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사랑이다 1
피에르 뒤셴 지음, 송순 옮김 / 씽크뱅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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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을 하면 사람이 이토록 바보가 되는 걸까. 늘 감정보다 이성이 살아있는 나는 이 소설을 이해하기에는 사랑이란 것에 한참 어리다고 본다. 그러니 나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이 소설이 말하는 사랑을 대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을 기대했다. 애가 끓어 절절한 눈물만 나는 아픔으로써의 사랑을 그리지 않았을까 하여. 더구나 이루어질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은 사제지간이라는 벽이 존재하기에.
 
지은이는 피에르 뒤셴. 이름 외에 그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어째서일까? 개인적으로 검색한 결과 다른 저서로는 <사랑을 위해 죽다><나 지금 죽어도 좋아><사랑에서 영원으로>등이 있다.
 
남자주인공은 18살의 학생 제라르, 그리고 그 학교 철학 선생은 31살 된 여교사 다니엘이다. 제라르는 선생을 처음 본 순간부터 특별한 감정에 휩싸이고, 같은 정치적 성향으로 만나 ‘5월혁명에 가담하기도 한다. 부상당한 다니엘을 업고 그녀의 집으로 간 제라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백한다. 여기서 다니엘은 기다렸다는 듯이그의 고백을 받고 바로 그들의 연애는 시작된다.
 
여기서 생각하는 건, 여자가 한 번의 결혼실패와 두 아이를 혼자 기르며 독립심을 가지고 교사자격증까지 어렵게 가졌는데, 제자가 뿌린 유혹에 이리도 쉽게, 단번에, 생각할 시간도 갖지 않고 경솔하게 사랑을 시작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만한 교양과 인생경험이라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사회적 파장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 이 소설에서는 그들의 사랑이 파장을 불러오는 것 자체, 그것이 통용되지 못하는, 그들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그저 한낱 가십거리로 치부되는 현상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의 감정이 소중해도 법과 질서와 통념이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그것, 그 시절에서는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것이었다면 좀 더 생각해 봐야 했다. 그들의 사랑을? 아니, 그들이 사랑방식을.
 
제라르는 부모의 반대로 인해 강제전학을 갔고, 거기서도 다니엘을 만나 동굴로 숨어버리자 여자는 재판에 회부되고, 아이는 정신병원으로 처넣어진다. 둘 다 많은 고통을 겪어가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의 요구와 타협하지 않는다. 결국 할아버지 집으로 옮겨지고 여자는 교도소에서 살게 된다. 겨우 가석방을 당한 그녀가 자살하는 것으로 마감되는 스토리.
 
왜 더 현명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좀 기다릴 수 없었을까. 사랑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세상에 보조 좀 맞춰준다고 그 사랑이 달아날 것도 아니었다. 앞에서는 예예하면서 세상을 기만하고 몰래 잠깐씩 사랑해도 되는 것을 굳이 집에까지 들어가서 그렇게까지 사랑의 회포를 풀었어야 했나. 그 부모의 상식도 좀 인정해 주면서, 아들을 향한 기대도 좀 충족시켜주면서 사랑해도 평생을 할 수 있는 사랑이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무모하게만 움직였는지.. 그런 점이 참 안타까웠다.
 
청소년 문학같은 전개다. 문체가, 필력이 이런 사랑을 논하기에는 너무 장황하다. 대화체만으로도 느껴지는 감정과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니 지루하게 흘러간다. 감정보다 많은 것을 글로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 특히 1권에서의 전개는 너무 교과서 설명 같아서 좀 아쉽다. 소재가 실화이다 보니 첨가해서 붙일 극적 구성보다는 핵심요소 전달에만 치우쳐 있어서 소설로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다. 차라리 더 압축적인 단편적으로 해석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생각보다는 아프지 않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아프지 않을 수 있는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까르페디엠식으로 지금 당장 사랑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값어치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들의 불꽃같은 연애가 실화였다는 점에, 책장을 덮는 독자의 마음이 조금 아프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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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클래식 27
조르주 상드 지음, 이재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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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과 편지를 계속적으로 주고받는 것은 많은 배움도 성장도 있게 하지만, 또한 자신의 은밀한 내면을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많은 감정의 기복을 낳기도 한다. 글로 맺는 관계는 대면하는 것보다 더 긴밀한 무엇인가를 요하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관계가 낳는 것과 유사한 갈등을 겪게 될 때도. 그 관계는 결코 타인의 조언 같은 것으로 성숙해질 수 없다. 더구나 마음 속 깊은 언어를 주고받는 사이라 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싶었다. 그녀처럼 사람에게 열정적이었고, 그것을 글로 낱낱이 표현해 낼 줄 아는 여인이 과연 그 시대에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녀의 섬세하고도 매혹적인 필력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녀 곁을 계속 맴돌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든 것은 배우고자 함이었을까, 느끼고자 함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저자의 이름만으로도 많은 기대를 주었다는 점이다.

조르주 상드. ‘쇼팽의 어미’같은 여인으로만 잘 알고 있다. 편지글에서는 ‘오로르 뒤팽’인 그녀의 본명을 사용하고 있다. 원래는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여성 작가로 유명하다. 시골마을 노앙에서 고독한 소녀 시절을 보낸다. 여기에서 맛 본 고독과 할머니를 보살피면서 드는 감정은 수도원 친구인 잔, 에밀리, 셰리에게 쓴 앞부분의 편지들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 중에서 잔과의 우정이 가장 각별하다고 보이는 것은 잔과 가장 많은 편지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18세때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으나 끝내 이혼한다. 이혼이 있기 전 그녀는 내통 관계를 지녔고, 그것이 남편과의 큰 마찰이 되었다. 편지 중반부에는 남편과의 사이가 무마되는 듯 보였으나 그것도 교양과 명예를 따지고, 사람들 시선이 중요했던 시절이었으니 조르주가 참았지, 지금 같았으면 애 버리고 나갈 여자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그녀의 내통남과의 편지에서 엄청난 로맨스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 오렐리앙[내통자], 내 사랑, 당신을 영원히 잃을지도 모르는 지금 그 말을 다시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 했던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어요. 그 다른 사람은 이제 내겐 중요치 않아요. 난 그 사람을 잊었어요. 한 번도 본 적도 사랑한 적도 없어요. 오직 당신만을 사랑했어요.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당신만을. 당신만이 그럴 자격이 있어요. (p. 166)

진실한 사랑을 하는 여자가, 자기의 사랑이 아니라고 해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것도 그의 남편에게 이토록 유린과 기만을 떨 수 있었을까. 그러고도 이 여자의 불륜은 정신적 쾌락의 불붙는 야욕이었다고 비하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더군다나 이런 문투의 연속으로 그녀의 심정을 얘기하니, 내막을 알고 읽는 이에게는 그녀의 언어마저 더욱 역겹게 다가온다.

그래요, 카지미르[남편], 날 믿으세요. 난 남을 속일 줄을 몰라요. 정말 그래요. (…) 내가 당신을 속이고 속마음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런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고 참을 수가 없어요. (p. 187)

수도원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편지, 혼인 관계를 기만한 연인과의 편지, 결혼 후 만난 친구들과의 편지로 구분할 수 있다. 총 72통의 편지를 다루고 있고, 1818년부터 1830년까지의 그녀의 편지를 순차적으로 실었다. 시간 흐름에 따라 여인의 인생 여정을, 삶의 변화에 따른 감성의 흐름과 성격적 결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또한 처녀 때와 아이를 낳은 여인일 때의 필치가 새삼 다르게 느껴짐으로써 여인의 성숙을 느끼기도 한다.

도덕적인 잣대를 들고 야멸찬 시선으로 이 책을 봐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실망하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문학’으로서의 실망이라기보다는 여자로서 가지는 그녀에 대한 실망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폐한 여성이었는데, 골골하는 쇼팽을 어찌 거두었는지 신통하다. 문체가 읽어 나갈수록 지루하기는 하지만, 그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듬뿍 담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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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대로
켄 브루언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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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선셋대로>는 살인을 저지르고 미쳐버린 여배우를 그린 1950년 미국의 작품이다. 아카데미에서 3개의 부문을 수상했는데, 시나리오 각본상, 음악상, 흑백미술상, 즉 예술적인 가치를 완전하게 인정받은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다. 워낙, 거장의 작품을 각색하는 작업이라 처음부터 고민이 많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리고 저자는 전작에 버금가는 걸작을 탄생시켰다.
 
저자는 켄 브루언. 1951년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태어났다. 자기의 고향을 소설에서 특별대우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25년 동안 아프리카, 일본,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했다. <The Guards>는 셰이머스상을 수상, 에드거상, 매커비티상 최종심에 올랐고, <The Killing of the Thinkers>로 매커비티상을 수상, <priest>는 배리상을 수상한다. <Blitz><런던 대로>2010년에 영화화 되었고, 그 외에 <A White Arrest><Bust><Slide>등의 작품이 있다.
 
소설은 주인공이 교도소에서 나오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술 먹고 사람패서 3년을 살았고, 나오는 날 친구 노턴의 차에 올라 누가 살던 좋은 집에 들어간다. 그 집에 살던 사람은 사채 쓰다 쫓겨났고, 그는 사채조직에 들어가 일을 하는 대가로 그 집에서 산다. 출소축하파티에서 만난 여기자가 늙은 여배우의 집 수리공 일을 하도록 주선했고, 그 집에서 배우 릴리언에게 성적 충동을 느낀다. 그 여자는 늘 다 안다는듯이 웃는다. 배우의 집에는 충직한 집사 조던이 있다.
 
사채일을 하면서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조직 보스는 그를 제대로 들이고자 주인공이 노턴 대신 범인의 덤터기를 썼다는 정보를 준다. 그런데 보스의 예상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주인공은 죽음의 위기에 몰린다. 여기서 갑자기 조던이 나선다. 주인공을 죽이려던 킬러와 보스를 죽이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여동생과 사랑하는 여인까지 연속적으로 죽는다. , 주인공 곁에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는다. ?
 
결말이 또렷했다. 복선과 암시가 노골적이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노출되어 있어서, 미스터리 추리소설로서의 감질이나 반전에 대한 설렘은 없었다. 그러나 전개과정에서의 저자만의 독보적인 구성과 감성을 자극하는 주인공의 하루하루가 참 좋았다. 교도소를 거친 하층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랄까, 냉소적이고 딱딱한 남자로서의 그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어쩔 수 없는 그를 대비하며 한 남자의 거친 인생을 보는 것 또한 새로웠다.
 
이 작품은 저자가 2001년에 발표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에서야 번역되어 나왔다. 작년에 이 소설이 콜린 파렐과 키이라 니이틀리라는 두 배우의 열연으로 재해석되었기 때문이리라. 콜린은 아일랜드 태생이고 키이라는 영국배우이며 자국고전영화에서 그 특징적 색깔을 보여준 바 있기에 영국과 아일랜드라는 제한된 국지적 색깔을 잘 표현해 냈으리라 기대하게 한다. 또한 20대 중반의 처녀가 릴리언 파머라는 60살은 되어 보이는 관능적인 여배우를 어떻게 표현해 냈을지 궁금하다.
 
저자의 문체야 실로 대단했겠지만, 그것을 감도 있게 살려낸 번역도 아주 훌륭했다. 범죄스릴러 뿐만 아니라 문학과 시에 젖어있는 주인공덕분에 이 소설에는 마음이 가는 명구들이 참 많다. 그런 것들이 이 소설에서 발견하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문학과 영화와 음악을 소개한다. 이런 작품에 쓰이는 그 요소들은 또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따로 기록해 놓았다가 하나씩 찬찬히 읽고 보고 들으려고 계획해 놓았다.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이 재미에 계속 소설을 붙드는 구나였다. 그렇게도 재밌게 찰기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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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넘버스, 숫자가 당신을 지배한다 - 모르면 당하는 확률과 통계의 놀라운 실체
카이저 펑 지음, 황덕창 옮김 / 타임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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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지의 색감은 눈에 확 들어오며 띠지를 피해 위쪽 중앙에 위치한 하나의 일러스트는 귀엽다. 그리고 왠지 이 책이 재미있을 것 같은 기대감 또한 심어준다. 표제는 어떠한가, 이 책 한권으로 나를 지배하는 숫자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칠 수 있다고 선전한다. 마케팅의 적절한 조화는 겉에서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저자는 카이저 펑. 캠브리지,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에서 통계학, 비즈니스, 공학 분야의 학위를 받았다. 사이러스 XM 라디오 사의 통계학자이고, 뉴욕 대학에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통계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광고와 소비자 행동에 대해서도 10년 이상 연구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의 첫 저서이다.

책은 5개의 주제를 가진다. 평균의 함정, 오류의 미덕, 평등의 모순, 결과의 비대칭, 확률의 미신성을 그 모티브로 가진다. 각 주제마다 두 개의 실제사례를 중심으로 끌어 나간다. 디즈니월드는 줄서서 기다리지 않고 놀이기구를 타는 FastPass티켓을 발급한다. 전체적인 대기시간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지만, 개개인이 갖는 심리적 요인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봤다. 반면, 고속도로에 설치한 램프미터링은 전체에게 이익을 주는 데이터가 있지만, 기다림에 지치는 개인들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요소가 다분하고, 저자 개인도 평균의 함정 때문에 ‘숫자보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움직여야 한다(p. 47)’고 말하고 있다.

2장에서의 사례는 ‘시금치에 의한 전염병 발병 원인의 역학적 추리’를 담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시금치가 전염병의 원인이라고 밝히고 해당상품의 리콜조치를 취했던 것에 대해 냉소적이고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이런 발언까지 나온다.

한편 몇 달 동안 미국 전역이 시금치에 대한 공포로 몸살을 앓았고, 관련업계는 1억 달러가 넘는 타격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리콜 전까지 시금치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략 500만 명 가운데 3명이 목숨을 잃었다. (p. 59-60)

만약 리콜 조치로 실제 구할 수 있었던 목숨이 별로 없었다면, 결국 이 집단 발병의 최종 결과는 사망, 입원치료 약 100여명 인 셈이다. 리콜로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은 체감하기 어려운 반면, 이 연간 판매량이 3억 달러가 감소하면서 업계가 입은 타격은 광범위했다. (p. 76)

회의론자들은 위스콘신 주에서 환자 다섯 명이 발생한 일을 가지고 시금치 리콜 조치를 내림으로써 전국의 소비자들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으며 이는 소비자 보호라기보다는 과잉대응에 가까웠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p. 78)

저자 자신이 회의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지금 경제를 논하고 숫자를 논하고 있지만, 사람 목숨이 달린 일 앞에서 숫자를 세자는 말은 어이가 없다. 업체가 입은 경제적 손실에 비해 죽은 사람이 적다는 말로 밖에 안 들린다. 저자 가족 3명이 죽었다면 이런 식의 숫자놀음이 가능한가. 마치 3명이 아니라 3천명은 죽었어야 이해타산이 가능한 리콜이었다고, 5명이 아니라 5만 명은 입원을 했어야 타당한 처사였다고 말하고 있다. 생명의 가치를 감히 기업의 손실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몇 명이 죽어나가야 시금치 리콜을 인정했을 것인가?’와 같은 무서운 반문을 일게 한다.

3, 4, 5장의 여러 내용들을 통해서 통계학의 영향력, 그리고 그 방대한 쓰임새를 본다. 또한 숫자로 인해 파생되는 많은 오류와 데이터로 산출하는 통계학의 한계도 배운다. 그리고 현재까지 쟁점이 되고 있는 경제적 사안에 대해서도 주제와 결부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표제에서부터 풍기는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숫자 세계에 대한 실체 분석과 그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저자는 모든 부문에서 자신의 고정된 관념과 입장을 피력한다.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제시된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획일화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듯, 저자의 관점에서만 설명되고 있다.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뒷장은 앞부분에 대한 요약정리다. 사례까지 다시 언급을 하며 진행하는 정리부분은 ‘이것만 읽어도 저자의 요지와 책의 흐름을 80%는 이해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줄 정도로 핵심적이다. 오히려 앞부분에서 주는 느낌이 다소 산만하고 방대하며 조잡한 느낌이 있고, 사례분석에만 급급한 나머지 흥미롭지 못한 전개로 이어지는 감이 있어 끝내는 지루하다.

통계학이 잡아내지 못하는 변수, 그것은 숫자논리로 계산될 수 없는 인간세계의 가장 큰 묘미이다. 계산만으로 설계된 세계는 ‘기계’에만 적용될 수 있다. 물론 거기서도 ‘버그-오류’라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생각보다는 재미가 없어서 놀랐다. 원래 이런 책은 계속적인 흥미유발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변수’가 아니겠는가. 이 책 또한 그런 ‘변수’에는 당해내질 못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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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비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독식 비판 - 지식 경제 시대의 부와 분배
가 알페로비츠 & 루 데일리 지음, 원용찬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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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 알페로비츠와 루 데일리의 공동저서이다. 가는 메릴린드 대학교 라이어넬 바우먼 석좌 교수이며 민주주의 초대 이사장이다. 주요 저서로는 <원폭 투하 결정><미국, 자본주의를 넘어서>가 있다. 루는 공공 정책을 연구하는 조직인 데모스의 선임 연구원이다. 저서로는 <신과 복지국가>가 있다. 이 책은 다분히 정치적 색깔이 녹아있다. 저자를 보자. 좌파색이 강하다. 보수 쪽 정치기질이 있는 사람은 이 책 읽다가 혈압약 먹어야 할 것이다.

책은 크게 두 편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선조의 업적’을 방대하게 설명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문자발명은 ‘외부입력장치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했고, 이것이 모든 지식발전의 토대가 됨으로써 지금까지의 무궁한 성장 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가 밝힌 오류 하나를 지적한다.

회화적 표상으로부터 점차 추상 문자로 이행된 뜻 깊은 전환점은 나폴레옹이 1799년에 발견한 기원전 200년의 로제타석에 담겨있다. (p. 58)

로제타스톤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그의 부하 프랑스군 공병장교 피에르 부샤르가 진지구축작업 중에 발견했고, 그 후에 압둘라 자쿠스 메노우 장군에게 보고했다. <패트릭 헌트의 ‘역사를 다시 쓴 10가지 발견 참고>

발명가 ‘개인’에 관한 영웅적 관점과 우대시를 타파하기 위해 ‘꼭 그 인물이 아니었더라도 역사적으로 동시적 발명 사례는 많이 있었고, 그것 또한 예전에 기여분에 기댄 총체적 결과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만들어낸 역사적 성과와 노력까지 깎아내리려는 태도는 불편하다. 물론 그가 아니더라도 인류는 발전해 왔겠지만, 그 또한 그 성과를 통해 인류에게 공헌한 바는 인정해야 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2부에서는 ‘지대’를 비유로 하여 ‘불로소득의 개념’을 이해시키고 있다. 이런 불로소득이 사회에 의해서 해소되어야 할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사회로부터 재분배전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럼 묻는다. 사회는 완전한가. 믿을만한가. 한 개인이 지니면 안 된다는 논리 하에 걷어 들인 그 많은 부를 사회는 누려도 되는 것인가. 지금 대부호들은 오히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사적재단에 기부하는 추세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들이 실천하고자 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거론되지 않는다.

사회가 건강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사회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깨끗한 정치를 실현한다는 보장이 있어야, 불로소득 또한 사회에 환원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불공정한 사회에서, 또한 불완전한 제도들이 팽배한 정책들이 난무한 정치계의 병폐들을 보면서도 불로소득의 부당함을 비판하며 ‘그 잘난’ 사회에 환원을 옹호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저자의 비판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에 부자가 존재해야 할 타당성은 없다. 왜? 다 선조의 덕이지 내 노동이나 내 능력의 값으로는 절대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누적된 조상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누리는 후대는 더더욱 돈 많이 버는 꿈을 접어야 할 것이다. 그저 남들의 공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를 향한 과도기적 사상이다. 내 노동력 - 그것도 점점 인정해 주지 않는 현대인의 능력- 이상으로는 돈을 소유할 수 없고, 선조의 은덕으로 받은 소유를 전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공산주의에 이르는 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여러 경제학자의 학설들로 내용을 전개하면서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거의가 사회주의 학자의 견해를 인용한 것으로서 지식적인 근거의 측면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의 이구동성’들을 갖다 붙여 놓은 격이다. 문체는 그야말로 비판적이다. 더 이성적이고도 객관적으로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부자들에 대한 배아픔’이라도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연속이다.

저자의 결론은 무엇인가? 결국 ‘일단 세금이나 많이 걷자’ 이다. 어떤 식으로 세금을 걷어야 마땅한지, 저자가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불로소득을 책정하는 기준’이나 ‘공공의 유익을 위해 사회가 추진해야 할 과제’같은 것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단지 기준마련을 위해 생각해 보라는 말로 끝난다. 보았는가? 이것이 경제학자가 내민 비판의 실체이다. 공공을 위한 발전적 방향의 비판이었는가? 이런 정도의 비판이라면 똘똘한 초등학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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