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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달콤한 인생입니다 - 아픈 나와 마주보며 왼손으로 쓴 일기
고영주 지음 / 보다북스 / 2022년 4월
평점 :
"달콤한 디저트를 만드는 쇼콜라티에가 왼손으로 그려나가는 마음 레시피"
슬프거나 우울할 때 달콤한 것을 먹으면 기분이 사르르 풀리는 마법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 밑바닥 깊고 깊은 어둠 속에 파묻히고 싶은 날, 달콤한 디저트는 누군가의 위로나 위안 없이도 불안과 우울한 마음을 단번에 사라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곤 한다. 그래서 왠지 그런 달콤한 것을 만드는 쇼콜라티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을 전해주는 전도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수제 초콜릿 장인이 없던 시절, 거의 최초 혹은 1호 쇼콜라티에라고 칭하는 저자는 그런 '행복을 전하는' 쇼콜라티에다. 첫아이가 세 살 되던 해 벨기에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취미 삼아 이것저것 배우던 그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고민하던 중 손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고 먹는 것을 좋아하던 자신의 취향을 한껏 반영해 시작하게 된 것이 벨기에의 수제 초콜릿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기술은 이혼 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수제 초콜릿을 만드는 쇼콜라티에로 시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지금까지 20년간 좋아하는 일로, 직업으로써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무일푼으로 도착한 한국에서 어린아이 둘을 키우며 쇼콜라티에라는 기술자로 성장하기란 쉽지 않았다. 실전 경험 없던 그녀가 호텔을 거쳐 자신의 가게 '카카오봄'을 오픈하고, 운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할 인맥도 없었고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버티고 버티면서 헤쳐나갔다. 감정을 죽였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하며 버텨왔다. 그렇게 버텨온 세월이 20년이다.
힘겨웠지만, 지금까지 잘 버텨왔기에 괜찮다고 생각했고 괜찮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오른손이 고장 났다.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오른손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녀에게 나타난 증상 중 하나였다.
이 책의 시발점이자 저자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건 친구들과 함께 한 통영 여행에서였다. 예약한 숙소가 취소되면서 지인의 소개로 급하게 얻게 된 '밥장'님의 집에서 2박 3일을 머물게 되었고, 벽에 붙어있던 <몰스킨 그림일기 레슨>을 모집하는 포스터를 보게 되면서 그림일기를 알게 된다.
자꾸만 '그림'에 마음이 갔던 저자는 덜컥 줌으로 강의를 신청하고 망가진 오른손을 대신해 왼손으로 매일 그림일기 쓰기로 마음먹는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던 글씨와 그림을 왼손으로 쓰는 것은 처음엔 쉽지 않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마치 초등학생이 쓴 것 같았다. 하지만 설레고 재밌었다. 생각처럼 따라와 주지 않는 왼손이 답답했지만 그래서 더 깊이 생각하고 천천히 그리고 써 내려갔다. 무엇보다 카톡으로 전송한 일기에 정성스레 코멘트를 달아주는 밥장님의 응원과 격려도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왼손 길들이기는 시작되었다.
지난 4년은 그녀에게 일적이든, 개인적이든 매우 스펙터클한 시간들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벅참을 넘어 혼란의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었다. 겨우 현실적인 문제들을 수습하고 난 이후에는 코로나가 터져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코로나와 상관없이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여행도, 공부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코로나로 인해 생긴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을 더 '응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몸도 챙겼다. 그렇게 조금씩 컨디션이 회복되면서 어디 가서 쉴까라고 생각하던 중 '제주 올레 한 달 걷기' 프로그램 신청하게 되었다.
20년 근속기념 제주여행에서도 왼손으로 쓰고 그리는 그림일기는 계속되었다.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익숙지 않은 왼손을 꾹꾹 눌러가며 쓰고 그렸다. 오른손만큼 능숙하지 않았기에 생각한 것을 모두 다 쓸 수 없었고, 그릴 수 없었다. 지우거나 수정도 쉽지 않았기에 더 깊이 생각하고 하루를 돌아본 후 그림일기를 썼다. 점차 설렘과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더 스스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일기의 내용은 단조롭다. 본 것과 느낀 그대로가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심오하거나 어렵지 않아 그 당시의 저자의 상황이 쉽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림은 왼손으로 그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세심하고 디테일하다. 초등학생이 쓴 것 같은 글씨체는 뒤로 갈수록 정리되고 다듬어진다. 그림은 일상 속 풍경부터 먹었던 음식, 레시피, 식재료, 상상 속 내용까지 다양하다. 펜으로, 선으로만 그렸던 그림에 색깔이 덧입혀진다. 그녀의 세상이 풍요로워지는 게 느껴진다.
쉼 없이 달려온 20년. 코로나를 겪으며 그녀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1년 동안 왼손으로 그림일기를 쓰며 스스로를 마주 보았고, 아픈 자신을 다독였다. 묻어두었던 감정도 꺼내보고 때론 정신과 상담을 통해 도움도 구했다. '쉼'이 빠져있던 일과 일상에서 천천히 균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남에게 다정하고 나에겐 가혹했던 자신을 가만히 안아주면서 화해를 청했다.
익숙해서 그냥 지나쳐갔던 일들을 반성하고 제대로! 자세히! 봐주는 연습을 하면서 이제는 몸과 마음에 근육이 생기는 것 같다는 저자. 그녀가 쓴 그림일기는 그녀 내면의 성장통인 동시에 마음 레시피인지도 모르겠다.
1년 동안 왼손으로 쓴 그녀의 마음 레시피를 엿보며 '나는, 우리는' 괜찮은지 돌아보게 된다. 살아가는 것에 버거워 나를 방치해두고 있었던 건 아닌지 혹은 익숙함에 젖어 낯섦이 필요할 때는 아닌지. 세상을 넓고 멀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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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위한 고민과 조사는 깊게 하고, 끌리는 길에는 주저하지 말고 들어서 보자. 끌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헤매고 길을 잃어도 큰 지도 속에서 보면 사실 별것 아니다.
14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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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던, 사랑하는 사람이던 각자의 고독한 경계로 침범하지 않고도 서로 잘 봐주는 거 하고 싶다. 자세히 봐주고 싶다.
20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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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지면 집중, 정성 그런 거 자꾸 깜빡하게 되나 보다. 모든 익숙함에 대해 한 번씩 낯설게 바라봐야겠다.
왼손 일기 8개월째 모든 익숙함을 낯설게 바라보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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