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간을 파는 상점 (10주년 한정특별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3월
평점 :
절판
10주년 특별판으로 만난 '시간을 파는 상점'은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봄꽃을 연상시키는 책이었는데 표지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모자 일러스트는 어딘가 신비스럽고 궁금증을 자아냈다. 왠지 모자 형태의 집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을 따라가면 어느 동화 속으로 빠져버릴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했다. 이와 더불어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제목 또한 왠지 모를 호기심이 들게 만드는 책이었다.
흔히들 유한하다고 말하는 시간. 그 시간을 파는 상점에 대해서는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왠지 어딘가는 존재할 것 같은,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은 마음 한편에 누구나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후회되는 시간, 기다리던 시간, 멈췄으면 하는 시간, 되돌아가고 싶은 시간 등등 누구나 자신이 마음에 품고 있는 '간직하고 싶은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온조는 소방관이었던 아빠를 하늘나라로 보낸지 이제 5주기를 맞은 고등학교 2학년의 학생이다. 처음엔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상실감에 많이 힘들어했던 적도 있는데, 이제는 그런 아빠를 떠올리며 웃을 정도의 여유는 찾게 되었다. 씩씩하고 밝게 자란 온조는 2개의 아르바이트를 경험해 본 뒤 시간에 따라 시급을 계산해 주는 것을 보고 문득 '시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인터넷 카페에 모의실험하듯 '시간을 파는 상점'을 계획하게 되고 반신반의 상태로 오픈하게 된다.
여러 가지 구상 끝에 오픈한 '시간을 파는 상점'에서 그녀는 시간의 경계를 나누고 관장하는 신-크로노스의 이름을 따와 '크로노스'라는 닉네임으로 카페를 오픈한다. 무엇보다 온조가 생각했던 물질과 환치될 수 있는 진정한 시간의 신이자, 생산적인 결과물을 낳아야 하는 이 시대에 딱 맞는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페 운영에는 몇 가지 조항도 만들었는데 그 조항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능력 이상은 거절할 것
◆옳지 않은 일은 절대 접수하지 않을 것
◆의뢰인에게 마음이든 뭐든 조금의 위로라도 줄 수 있는 일을 선택할 것
◆무엇보다 시간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줄 것
그리고 그런 크로노스의 사진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깔아두었다.
=====
세상에서
가장 길면서도 가장 짧은 것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느린 것
가장 작게 나눌 수 있으면서도 가장 길게 늘일 수 있는 것
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한을 많이 남기는 것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소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
위대한 것에서는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그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어서 오세요.
여기는 '시간을 파는 상점'입니다.
당신의 특별한 부탁을 들어드립니다.
=====
카페 오픈 후 첫 의뢰는 PMP 도난 사건이었는데, 가볍게 시작했던 의뢰가 생각보다 큰 사건으로 번져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이후 천국의 우편배달부 역할을 해달라는 의뢰, 할아버지와 식사를 함께 해달라는 의뢰,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뢰 등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시간'을 물질적 가치로만 생각했던 은조가 점차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시간을 파는 상점'을 통해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나고, 의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금'과 '오늘'의 가치를 배우게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쑥쑥 성장하는 온조를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생산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온통 마음이 쏠려 진짜 중요한 가치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중에', '언젠가는'이라는 핑계로 미루고 있는 일들이 어쩌면 이후 기회조차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삶에 있어 주어진 매 순간은 '오늘, 이 순간' 밖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더 나은 오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현재 어떠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유달리 기억에 남았던 문장들을 남겨본다.
=====
크로노스: 우리의 시간은 현실 속에서 시계로만 재단할 수 있는 것 외에 그것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를 들면 상상 같은 거 말이에요. 아니면 추억도 현실 속의 시계로 재단할 수 없지만 우린 분명 그때의 시간을 불러올 수 있잖아요.
(...)
상상, 추억, 기억 이런 것들은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아니지만 분명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것이 분명해요.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있기에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거거든요.
50페이지 中
=====
=====
크로노스: 도마뱀은 잡히면 꼬리를 끊고 도망가잖아요. 어느 순간 바위틈으로 몸을 숨겨 손바닥 위에는 꼬리만 남을 때가 있어요. 시간도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맞닥뜨린 사건은 도마뱀 몸뚱이가 되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도마뱀 꼬리 같은 기억과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현재의 우리에게 영향을 주거든요.
51페이지 中
=====
=====
"요즘은 속도가 너무 빨라. 왜 이리 빠른지 모르겠어. 빠르다고 해서 더 행복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오히려 속도 때문에 사고가 나는데도 말이야. 기계든 사람의 관계든 지나치게 빠르면 꼭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어. 온조 양도 명심하게"
66페이지 中
=====
=====
휴대폰도 내버리고 컴퓨터고 텔레비전도 다 없애 버렸네. (...) 불편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아. 은근히 매력 있어. 그런 것이 없으니 사람에 대한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는 것 같아. 기계 대신에 사람이 들어오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미덕들이 살아나. 시간이 나를 위해 움직인다고 해야 하나? 시간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한 느낌 같은 거야. 한결 부드럽고 친절한 시간이 되는 거지
69페이지 中
=====
=====
시간은 그렇게 안타깝기도 잔인하기도 슬프기도 한 것인가. 삶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 사이의 전쟁 같기도 했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는 그렇게 애달파하고, 싫은 사람과는 일 초도 마주 보고 싶지 않은 그 치열함의 무늬가 결국 삶이 아닐까?
115~116페이지 中
=====
=====
엄마가 그랬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사람들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해결 못할 일은 없다고 했다. 그들로 인해 생긴 문제는 그들과 또 다른 그들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193페이지 中
=====
온조의 '시간을 파는 상점'을 통해 각각의 '내'가 '우리'가 되고, 너와 내가 맺는 '관계'를 통해 삶을 함께 살아나가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온조를 통해 그려진 이야기 속 곳곳에 건강한 성장담이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더 마음에 남았다. 편모 가정, 이혼가정, 재혼가정 등 제각각 다양한 가정의 형태를 그리고 있는 것은 물론, 서로 각자만의 형태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를 건강하게 보여주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배다른 동생을 챙기는 난주, 친아빠 이상으로 관계가 좋은 새아빠, 엄마의 새 애인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혼란과 이후 그 감정을 잘 다스리며 풀어가는 과정, 물건을 훔친 아이를 보듬는 친구, 불화를 겪는 가족이 다시 화해하는 과정 등을 통해 사회라는 조직 안에서 어떻게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때론 뾰족하게 모난 구석도 불쑥불쑥 튀어나오지만, 둥글게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위로와 위안을 얻는 감동의 시간도 값진 찬란함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