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한국사회가 품고 있는 미개함을 훌륭하게 야유한다.
그래서 나는 야유하는 내용자체엔 무척 만족스러우며 찝찝한거 한점 남김없이 망설이지 않고 냄비바닥에서 닥닥 긁어낸 것에 박수를 보낸다.
그 문제들에 저자가 분노하고 야유하는 것은 무척 당연하다.
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오른쪽으로 쐐기박혀버린 정치,
폭력을 피하려고 폭력의 심리에 기대어 자위自衛하는 대중들,
모든 물리적 경제적인 것을 “자유”롭게 약탈하려는 신자유주의,
뇌와 양심이 나침반을 잃어버려 정처없이 헤매는 지식인과 언론,
21세기를 몇 년이나 지난 지금도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문제점들이 새삼스러운게 아니라서 참신성은 별로인 내용이지만 이를 속 시원히 지적하거나 충고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싶다. 그래서 이 책의 질은 등급이 충분히 높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자꾸 그 부분이 얘기하고 싶어지는건 나 역시 저자의 스타일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자연스레 사그라들지 않기 때문이다.

“변태”, “어린이”, “동물의 왕국”, “지능장애 수화기”, “뿌지직”, “몸뚱이”라는 단어들 그 자체에 나는 거부감같은건 전혀 없다. (진중권의 말대로) 그것이 어떤 문장속에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지는 것인데, 무지몽매한 내가 이 상태로 논리적으로 설파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정도 말하면 언어구조주의 이론인가를 전공한 그는 내 거부감의 이유를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 단어들과 달리 “야바위”, “원시적 짓거리”, “누렁이”들은 적당하게 쓰였다.

그가 불의에 분노하는 것은 옳다. 그 분노가 고상하건 천박하건 점잖건 속되건 상관없이 옳다. 썩어빠진 세상을 부정하는 것도 옳다. 그 비판 대상을 끌어올릴 수 없는 바닥으로 내팽개쳐도 옳다. 문제는 그 모양새가 전투적이거나 통쾌하기보다는 비열함을 풍긴다는 것이다. 그 비열함은 당사자에도 제3자에도 씻어내기 어려운 불쾌감과 일종의 상처를 준다. 사람말고 죄만 미워해도 충분하다.
책의 뒤에 진중권론을 쓴 노혜경씨는 그가 유머러스하고 윤리적인 매력남이라고 하지만 난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간파해내는 감수성이 없어서일수도 있지만 진중권의 그 비열한 스타일을 “유머”로 느끼는 감수성따위 갖고 싶지도 않다.
아마도 이런 면이 그의 명석함과 윤리를 대패질하는 요인일것인데 책에서의 이 유일한 아쉬움을 빼면 토달만한 것없이 한국 초상에 대한 필요하고 완벽한 비판서이다. 덧붙여, 형이상학적인 논리비판 말고 정말로 “엑스 리브리스”에 어울리게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사태에 대한 실례를 증거로 비판되는 형태의 책도 나와주었으면 좋겠다.(좀전에 마이클 무어의 책을 읽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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