감정의 폭은 다르다. 보이는 것도 다르다. 저자는 오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이 글을 읽는 나 역시도 성찰을 시간을 가져본다. 스쳐 지나온 오름은 없는지, 잘 쳐내며 살아왔는지 오름에 오른 후 멀리 풍경을 내려다본다. 그 곁에는 김밥 한 줄과 핑크빛 막걸리 한 병이 자리하고 있다.
=====
그런 것이 실은 중요한 일이다. 있던 자리, 중심을 찾아가는 일.
144페이지 中
=====
=====
걷고 쓰자. 말을 줄이고 쓰자. 게으름을 줄이고 걷자. 걸으며 세상을 읽는다. 나다니엘 호손의 아들은 아버지를 '침묵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표현했다. 나도 그런 재능을 갖고 싶다. 책과 길, 쓰기와 침묵으로 남은 날을 깊게 살자. 그것이 생생한 삶이다.
179페이지 中
=====
홀로 하는 여행에서는 말이 줄어든다. 걷고 보고 쓰는 일. 그것이 하루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온 뒤에는 지쳐 쓰러져 일찍이 잠이 든다. 이른 아침을 맞는다.
====
왜 그리 꾸깃, 구겨져서 살았을까. 왜 그렇게까지 남을 먼저 생각하고 살았을까.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두고 애 끓이지 말고, 만들 수 없는 미래를 두고 속 끓이지 말자. 현재만이 의미 있다. 기운을 내보자. 사는 거 별거 아니다. 대단한 거 아니다. 오름 하나 오르듯 살아보는 거다. 꼬닥 꼬닥, 뚜벅뚜벅.
199페이지 中
=====
뒤늦은 후회이자 성찰이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 역시 많으니 현재에 의미를 두고 살아보자. 바꿀 수 없는 것에 만들 수 없는 것에 속 끓이지 말고 기운을 내보자. 바쁜 일상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비로소 멈춰야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다. 꼬닥꼬닥(=천천히) 살아보자.
=====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지구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볼 예정이다. 사는 게 허망할 때가 많은데, 이제는 사는 보람을 거기서 찾고 싶다. 또 다른 유배를 꿈꾼다. 일상으로부터의 격리, 철저히 혼자가 되어보는 시간을 통해 가장 깊은 곳의 나를 만난다. 너무 다운될 때는, 유배를 떠나자. 나에게 위로를 건네고 어긋난 곳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차분한 시간. 50세 제주 유배 30일이었다.
203페이지 中
=====
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을 추천한다. 거창한 이유 없이, 특별한 일정 없이 그냥 떠나도 좋다. 일상으로부터의 격리는 때로 가장 깊은 곳의 나를 만나게 해준다.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 내 안에 꼭꼭 억눌려 있던 생각들이 스멀스멀 되살아 난다. 새로운 장소에서 만나는 나는 자유롭다. 때로 이 시간은 위로와 안식을 주기로 한다.
=====
익숙한 곳, 익숙한 사람 옆에서는 울 수가 없어 울 자리를 찾아 길을 떠났다. 차 안에서 울고, 바다 앞에서 울고, 숙소에서 울고, 눈 뜨며 눈 감으며 울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시간을 가지려 혼자 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남 보기엔 누리는 시간이고, 나에게는 견디는 시간이었다.
프롤로그 같은 에필로그 ( 215페이지 中)
=====
한 달간의 유배생활의 이야기 끝에 자리한 '프롤로그 같은 에필로그'에서 마침내 솔직한 저자의 감정을 만나볼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견딜 수 없어 떠난 제주 여행. 스무해 넘게 절친이었으나 한 번의 다툼으로 다섯 해 이상 등을 돌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친구. 사이좋던 부부 사이가 소원해지고, 스스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떠나온 여행은 그래서 행복 찾기가 아닌 유배기가 되었고 그 유배의 시작엔 친구가 있었다.
이제서야 돌아본다고 해결되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만 곪아버린 마음을 감추고 티 내지 않는다고 있는 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에 쏟아내고 위로받으며 삶을 다시 보듬을 시간은 누구나 필요하다. 그래서 저자는 한 달의 유배기를 통해 맘껏 울고, 쏟아내고, 걸으며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끼니마다 자주 먹었던 막걸리와 김밥은 어쩌면 맛있는 김밥을 싸오며 함께 했던 친구를 기리고 추억하는 애도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긋난 마음, 허망한 마음을 바로잡는 시간, 제주 유배 30일!
언젠가 살면서 이토록 마음이 아픈 날, 혼자 성찰의 시간이 필요한 날 제주 유배 여행을 다녀오면 어떨까?
=====
오십엔 제주가 제철입니다. 여행이 제철입니다. 주저 말고, 떠나셔요. 저절로 술술, 잘 풀릴 거예요. 여행도, 인생도.
225페이지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