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다음엔 아무것도 못 쓰겠다 - 연극에서 길어 올린 사랑에 대하여
최여정 지음 / 틈새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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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라는 개념이 인간이 획득한 지식을 체계화하고 후대에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영어 단어를 단지 명사라고 규정할 수 없는 용례가 수도 없이 많은 것처럼 우리는 종종 분류가 만든 경계가 얼마나 허무하고 헐거운 것인지 실감한다


연극과 무대에 관한 글을 주로 써온 최여정 작가가 쓴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다음엔 아무것도 못 쓰겠다>라는 책이 그렇다. 우리는 편의상 문예 작품을 수필, 소설, 시 따위로 분류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저 수필이라는 좁은 분류에 가둬두기엔 안타깝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다음엔 아무것도 못 쓰겠다>는 사랑을 주제로 최여정 작가 자신의 이야기와 더불어 연극, 영화, 책을 오간다. 그리고 숱한 문장들을 모두 외우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절묘하며 통쾌하다. 그러니까 최여정 선생의 글은 그저 산문이라고 정의할 수 없으며 모두가 아름다운 서정시의 아우라가 품긴다. 가령 이런 문장들.

 

나는 늘 믿어 왔다. ‘편지와 술이 없었다면 내 마음을 몰라주는 당신에게 어떻게 고백의 말을 할 것이며, 술이 없었다면 당신의 입술에 어떻게 키스할 수 있었을까.

 

결혼이란 시소를 함께 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올라가고 나면 내가 올라가고, 그다음엔 또 네가. 그렇게 차례차례 오르락내리락 마주 보며 웃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여정 작가가 겪은 가족과의 사랑, 남자와의 사랑은 예술 작품에 등장하는 사랑과 절묘하게 이어진다. 러시아 외교관이었던 유부남을 사랑했던 이야기를 담은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고 그 지독한 사랑에 탄성을 지르지 않은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혹시 그가 자신에게 뭐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에이즈 검사를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랑 말이다. 그러나 최여정 작가 사랑의 사랑 이야기를 읽다 보면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 결코 문학적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을까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가 다른 사람이면 증오심이 일어날 정도였다가, “나야.’라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순간 숨이 멎은 듯 제정신을 잃었다가 정상으로 돌아오는그런 기분.

 

그러나 정작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다음엔 아무것도 못 쓰겠다>를 읽다가 가장 감탄한 부분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고 최여정 작가의 아버지와의 사랑이었다. <리어왕>을 통해서 통제권의 상실돌봄의 필요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와의 일화를 꺼내 든다. 약속 장소로 향하다가 접촉 사고를 낸 아버지에게 뭘 보시다가 한눈을 판 거에요? ‘운전하실 땐 정면을 봐야지.”라고 다그치는 딸에게 임을 꾹 다물고 창밖을 내다보던 아버지는 마침내 입을 떼신다.

커다란 흰 나비가 창문에 앉는 거야. 요새 나비가 잘 없잖아.”

 

어쩌면 최여정 작가의 유려한 문장은 스치는 가을바람에 휘청이는나이에 이르기까지 소년 같은 감수성을 잃지 않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최여정 작가 부녀의 사랑도 글솜씨도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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