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책장을 우연히 펼쳐보다가, 그 속에서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했다는 독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그것이 아버지의 머리카락일 거로 생각했고, 순간 울음이 터졌다고 했다.


그 사연을 들은 뒤, 생각이 많아졌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남기신 책들이 있다. 몇 번이고 책장을 넘기며 혹시라도 메모나 밑줄, 접힌 귀퉁이 같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살펴봤다. 그런 자취 하나라도 발견되면, 잠시나마 아버지를 잠시나마 뵙는 느낌일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도 나처럼 책과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분이어서 책에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셨다. 그 아쉬움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나는 책을 많이 읽었다. 하지만 나 역시 책 속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 내 서재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 책들 속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조금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이런 고민, 이런 책을 쓰게 된 계기였다. 적어도 내 딸은 내가 느낌 감상을 알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벌써 제 부모 없는 세상을 무서워하는 딸에게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두면 좋겠다 싶었다.

 

한때는 희귀본 수집에 푹 빠져 있던 시절이 있었다. 초판본이나 서명본 같은 책들을 모으는 즐거움에 빠져 지냈다. 그중에 박완서 선생님의 오래된 소설책 한 권이 있다. 십수 년 전, 중고 서점에서 낡은 책을 하나 샀는데, 안쪽에 작게 자필 서명이 적혀 있었다. 가격은 3만 원쯤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문득 그 책이 생각나 검색을 해봤다. 박완서 선생은 원래 서명을 잘 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였다. 실제로 한 권이 올라와 있었고, 가격은 80만 원이었다. 꽤 놀랐다. 그런 책이 아무도 모르게 폐지 무게 값으로 넘어가는 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이 책은 비싼 책이니 그냥 넘기지 말라는 의미로나마 글을 남기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책의 가치는 결국 가격이 아니라, 그 책이 내게 어떤 시간과 마음을 남겼는지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와 각별한 추억이 있고, 나를 위로해 주었고, 내 삶을 돌아보게 했고,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을 조용히 짚어주었던 책들. 그런 책들이 더 오래 남아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고민, 이런 책에는 비싸고 귀한 책보다는 그런 책들을 담았다. 비싼 책이 아니라, 아직도 어른이 되기에 서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책들. 나 역시 그런 시기를 지나며,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싶었던 사람 중 하나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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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0 17: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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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0 18: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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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2025-07-10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인이 된 남편의 책장을 정리한 입장에서 한 말씀 드린다면 너무 많은 책을 남겨 두시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전에 누군가 유명인에게 증정 된 작가 서명이 있는 책이 중고 책방에서 더러 발견 되어 빈축을 사는 일도 있었는데 제가 그런 일을 했더라구요. 일일이 책을 다 점검 할 수 없고 한꺼번에 처리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더군요. 연구실에 있던 책과 집의 서재에 있는 책을 정리 하자니 이게 가능한 일이 아니더라구요. 한 트럭분의 책을 다 실어 내자면 감상에 젖어있을 여유가 없었어요.박균호님은 아직도 너~~~무 많은 시간과 여유가 있을테니 손수 정리를 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남아있는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소장 할 수 있을 만큼의 의미 있고 소중한 책을 남긴다면 자녀도 기쁘게 자랑스럽게 소장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저러나 어쩜 그리 책을 자주 출간 하시는지 그것도 참 대단한 능력이다 싶네요. 새책 출간 축하합니다.

2025-07-10 2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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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1 0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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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1 1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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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7-11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독서에세이를 내봤고(그땐 순전히 운이 좋았지만) 여전히 독서에세이는 누군가에 의해 나오지만 작가님의 이 책은 웬지 처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작가님의 이런 시도가 좀 이른 건 아닌가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작가님이나 저나 살아 온 날들 보다 살아갈 날들이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 어느 때 한번 이런 책을 쓰던지 읽는 것도 의미는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작가님이 남다른 마음으로 쓰시지 않을까 합니다.
지난번 왠지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아 인사를 못 드렸는데, 이 페이퍼를 빌어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쓰시느라 수고 많이하셨고, 축하드립니다.^^

2025-07-11 1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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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1 16: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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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7-11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저도 언제가 제가 세상에 없을 때 우리 딸들이 아빠가 시시콜콜 일상 이야기를 썼던 글들을 읽어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놓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어쩌면 언젠가 시간이 나면 어떤 특정한 주제별로 글들을 모아둘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박균호 2025-07-11 12: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자식에게 부모와 관련된 이야기는 갈수록 소중하지 않을까요? 감은빛님도 좋은 글 남기시길 기대합니다 !

2025-07-16 0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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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6 0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