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김미화 선생은 내 어린 시절 배꼽 도둑이었고 지금은 깨어있는 시민으로 존경하는 분이다. 서울에 가는 김에 그분께 드릴 <독서 만담>에 서명을 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는 끔찍한 악필의 소유자다. 자필로 서명하는 것을 책 한 권 내는 것만큼 힘들어한다. 신언서판이 확실히 맞는 말인 것이 나의 성품은 나의 필체를 닮았다. 


성격이 급하고 꼼꼼하지 못하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부모님께 드렸다는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균호는 뭐든지 제일 일찍 끝내요’ 공성면 인창1리의 이장이시자 무려 공서국민학교 학력관리위원장님이셨던 아버님께 잔뜩 예의를 차려서 완곡하게 표현하신 말씀이다. 한마디로 뭘 시키면 대충하고 논다는 이야기다. 


악필이라고 다 같은 악필이 아니다. 악필도 일관성이 있으면 그 자신의 개성 있는 필체인데 나의 경우는 그렇지도 못하다. 언젠가 내 필체를 보고 직장 동료의 일성이 이랬다. ‘발가락으로 써도 네 글씨보단 낫겠다” 


그래도 책을 쓴 사람이라고 자필서명을 부탁하면 겨드랑이에 땀이 샘솟는다. 단 몇 줄 적는 것인데도 담임선생님 앞에서 외우지 못하는 구구단을 겨우겨우 말하는 심정이다. 심혈을 기울려서 적어주었는데 '피식' 웃으면서 '선생님 글씨는 잘 못 쓰시네요'라고 내 면전에서 말한 사람이 정확히 3명이나 있었다. 적확한 사실이라 원망은 하지 않는다. 


 집에 혼자 있을 땐 연습장에 미리 적어보는 예행연습을 거친다. 안동 양반이 연습 삼아 제사를 미리 지내보는 식이다. 혹여나 SNS에 인증사진을 올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고 그게 현실화되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 


심지어는 인증사진을 내 SNS계정에 태그를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그 게시물을 삭제했다. 연습하고 적어도 글자를 잘 못 적는 경우도 허다하다. 문구를 적을라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서 철자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연습장에 적어놓고 옮겨 적는 이유다. 믿지 못하겠지만, 증정 문구를 잘 못 적어서 그쪽을 찢어버리고 다음 쪽에 적는 경우도 많다. 


처음에는 그 책은 폐기했는데 요즘은 아까워서 그냥 그쪽은 찢어버리고 흔적을 없애고 다음 쪽에 적는다. 최근엔 젊은 처자에게 그런 식으로 서명본을 보낸 적이 있었다. 우연히 그 처자랑 대화를 나누는데 궁금한 것이 있단다. 찢어버린 그 페이지에 무슨 말을 적었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말을 적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찢어버리고 새로 적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잃어버린 그 문구가 몹시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또 대충하는 버릇이 발휘되어서 찢어버린 쪽의 흔적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그 처자의 질문을 받고 머릿속이 또 하얗게 되었다. 그 처자의 생각처럼 제발 다른 말을 적었다가 새로 적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처자를 허무하게 만들지언정 없는 말을 지어낼 수는 없었다.


이렇게는 살 수 없겠다 싶어서 대안을 생각해봤다. 장서표의 대명사인 ‘남궁산’ 선생에게 의뢰해서 제작한 내 장서표의 사본을 많이 만들어서 내지에 붙여주고 내 이름만 적어서 보내는 방식 말이다. 남궁산 선생이 완성된 판화 원본을 보내주실 때 복사해서 사용하라고 별도로 흑백 판화를 보내주셨었다. 


문제는 흑백판화 원본을 어떻게 복제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펜글씨 학원이라도 다녀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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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2-14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그럼 제 책 받아보시고 놀라실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악필이거든요.ㅠㅠ
그런데 누구는 멋있다고 해서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ㅋ

사인본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건 좀 무리겠죠?ㅠㅋㅋ

박균호 2017-02-14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회가 되면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