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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온 미술관 - 길 위에서 만나는 예술
손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월
평점 :
학교 졸업 후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에는 세상 모든 게 새롭고, 흥미로운 것들이 가득했었다. 다양한 것들을 경험해 보고 싶었고 기회가 닿는 한 최대한 많은 것들은 내 안에 담으려 노력했다. 때론 쑥스러운 마음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 경험해 본 많은 문화/예술들은 지금까지도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다 먹고사는 일이 바빠지면서 꽤 오랜 시간 그런 것들에서 멀어져 살았는데, 번아웃을 여러 번 겪으면서 몇 년 전부터는 조금씩 다시 주변을 살피며 조금씩 경험의 범주를 늘려보고 있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가까이 있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겨우 잠깐 눈만 붙이고 뛰어다니던 출퇴근길에서 지나쳤던 어딘가에서, 혹은 가끔씩 방문했던 그 장소에서, 아직 발걸음 하지 않아 모르고 있던 장소에서 눈만 돌리면 발견할 수 있었던 공공미술에 대한 역사와 해석이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어 새로운 재미를 선사해 주었다.
관람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잠깐의 시간만 할애한다면 누구나 줄 서지 않고 관람할 수 있는 길 위의 미술관이라니, 백사장의 수많은 모래가 누군가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오는 보석 같은 의미가 되는 것처럼 왠지 길 위에서 만나는 예술작품들도 그런 의미로 다가올 것 같아 내심 설렜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공미술 이야기, 건축 이야기, 역사 이야기, 새로운 공공미술 영역으로 나누어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도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스쳐지나듯 바라봤던 예술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을 가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미술품들은 생각보다 많지만, 미술작가와 제작 경위, 뒷이야기에 대한 친절한 정보, 시대사적 맥락에 대한 해석을 구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 책을 통해 흥미로운 생활 속 미술현장을 만나볼 수 있다.
책에 소개된 여러 미술품들을 소개하기 전 기본적인 내용들은 숙지하면 좋을 것 같아 정리해 본다.
거리의 조형물은 네 가지로 나뉘는데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정부 주도의 기념 조형물
두 번째. 1% 법에 따라 설치된 미술품
세 번째. '서울은 미술관'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제작한 작품
네 번째.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설치한 사례
책에서 소개되는 거리의 미술품들도 위 네 가지 사례에 적용되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형물들이 설치하게 된 배경과 역사적 내용, 숨겨진 이야기 등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여러 이야기들을 지금부터 만나보자. 참고로 개인적으로 특히 인상깊었던 예술품들을 선별하여 몇가지만 소개해 볼 예정이다.
◆해머링 맨
광화문 흥국생명 본사 앞에 설치되어 있는 이 거대한 조각상은 실제 느리게 망치질을 하는 조각상이라고 한다. 전기료와 보험료 등 1년에 7천만원 가량이 드는 거대한 조각상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하다.
이 조각상의 매력은 4가지로 꼽을 수 있다.
1. 이 작품의 매력은 크기!
2. 아주 느린 동작
3. 그림자극을 보는 듯, 검고 얇은 몸체가 주는 시처럼 함축적인 힘
4. 조각 물의 커다란 발이 주는 효과
사진만으로는 가히 짐작이 되지 않는다. 이 <해머링 맨>은 여러 나라에 설치되어 있는데 겉보기엔 똑같아 보여도 망치질하는 속도, 쉬는 시간, 어깨 문양 등에 차이를 두었다고 한다. 각국에 설치되어 있는 <해머링 맨>을 찾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노동자의 수고를 상징한다는 이 조각상은 오늘도 쉼 없이 전 세계에서 망치질을 하고 있겠지?
◆꽃이 피다
DDP를 방문한 사람들은 한 번쯤 보았을 조각물이다. 무심히 넘겼을 조각물에 해석이 덧대어지니 새삼 새롭게 보인다. 복수의 정체성을 뜻하는 이 모습을 보면 내 안의 여러 정체성이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멀티 페르소나'를 상징하는 조각물 같기도 하다.
<그림자의 그림자-길. 2016>
이 조각상은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동시에 뒤를 보고자 하는 인간의 내면을 담은 조각이다. 미래를 향해가면서도 과거를 성찰하는 자세로 살자는 메시지로도 해석될 수 있다.
8m 장신의 금빛 인체 조각 두 점은 DDP 건축물이 주는 차가움, 근접하기 어려운 권위를 누그러뜨리며 공간 전체에 따뜻한 느낌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서 있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순간 이동하는 기분이 든다. DDP 건물과 어우러져 어딘가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미래의 한 모습이기 때문일까?
<중력 무중력. 1988>
이 작품은 직설적인 표현에 조금씩 흥미를 잃게 되어 변화를 모색하던 중 탄생되었다고 한다. 평면의 부조에서 인간의 형상이 떠오르는 듯한, 즉 부조와 환조를 합친 조각 시리즈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영혼이 빠져나가거나,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신기하게도 김영원 조각은 미래적이면서도 편안하게 다가오는데 저자는 그 조각이 곧 현실화된 미래를 품고 있어서일 거라고 말한다. 나도 동감하는 바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광화문 광장을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동상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은 거의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러 정치/경제/문화 등의 이슈로 뉴스 및 기타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방송되어 실제로는 못지 못했어도 방송을 통해서 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동상을 그냥 볼 때는 광화문 광장의 상징으로 가볍게 보고 스쳐 지나가곤 했었는데 동상이 세워지게 된 배경을 살펴보니 한국의 근현대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이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동상 세우기 1호 사업으로 국민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통치 이념을 심어주기 위해 널리 활용된 수단이자 예술이 정치에 동원된 방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 동상이 세워지게 된 재미있는 설이 있는데 일본의 기운이 뻥 뚫린 세종로를 타고 밀려 들어올 것을 걱정한다는 여론을 보고받고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는 지시에 세워졌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이후 철거와 이전 위기가 여러 번 있었으나 굳건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예술적 탁월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며 이제는 어느새 광화문의 풍경이 돼버려 나처럼 그저 광화문 광장의 상징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이제는 박정희 시대의 상징에서 대한민국 상징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래 이미지는 탈색되고 국민이 새로운 이미지를 입히고 있는 셈이다.
◆꿈나무
코엑스와 지하철 연결통로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작품은 뭔가 동심을 자극한다. 보통 조각이나 동상은 철이나 구리 같은 차가운 재질로 만들어지곤 하는데 이 작품은 플라스틱으로 제작되어 더 신선하게 다가온다.
플라스틱은 시대적 흐름으로 살펴보면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추구했던 개발 경제의 산물이다. 플라스틱이 대변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경제는 1990년대 내수시장의 성장과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지표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는 플라스틱이 공포의 대상으로 변질되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플라스틱을 통해서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개인적으로는 '민들레'라는 작품이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시민으로부터 받은 냄비, 접시 등 식기 7천 개를 모아서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거대한 꽃을 만들었다고 한다. 거꾸로 홀씨가 모여 민들레로 피어난 듯한 희망을 주는 이 작품은 작가가 플라스틱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발견한 '파격'과 '폭발하는 에너지'를 잘 드러낸 작품인 것 같다.
◆국립중앙박물관
한 번씩 예정 없이 방문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은 그저 주변을 휘~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과 '쉼'을 제공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무료로 전시하는 수백수천 건의 유물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히 누릴 수 있는 곳이라 숨겨진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한국 건축에서 가장 사랑받는 배산임수의 지세를 갖추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의 기념비적 문화시설이 한국성과 전통을 표상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첫 건축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추상적으로' 한국성을 담아내고자 했는데, '성벽과 닮게' 지은 것이 아니라 성벽의 견고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식으로 건축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디를 둘러보아도 과하지 않고 편안하다. 무더운 여름이면 계단에 툭 걸쳐앉아 네모난 액자 너머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볼 수 있다.
◆국회의사당
한때 국회의사당을 보고 돔 지붕을 열고 솟구쳐 나오는 태권브이를 연상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이 책의 서두에도 이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지만, 세계 여러 나라들의 국회의사당의 역할을 하는 장소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왜 이런 모양으로 지었을까에 대해 궁금했던 적이 있다.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이 책을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국회의사당>은 건축이 권력의 시녀가 된 첫 케이스로 돔이 권력자 한마디에 얹힌 경우라고 한다. 결국 권력자 입맛에 따라 시공 과정에서 누더기가 된 것이다. 무엇이든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부지 역시도 원래 남산으로 정해졌던 부지가 여의도로 이전되어 건축되었는데, 여의도를 중심업무지구로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파워풀한 건축물이 필요해 그 대상이 <국회의사당>이 된 것이라고 한다. 만약 원래 부지에 <국회의사당>이 세워졌다면 여의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홍제유연
이 책을 읽으며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은 <홍제유연>은 70년대 모습과 새롭게 태어난 서울의 모습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예전엔 부의 상징이었던 '맨숀'이 지금은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져 거의 볼 수 없는데 이곳에서는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새로운 공공 미술인 <홍제유연>을 통해 근현대사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팀코워크 <온기>
빛의 아래쪽 절반은 물에 반사된 부분으로 멀리서 보면 'ㅁ'자 형태로 보인다. LED 바가 무한대로 뻗어가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여러 작가의 어둠 속에서 빚어내는 빛의 향연은 이색적이고 조화롭다. 홍제천 물길에 흐르는 빛의 예술에서 느껴지는 건 절제 미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어렵지 않게 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란하지도 않다. 예술이 관람객에게 주고 싶은 것은 화려한 만족감이 아니다. 예술을 통해 나를, 사회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이곳의 예술도 그렇다.
가벼운 몸으로 산책하듯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만나게 될 <홍제유연>속 빛이 빚어낼 예술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길 위에 자리하고 있는 크고 작은 예술품들은 그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 자신을 돌아봐 주기를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무심코 지나쳤던 동상이, 건물이, 조각품들이 우리의 생활 곳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깨닫는다. 꼭 전시관/미술관을 방문해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산동네에 그려둔 벽화마저도 예술이 되고, 의미를 부여하면 그 또한 새롭게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가까운 장소부터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예술이라는 장르가 '공공'의 의미를 더해 좀 더 쉽고 친근하게 다가와 생활 속에 자리해 조용히 꽃피우고 있을 동안 누구도 관심 가져 주지 않았던 점이 문득 애석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다양하고 아름다운 예술을 느끼고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