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우리 집의 정권이 교체되는 것 같다. 돌아가는 정세를 보아하니 아내는 상왕으로 물러나는 듯하고, 중학교 2학년 딸내미가 실세로 군림하는 형국이다.
며칠 전, 기념일을 챙기는 것에 젬병인 나는 딸내미가 아내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에 자식 키우는 보람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그리고 이틀 전에 다시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어젯밤에 딸내미는 아내의 생일을 맞아 편지를 쓰라고 내게 강요했다. 나는 나만의 축하하는 방식이 있고 따로 선물을 준비하니 그런 것은 강요하지 말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딸내미는 편지 쓰기를 계속 주장할 뿐만 아니라 ‘몇 줄’로 짧게 쓰지 말고 편지지를 꽉꽉 채워서 빼곡하게 쓰란다. 나는 서간문에 익숙지 않고, 민망해서 도저히 못 쓰겠다고 항의했더니 급기야 앞으로 나와는 대화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한다. 할 수 없이 알겠다면서 편지지를 부탁했는데 달랑 한 장만 가져온다. 나는 실수가 잦으니 여분으로 두어 장 더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나 딸내미는 일단 컴퓨터로 초고를 작성한 다음 정성을 다해서 편지지에 옮겨 쓰면 되지 않느냐며 거절한다.
페이스북을 뒤져서 남편한테 받은 편지 때문에 감동한 분의 편지와 카드의 사진과, 한 분에게 문의를 한 결과를 모티브삼아 간신히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고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딸아이라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여자에게 적응하는 일이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지배한 탓인지 꿈자리가 그리 상큼하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에는 현격하게 정권교체의 징조를 몸소 체험한 날이다. 식사를 하는데 딸아이가 평소처럼 매우 큰 소리의 방귀를 시연했고 나는 ‘식사 예절’에 어긋난다고 점잖게 조언을 했는데 아내는 ‘딸아이의 방귀는 당신의 것과 달리 전혀 냄새가 없다’며 일갈을 한 다음 딸아이를 향해서 계속 시원하게 방귀를 보시라고 힘을 실어준다.
식사를 마치고 욕실로 향했다. 칫솔에 ‘아빠’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고 나의 뒤통수를 대고 딸아이는 ‘사용 후 반드시 제자리에 꽂아두어야 한다’고 하명한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아이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말을 잘 듣도록 해라’며 상왕으로서 주상으로 새로이 등극한 딸아이의 뒤를 봐주었다.
옷을 차려입고 출근을 하려는데 딸아이는 욕실을 친히 확인하여 자신의 지시사항이 잘 이행되었는지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조용히 서재로 들어와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어제 말한 아내에게 쓴 편지를 달란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고, 새로운 정권의 강도 높은 ‘국민 개조 정책’에 적응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