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에서 딩동 소리가 나고 나는 빨래를 꺼내 넌다. 물론 빨래를 너는데 있어서 지켜야 할 사항에 관해서 아내가 훈시를 한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맨발로 차가운 베란다로 나섰다. 아무리 얼렁뚱땅 이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빨래 너는 철학과 기준이 있다.
그건 그렇고 아내가 베란다 근처로 다가오는데 느낌이 하수선 했다. 우리 집 식구(그래봐야 3명이지만)들이 자주 하는 장난이 거실에서 베란다 문을 잠가서 감금하는 것이다. 다른 계절이면 모르겠는데 한 겨울이라면 애교를 떨면서 석방해달라고 하소연하기가 어렵다. 특히 성질이 포악하고 급한 나는 버럭 화를 내기 십상이다.
불길한 예감은 왜 빗나가지 않는 것일까? 왜 오발탄은 백발백중일까? 걱정하던 데로 아내는 슬며시 베란다 문을 닫으려는 기세다. 내가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저 사람은 이 엄동설한에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맨발로 서 있는 나를 내모는 것일까?
나도 살아야겠다 싶어서 빨래고 뭐고 집어치우고 탈출할 준비태세를 갖췄다. 석방시켜주는 대가로 내가 치러야할 수모는 상상하기도 싫다. 속옷 바람으로 임영웅의 ‘바램’을 열창시키고도 남을 사람들이다. 아내와 딸은.
예전처럼 전광석화처럼 아내는 문을 잠그고 나는 한줌의 반공간을 버팀목 삼아 어쨌든 탈출하려고 바동거리는 것이 내가 예상한 그림인데 오늘은 좀 이상하더라. 아내는 확실히 문을 잠그려는 의도로 움직이긴 하는데 예전과 좀 달랐다. 시골에 살다보면 소만큼 착하고 순한 동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름날 성가시게 하는 파리를 쫓을 때 꼬리로 설렁설렁 주의만 준다. 결코 파리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이 없다.
아내는 시골 역을 출발하는 완행열차처럼, 나른한 오후에 파리를 쫓는 소처럼 천천히 문을 잠그고 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 양반도 나이가 들면서 패기가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런 장난을 치기에도 측은한 존재로 보이는가? 장난은 치고 싶은데 내가 화내는 모습을 보기는 싫은 것인가?
굳이 탈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빙긋이 웃으면서 빨래를 손에 쥔 채 아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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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1-07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가에서 측은지심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이라고 하지요?
아내분의 마음을 제 마음에 빗대어서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ㅎㅎ

박균호 2021-01-07 18: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사실 저도 소심하게 문을 닫는 모습을 보고 측은지심을 느꼈더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