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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론드 세트 - 전3권
조이스 캐럴 오츠 지음, 강성희.송기철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을 펼치자마자, ‘아 역시~’ 하는 흐뭇함이 들었다. 거장의 소설은 첫 문구부터가 다르지 않겠는가. 그녀가 쓴 이 작품의 첫 구절은 작품 전체에 대한 수준을 바라보게 하고, 기대감을 높이며, 마지막 문구에 다다를 때까지 작품에 대한 설렘을 유지하게 했다.
죽음은 암갈색으로 사그라지는 빛 속에서 대로를 따라 돌진하며 등장했다. (1권 p. 15)
저자는 조이스 캐럴 오츠. 편집자는 국내에서 그닥 유명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영미권 소설을 좋아하는 이라면 그녀의 작품 한 권은 읽지 않았을까’ 하는 훌륭한 유명작가이다. 나 또한 ‘멀베이니 가족’이라는 소설을 읽고 그녀의 작품을 다 긁어낼 정도로 열렬한 팬이 되었다. 1938년생, 그러니까 1926년생인 마를린 먼로가 한창 날릴 때 저자도 미국에 있었다. 물론 그녀는 문학의 세계에 빠진 소녀였기에 별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은 크게 세 분류로 나눈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 불행했던 무명 시절, 불행했던 스타 시절. 우리는 환풍구 위에서 날리는 흰색 드레스를 잡아 내리며 웃는 그녀를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지만, 저자는 ‘그래서 썼다. 이것들아!’ 하고 말하는 듯이 마를린 먼로를 넓게 펼치고 있다.
본명 노마 진. 엄마는 히스테릭한 정신병을 가지고 있는 헐리웃나라 광신도였고, 그런 어머니 밑에서 오줌을 지리며 자랐다. 수줍은 말더듬이가 된다. 엄마는 정신병원으로 가고, 그녀는 고아원으로 간다. 그 시절, 대공황이었고 세계대전의 전조를 보이는 처참한 환경에서 고아원에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그녀가 느낀 점.
노마진은 두 눈을 닦으며 인정했다. 자신은 상처를 받은 것도 아니었노라고. (1권 p. 137)
엄마의 얄궂은 심보로 입양은 안됐고, 어느 집에 일해 주러 팔려갔는데 거기 주인집 남자가 그녀에게 빠진다. 눈치 챈 부인은 그녀를 15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시켜 내보내고, 그 시절 전쟁에 환장한 남편은 1년도 안되어 출전한다. 집 나와 공장으로 갔다가 잡지모델을 시작하고 거기서부터 ‘마를린 먼로’의 인생길이 열린다.
생리를 시작한 이후 즉 여자가 되고 나서부터 늘 남자의 시선과 성적 욕망을 사로잡은 그녀. 보기보다 순진했고, 늘 그렇게 남에게 상처 줄줄은 몰랐던 그녀였다. 소설은 그녀를 한번도 ‘나쁜 년’이거나 ‘화냥년’으로 매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이기에 당연했다는 듯 소개한다.
이후에 결혼, 낙태, 유산까지 몇 번할 정도로 깊은 관계를 가졌던 남자 몇 명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만, 그 사이에 많은 남자스타와의 내통이 있었음을 실명거론으로 장식한다. 그야말로 밑구멍이 헐다 못해 찢겨나갈 정도의 정사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읽다보면 ‘아! 고만 좀!’ 소리가 절로 난다.
정작 그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부끄러움을 탔고, 연기에 있어서는 천재성과 완벽주의적인 면모를 과시했지만 그 외에 있어서는 너무나 어린 아이 같은 모습들이 가득했다. 일례로 그녀는 끝까지 말더듬는 버릇을 고수한다. 늘 남자를 달고 살 듯 그렇게 타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보게 된다. ‘밑’만 대준다면 그녀를 떠받들며 사랑해 줄 많은 남자들이 줄을 섰기에, 그런 아픔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도 홀로 설 수 없었음이 결과적으로 그녀 인생에 독이 되었다.
실존했던 한 여성의 인생을 집중 조명하여 적나라한 문체로 다루고 있다. 소설의 어지러운 구도, 불안정한 분위기, 산발적인 이야기 전개는 주인공의 인생과 맞물리는 듯한 의도적 설정으로 보인다. 1300페이지 넘는 소설이 오로지 한 여자의 정서만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가 잘 쓰는 규모 있는 구성력을 느낄 수가 없는 점이 아쉽달까. 자전적인 면 - 서사적 구성 -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사실적이기는 하나, 조이스이기에 그 이상을 기대했다면 소재상의 무리였을까.
노마진과 마를린 먼로의 사이에서 정체성에 대한 불안정함을 극복하지 못했고, 부모에 대한 갈증 또한 늘 그녀를 외롭게 했다. 자아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에 타의에 의해 많은 일들을 겪었고, 그 부작용은 그녀를 따라다니며 늘 불행의 씨앗을 뿌렸다.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어도 ‘스크린의 창녀’로서 육욕만을 채워주는 인형 같은 것인 줄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더 '현실에서의 창녀'를 마다하지 않았다. 진실로 그녀를 사랑했던 유명 극작가의 사랑은 때가 되니 지겨웠고, 권력을 보여주며 그녀를 가지고 노는 대통령에게는 뜨거웠다.
순진한 여성이 보기에는 가혹한 책이다. 호기심에 볼만한 책도 아니다. 오히려, 상처 깊은 여성이 본다면 그녀의 삶과 그 감정선에 공감할 수도 있지 않겠나 싶은 책이다. 마약 같은 문체랄까. 맨 정신에는 참 읽고 있기 뻑뻑한 작품이다. 결말 부분에 독자를 ‘헐’ 하게 하는 3연타가 진행된다. 끝부분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 조이스의 매력을 느끼며 책을 덮었다.
여배우는 자신의 인생에 의지해 연기한다. (3권 p.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