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저는 꼬레아의 부키랍니다
-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
인도, 중국을 지나 자리잡은 꼬레아에 살아요.
시간적으로는 더 먼 미래에 살구요.
먼저, 자백할께요.
2권 37장까지 읽고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59장과 58장을 펼치고 말았답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만 것이죠.
그에 따라 임한 저주는 며칠 후 나타났어요.
57장까지 다 읽었는데도 어떤 감흥도 없고, 줄거리에 대한 깔끔한 이해도 불가능했죠.
아는 것이라곤 살인자의 이름 뿐..., 아...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참회하는 마음으로 58장을 다시 한 번 읽었죠.
마침내 전해지는 살인자의 순수함과 사랑(p.334).
다시 읽은 58장이 없었다면 이 소설은 제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는 꼴이 되고 말았을 거예요.
세밀화가 당신들의 표현을 빌리면 저는 베네치아 화풍이 추구하는 형식주의자예요.
그래서 소설을 읽을 때면 소설의 3요소인 주제, 구성, 문체라는 형식적 요소로 분석하고 파악하죠.
그런데 이번엔 화원장 오스만의 제자들인 당신들처럼 의미주의자 입장에서 3가지 키워드로 이해해 보려고 애썼어요.
예술, 사랑, 그리고 또...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3번째 키워드는 그 실체를 드러내 주지 않았어요.
마치, 살인자의 이름처럼.
시크릿이 아닌 미스테리로...
이 3가지 키워드는 결국 인생의 키워드이기도 했어요.
예술은 직업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예요.
소설 속 화가들은 모두 장인들로서 직업적 화가들이죠.
제 예술론도 그래요.
예술을 장사처럼 하지 말고, 장사를 예술처럼 하자죠.
소설 속 제1키워드 예술은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것이었어요.
전통 세밀화와 유럽 초상화 사이에서 모든 화가들이 자학과 타협으로 순수함을 잃어버렸을 때 살인자는 진정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인도로 가는 길을 택하죠.
우리처럼 되어서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있자는 카라의 유혹을 거부하죠.
이런 유혹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살인자가 추구했던 사랑(제2키워드) 또한 순수하고 지고했기 때문이예요.
이 사랑을 알고서 저는 셰큐레에게 화가 났어요.
오르한 파묵에게두요.
이 작품에서 예술은 그토록 낭만적인데, 세큐레의 사랑은 이토록 현실적일 수 없어요.
저는 낭만주의자로서 단호히 세큐레는 살인자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럴수록 살인자의 사랑은 더 낭만적이구요.
제가 뽑은 이 소설의, 또 인생의 마지막 키워드는 신앙이었어요.
이 제3키워드는 앞의 두 키워드와 다른 점이 있어요.
먼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예술과 사랑으로 살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술, 사랑, 신앙으로 살죠.
소설 속 인물들도, 또 현대인들도 2가지로 사는지, 아니면 3가지로 사는지를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을 거예요.
다음으로, 신앙은 결국 예술과 사랑으로 표현된다는 거예요.
살인자의 예술이 순수함에, 그의 사랑이 상대방의 행복에 가 닿아 있듯이.
그러고 보니 예술, 사랑, 신앙은 하나로 버무려지는 것이네요.
가장 모호하고 추상적인 신앙이라는 요소는 내가 하는 일과 사랑을 통해 구체화되어 표현되겠지요.
그러고 보니 저는 신앙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결국,
자신과는 다른 사랑의 추구자,
즉 카라에게는 사랑을 양보하고,
하산을 통해서는 인도로 향하던 예술의 순수함을 교수당하고 마는 안타까운 살인자.
두려운 마음으로 예술, 사랑, 신앙으로 인생 저글링을 잘 할 수 있기를 신께 기도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