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깃털보다 내가 가벼웠던 시절
염신현 지음 / 이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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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여자를 처음 사귀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무려 3년 동안 이어진 짝사랑을 종지부 찍고 공부를 하겠다며 혈서로 다짐한 며칠 후였다. 대학입학시험을 2주 앞두고 새 출발을 했지만 불과 1주일 만에 첫눈에 반한 여학생을 발견했다. 2층에 있는 교실 창가에서 늘 하던 대로 지나가는 여학생의 평점을 매기는 놀이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별 다섯 개로도 불가능한 인형보다 더 예쁜 운명의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늘 앞서가는 남자들의 본능이 발휘되었는데 그 여학생과 사귀게 되더라도 몇 달 후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신분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이내 그 여학생을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내 인생의 모든 행운의 기운이 그때쯤 집중되었는지 며칠 뒤에 대학입학시험 하루 전날 그 여학생이 내게 고백을 해왔다. 그 여학생이 ‘오늘 저녁 학교에 나오실 거냐? 잠깐 볼 수 있느냐?’고 물어온 것. 

그날 이후로 몇 달간 누구보다 달콤한 사랑을 나눴는데 언젠가 그 여학생에게 나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물었었다. 내가 잘 생긴 것은 다 아니까 진솔하게 대답해 달라고 물었는데 그 여학생의 대답은 의외였다. 자신을 좋아하지만, 엄청 못생겨서 싫어한 선배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학교 본관 건물에서 그 남학생이 걸어 나와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내가 걸어 나오더란 것이다. 

최근 ‘염신현’ 작가의 <당신의 깃털보다 내가 가벼웠던 시절>이라는 매력적인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타이밍 
여자 때문에 운 일이 있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오래전부터 언젠가 꼭 울어야지 했다가 그 울기에 좋았던 날 곁에 있던 여자가 걔였던 것만 같다. 여자한테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옳지 사랑인 게야 했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그냥 고백을 간절히 하고 싶었던 차에 마침 그때 나를 지나쳤던 여자가 걔였던 것만 같다. 

어쩌면 그 여학생은 나를 애초부터 좋아했던 것이 아니고 그 못생긴 선배에 몸서리를 친 나머지 다른 대타가 필요한 시점에 내가 나타난 것은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확실히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고 나니 굳어진다. <당신의 깃털보다 내가 가벼웠던 시절>이 2016년의 독서가 된 것도 오로지 타이밍 덕분이다. 

습관적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했는데 5천 명에 가까운 친구들의 글이 순식간에 지나치는 찰나에 한 분이 올린 이 책의 사진이 내 시선을 고정했다. 단순하면서도 수려한 세련미가 넘치는 이 책의 표지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또 얼마나 시적이고 울림을 주는가 말이다. 나는 책이라는 물건을 참 좋아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표지디자인과 장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국내와 해외서적의 간격이 가장 큰 부분이 디자인과 장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정도 표지디자인이라면 그 어떤 해외서적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제목과 표지만으로 책 전체를 읽은 것 같은 포만감을 느끼고 싶다면 단연코 나는 이 책을 손꼽고 싶다. 서둘러 읽고 이 세련된 책의 서평을 남기기로 했다. 나는 서평을 쓰기 위해 읽는 책은 험하게 다룬다. 책장을 접고, 메모를 곳곳에 남겨두어야 서평을 쓰기 편하기 때문이다. 서평을 쓰기 위한 책은 거의 부검하다시피 하는 편이다. 

첼로 연주자 
자기 세계에만 빠져 사는 사람은 
잠시 남의 세계에 빠지는 걸 사랑이라 하고 
자기 세계로 돌아오는 걸 이별이라 하고, 
자신의 연주만 듣는 첼로연주자처럼 눈을 감고선 
추억이라 한다. 자기 세계에만 빠져. 

서평용 책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나의 오랜 버릇은 위의 첫 구절을 읽고 나서 무너져버렸다. 215편의 사랑에 관한 짧은 생각과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이 책을 오래 곁에 두고 소중히 간직하면서 읽기로 작정했다. 

겨울 햇볕이 내려쬐는 따뜻한 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 책을 읽는 행복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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