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내가 유일하게 기르는 생명체인 대엽풍란이 어제 꽃망울을 틔웠다.지난 일년동안 때맞춰 물을 주고 행여 부족할세라 빛을 보게 했던 내 수고가 조촐한 환희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전날까지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던 꽃망울이 밤 사이 또롱...하고 터져 어제 아침 날 놀래켜 준 것이었다.

들길이나 숲길을 걷다가 이름모를 야생초나 야생화와 눈이 마주치면 즐겁기 그지없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한번 더 뒤돌아 눈길을 주거나 걸음을 멈춰서 찬찬히 들여다보지만 따로 화분을 가까이 두고 키우지 않는 나로서는 난초를 키우는 일이 꽤 이례적인 일이다.모든 생명체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가장 아름다우며 내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 생명체를 비좁은 화분에 담아 답답하게 키워 나 혼자 그 복을 독차지하는 것 또한 옹졸하고 치사한 일이라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 대엽풍란은 작년 이맘때 언니가 선물 받은 것이다.언니는 다른 일년생 화초처럼 이 또한 꽃이 지고 몇번 물을 챙겨주지 않으면 시들어질 것이라 짐작하여 이 화분을 쓰레기통 옆에 내버려두었다.어차피 죽을 거, 아예 물을 주지 말자는 심산으로 '안락사' 시킨 것이었다.
양 옆으로 뻗은 두개의 줄기에 대롱대롱 맺힌 꽃잎이 곱기도 곱거니와 나는 목 한번 축이지 않게 하고선 이 어린 것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만은 없어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었다.고맙게도 화분을 구입한 곳에서 '물 7일에 한번'이라고 써놓은 조그마한 푯말을 화분 머리에 꽂아 주었고 그 푯말 뒤에는 대엽풍란이라고 쓰여 놓았다. '아,네 이름이 대엽풍란이구나.' 이름을 알고 나니 금새 녀석과 친해진 것만 같았다.
일주일이면 시들어버리는 여느 꽃들과는 달리 이 풍란은 한달이 지나도 그 꽃잎이 누래지거나 오그라 들지 않았다.다만 그 은은한 연두빛 꽃잎은 항시 수줍게 아래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초여름에 접어들어 날이 더워져서야 이 꽃들은 제 몫을 다 하고 소리없이 고개를 떨구었던 것 같다.
간혹 바빠서 이 녀석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때는 7일을 넘기고 물을 준적도 있었다.목이 탔음에도 한마디 불평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을 녀석들이 측은해 그때마다 나는 평소보다 더 넉넉히 물을 적셔주기도 했다.내 이런 정성과 보살핌으로 녀석들은 날로 푸르게 자랐으며 어느날엔가는 새 잎이 뾰족...돋기도 했다.
그러던 작년 여름,무덥던 어느 날 나는 오랫동안 집을 비운적이 있었다.동생에게 물론 당부하고 갔지만 게으른 동생은 내 부탁을 하얗게 잊고서는 몇날 몇일 물을 주지 않았다.연일 30도를 훌쩍 넘는 무더위 속에 녀석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계속되는 폭염속에서 사람도 시름시름 지쳐가는데 이 여린 생명들이야 오죽 했겠는가.곁에서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이때는 분명 사나흘에 한번은 흠뻑 물을 줬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뒤늦게 언니가 물을 주어 살릴 수는 있었다.그러나 한참후에 집에 돌아가서 이 녀석들을 대하니 그 사이에 잎 하나가 심하게 꺾여 있었다.건강히 잘 자라던 녀석이었는데... 갑작스레 신체적 장애를 입은 것 마냥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때 나는 "무소유"라는 글이 떠올랐다.
법정 스님께서는 무소유라는 글에서 집착과 그에 따른 괴로움을 상기켜 주셨다.물론 소유에 의한 집착을 염두하지 않고 이 난초를 키운것은 아니었다.다만 야생에서의 풀과 꽃처럼 흠뻑 비를 맞고 넉넉하게 빛을 받을 수 없는 녀석의 처지가 딱해서 보살폈던 것이었다.내 남다른 보살핌과 관심에 녀석들은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지만 적적한 내 일상의 유일한 말 벗이 되어주곤 했기에(물론 언제나 내 일방적인 대화로 끝이 나긴 했지만) 나는 정을 준 녀석들과의 이별,그리고 그에 따른 상실감이 염려스러웠다.
애별리고愛別離苦

꽃을 피우고 전에 없이 환해 보이는 녀석들을 보고 오늘 아침,이 다음에 기회를 보아 적당한 그늘과 적당한 햇빛이 자리하는 산기슭에 이 녀석들을 옮겨 주자고 다짐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평온해졌다.


"푸른 꿈을 꾸고 너른 들로 훨훨 날으렴,대엽풍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8년동안 한결같이 오늘,3월 2일이면 난 학교에 갔다.

3월 1일 저녁에는 또다시 시작하는 새 학기에 대한 긴장과 기대로 편히 잠에 들지 못했던 나였다.

그러나 어제 나는 별다른 계획도 없이 잠자리에 들었고, 밤사이에 눈이 내려 등교길 교통체증이 우려된다는 아침 뉴스 소리에 눈을 떴어도 늑장을 부리며 가만히 TV앞에 앉아 리모콘을 만지작 거렸다.

'아,오늘 아침 나는 갈 곳이 없다,'

오늘의 일기예보에 당황하기는 커녕 실은 고소하기도 했다.

이 쾌감도 잠시...이내 나는 집에 있는 내가 싫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타인에게는 졸업은 '학업을 마치다'라는 의미(동목관계)의 卒業이겠지만 나에게는 졸업은 '졸렬한 업'이라는 의미(수식관계)의 拙業이라 할 수 있겠다.
생을 두고 언제나 진행형이어야 할 업(Karma)을 마쳤다라는 말이 상당히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고(설령 그 "업"이 학업에 국한된다 할지라도), 또 그간 내가 이루었다고 자부했거나 혹 그렇게라도 믿고 싶었던 업이란게 돌이켜 생각해보니 졸렬하고 치졸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겸손하다 못해 정말 모자란 탓일까.
초등학교 졸업식때부터 나는 단 한번도 가족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그 "식"을 치뤄본 적이 없다.열 세살짜리의 내 눈으로는 그 의식이 참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여겨졌었고 그래서 수차례 오시지 말라고 당부 했음에도 불구하고 꽃다발과 카메라를 들고 기어이 날 찾아오신 어머니와, 난 싸움끝에 시간간격을 두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졸업식날 내게 자장면 한그릇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성이 난 어머니는 홀짝홀짝 울다가 잠든 내게 점심상도 차려주시지 않았으니 말이다.그 시절 난 끝끝내 날 이해하시지 못하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으며 한편으로는 졸업식에 일가친척을 동원하여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눌러대는 그 일련의 의미없는 행동에 기뻐하는 이들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내 자신에게 분해서 씩씩대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는 낮잠을 청했다.
중학교 졸업식때는 어머니가 학교에 당도하시기도 전에 내가 부리나케 집으로 가 버려 어머니와 길이 엇갈렸다.다행히 언쟁은 피할 수 있었지만 싸리눈이 지저분하게 흩날리던 그 날 추위속에서 날 찾으러 교실 이곳저곳을 기울이다 허탈하게 집으로 향하셨을 어머니가 눈에 선해 나는 어머니가 뒤늦게 집에 오시자 자는 척을 하였다.어머니는 나머지 가족에게 한숨을 내 뱉으시며 원망섞인 그러나 이제는 포기한 듯한 어조로 나란 녀석에 대해 말씀하셨다.그 날도 난 3년전과 같은 복잡한 마음때문에 소리없이 울다 지쳐 잠들었다.
고등학교 졸업식때는 이런 날 포기하신 어머니께서는 결국 학교에 오시지 않았다.

초등학교때부터 난 졸업을 앞두고 매번 내게 자문했었다.
그간 내세울만한 업적을 이루었냐고.
실은 내세울만한 업적때문만이 아니었다.
난 삶이라는 게 늘 과정의 연속이고 매 순간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느냐에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그런데 그 삶을 3년 혹은 6년 단위로 끊어 타인으로부터 내 삶을 평가받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웠으며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만 인정되는 세상의 시선에서 한편으론 별다른 결과물이 없었던 내 현실이 초라해 당혹스럽기도 했다.

이번 졸업식에는 어머니께서 오셨다.언니 그리고 동생까지도 왔다.
역시 이번에도 내게 "결과물"은 없었다.하지만 난 그간 6년을 보람차게 살아왔다.하지 못했던 그리고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에 대한 아쉬움은 헤아릴 수 없지만 되돌아 가도 난 지난 6년처럼 조금은 우둔하게 하지만 성실하게 지금의 이만큼만 걸어올 것이다.
아,나 역시 내 삶을 6년 단위로 끊어 평가하는 누를 범했다.그러나 스무살에 접어들어 적어도 난 성장하지 않고 살았던 십대 때보다 반뼘은 성장했기에 이를 기점으로 삼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앞으로의 내 삶은 7년,8년,9년 그리고도 쭈욱... 끊임없는 성장의 연속 "과정"에 놓일 것이다.


그래도 내심 "결과물"이 없이 마음이 편치 않은 내게 오늘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주위에 이번에 졸업하고 취업한 친구들 있어?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거봐, 또 열심히 하면 돼."

'그렇다.삶은 그런 것이었다.卒하지 않은 業을 위해 나는 다시 걷는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누아 2005-02-2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업식은 우리 어머니의 낙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을 졸업인데도 겨울에 학사모를 쓰고 친구들과 졸업식을 함께 했습니다. 어머니가 흡족해 하셨죠. 어머니께 별로 해 드리는 것도 없는데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님의 글을 읽으니 "졸업식"을 위해 졸업도 하지 않고 치렀던 제 졸업식 생각이 납니다.
결과물? 생은 매 순간이 결과이며 또 원인이 아닐런지요? 눈으로 다 환산해낼 수 없는 값진 것들이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는 결과물에 가려 버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쨌든 졸업 축하합니다. 사랑과 축복을 받는 일에 너무 인색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님이 아는 님이 님의 모든 것이 아닐런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흠뻑 축하와 격려를 받으시고, 다른 이들이 간절히 그것을 원할 때 나눠 주실 수는 없을까요? 제가 너무 오버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축하 좀 받아 달라구요...

티벳소녀 2005-02-28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조언,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타인으로 부터 받는 축하에는 늘 인색하고 또 어색했던 저입니다.그렇지만 님께서 보내주신 축하의 말씀은 감사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음속에 담아 두겠습니다.

법정 스님의 책에서 이런 문구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제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인생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님과 같은 분들이 어디엔가 분명 계시다는 건 참 흐뭇한 일인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반가웠습니다.

계획은 없지만 혹 이다음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졸업하거든 그때 초대해도 되나요,님을?

이누아 2005-03-0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광입니다!
 

하릴없이 마음만 버거운 여름이었다.

적막한 달빛 아래 걸음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어보아도

외로운 별 하나에 힘껏 뛰어올라 간절한 소망하나 걸어보아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여름날 밤에 뒤척이는 나였다.

실구름 드리워진 아찔한 하늘도

섧게 붉은 잔인한 저녁해도

내안에 문신처럼 깊이 박힌 그의 기억을 앗아가지 못했다.

 

... 사랑...이었을까...?

......바람...이었을테지......

 

 

가을이었다.

가을이왔다.

바람이분다.

그렇게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었다...

 

"제발 이 가을, 물기 마른 낙엽과도 같은 매마른 감성을 제게 허락하소서. 한줌의 미풍에도 나는 그를 모른다 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였으면 좋겠다...

날이 덥다보니 이런 게으른 몽상도 해 보고 실없는 웃음만  피...식...

내가 세상에서 정말 제일 좋아하는 남자, 김동률...

그의 노래 "잔향"은 노을이 지는 그 시간 늘 내 귓전에서 맴돌다 이내 나직이 내 입가에서 새어나온다...

 

:: 김동률 사,곡    <잔향>

소리 없는 그대의 노래
귀를 막아도 은은해질 때
남모르게 삭혀온 눈물
다 게워내고
허기진 맘 채우러 불러보는
그대 이름

향기 없는 그대의 숨결
숨을 막아도 만연해질 때
하루하루 쌓아온 미련
다 털어내고
휑한 가슴 달래려 헤아리는
그대 얼굴

그 언젠가 해묵은 상처
다 아물어도
검게 그을린 내 맘에
그대의 눈물로 새싹이 푸르게 돋아나
그대의 숨결로 나무를 이루면
그때라도 내 사랑 받아주오
날 안아주오
단 하루라도
살아가게 해주오

......
사랑하오
얼어붙은 말
이내 메아리로
또 잦아들어 가네......

 

 

그러나 어느 순간 코끝이 찡하게 외로움이 몰려오면 눈물 겹게 아름다운 그의 듀엣곡 <기적>과 닭살스러운 또다른 듀엣곡 <욕심쟁이>도 흥얼거려본다. 항상 이소은 부분만...

그렇게 한 여름 애달픈 그리움은 깊어만 가누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