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병화, 밤의 이야기 20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 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에 남아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밤, 고독, 소망, 삶, 그리움 그리고 너...

이 밤...결국 나는 너를 찾고 있었던 것이 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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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택, 끝이 까맣게 탄 새 풀잎

 

  봄을 느껴보고 싶고, 봄을 보고 싶습니다.

  푸른 눈을 틔우는 나무 가지 끝을 가만히 들여다보

고 싶고, 나물을 뜯어보고 싶고, 푹신푹신한 좁은 논

두렁길을 천천히 걷고 싶고, 논둑 밭둑에 돋아나는 풀

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내 빰에 부는 감미

로운 봄바람을 온 몸으로 느껴보고 싶고, 치마폭을 나

부끼며 마을을 벗어난 흙 길을 해 질 때까지 걷고 싶

고, 양지 바른 언덕에 앉아 해바라기를 해보고 싶습니

다. 시냇물이 흐르는 강가에 버들강아지 부드러운 솜

털을 가만히 만져보고 싶고, 마른풀을 태운 강변, 새

까만 재 밑에서 돋아나는 끝이 까맣게 탄 풀잎들의 파

란 몸을 보고 싶고, 얕은 강물로 나온 잔고기 떼들의

희고 반짝이는 새 몸을 보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들 중에서,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실은

  당신이

  제일 많이

  보고 싶답니다.

 

 

 

봄이 잡힐 듯...그러나 여전히 저 멀리에 있습니다.

오늘은 애써 다가오는 봄을 매섭게 몰아내는 눈도 내렸습니다.

산과 들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풍경 속에서 봄을 느껴보고 싶고 봄을 보고 싶었지만...

이 모든 것들 중에서,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실은

저도

당신이

제일 많이

보고 싶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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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월, 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아마 그 언젠가에 잊고 있을 것이다.

먼 훗날 그 때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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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소녀 2004-03-06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 김소월, 못잊어
 

초저녁 하늘이 너무도 맑아 하늘의 별들도 어제와 달리 영롱하게 보였다.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깊은 밤에는 더 많은 별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차갑게 얼어버린 별들을 따서 야곰야곰 깨물어도 보아야 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

자정이 다 되어 독서실에서 나오니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의 함박눈이 내렸다.

가로등 아래로 더 많은 눈송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소박한 하루의 일과를 마친 뿌듯함과 함께 예고없이 내리는 하얀 눈 송이가 인적드문 밤길,두려운 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혼자 실실 웃으며 걸어가기에는 내 마음에 가득 담고도 넘치는 기쁨이었다.

문득...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깊은 밤 전화를 걸어도 미안하지 않을 그 누군가가 내게는 없다는 사실을 아는 나는 그저 주머니 속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다 말 뿐이었다.

...이럴때 또다시 밀려드는 고독감은 잠시 잠깐 촉촉해진 내 감성을 곧장 메마르게 한다.

......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눈길 위의 외로운 발자국은

그리하여 고요한 그리움이 되고

이내 그 위로

소리없는 눈이 긴긴밤 수북히 쌓여

내 고독한 자취 감추어버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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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스님

아침 강과 한낮의 강은,그리고 저녁 무렵의 강은 그 표정이 판이하다.엷은 안개에 서린 아침 강은 신선하다.막 세수를 하고 난 얼굴 같다.귀밑머리에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화장기 없는 그런 얼굴 같다.한낮의 강은 깊은 잠에 빠져있다.꾸벅꾸벅 조는 것도 아니고 흐름도 멈춘 채 자고 있는 것 같다.강기슭에 떠있는 고깃배까지도 곤히곤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녁 강은,해질녘의 저녁 강은 잠에서 깨어나 생동한다.낮 동안 멈추었던 흐름도 저녁 바람에 다시 일렁이고,석양의 햇빛에 반사되어 고기 비늘처럼 번쩍거린다.저녁 강은 신비스럽다.강이 지닌 깊은 속마음을 넌지시 열어보이는 것 같다.강 건너 앞산의 그림자가 강심에 은은히 비치는 것이 마치 수묵화처럼 보인다.

저녁 노을이 비친 강은 성자의 얼굴처럼 지극히 고요하고 신비스럽고 사뭇 명상적이다.

 

 

법정 스님의 수상집 가운데 어떤 책에서 발췌했던 글인지 생각 나지는 않는다.

다만 그분의 모든 말씀은 내게 언제나 고요한 가르침과 침묵속 깨달음으로 다가올 뿐이다.

 현자는 바다를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했던가.

그러나 현자도 인자도 아닌 나는 강이 좋다.적막공산을 품고 도도히 흐르는 그 위엄있는 강이 나는 좋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와 같은 강도 좋지만 이쪽 강기슭에서 저쪽 강기슭이 보이는 그런 강이 더 좋다.행여 그런 강에 붉어진 앞 산그늘 노을이 수면 위에도 물들고,이내 어둠이 조용히 몰려와 달이 흐르고 별이 첨벙거릴지라면 난 그만 숨죽여 울어버릴런지도 모른다.

...쉴새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소란스러운 그 파도의 바다가 아닌 어디로 흘러가는지 조차 모르는 묵묵한 그 흐름의 강은 유년시절의 내게도,훌쩍 커버린 지금의 내게도 무언의 언어로 말을 건넨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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