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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이름 1 ㅣ 왕 암살자 연대기 시리즈 1
패트릭 로스퍼스 지음, 공보경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어두운 숲의 공간에서, 몸에 각 제대로 잡힌 슬림한 빨간 머리 남자가 진갈색 천을 휘두른 채 위태하게 서 있다. 그의 존재로 인해 내 뿜는 광채는 신비하다 못해 고혹적이기까지 하다. 상처가 깊은 듯 얼굴은 창백하고, 뿜어내는 정서는 어둡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흰 꽃들의 상태를 볼 때, 표지 속 바람은 오직 그에게만 부는 것 같다. 표지부터 신선하고 호기심을 자아냄으로 매력적인 판타지의 세계를 자신하는 듯하다.
저자는 패트릭 로스퍼스.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한다. 이 소설은 그가 7년여를 공들인 작품이다. 여러 출판사의 거절 끝에 2007년 DAW출판사에서 겨우 출간했고, 단번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퀼 상, ‘퍼블리셔스 위클리’주관 올해 최고의 소설 상, 아마존 닷컴 최고의 책, 미국 도서관협회 알렉스 상을 수상했고, 2008년 로커스 상 후보작이었다.
웨이스톤 여관 주인은 빨간 머리의 남자. 보기보다는 나이가 많은 그의 이름은 크보스. 어느 날 그 동네에 시커먼 대형 거미의 모습을 한 악마가 출현한다. 이 거미무리를 내쫓기 위해 들어간 처소에서 유명연대기작가를 만난다. 거미와 싸우느라 둘다 부상이 심했고, 여관으로 돌아와 작가는 크보스의 정체를 알아본다. 그리고 크보스의 일대기를 쓰고자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액자식 구성으로 시대전환이 순발력 있게 이루어지고 있다. 크보스는 영국유랑극단 단장의 아들로 태어나 살아있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애번시라는 신비술사에게서 과학과 연금술에 관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무엇에든 통달할 정도로 총명함이 남달랐다. 애번시는 어느 동네 양조장집 과부와 눈이 맞아서 극단과 헤어진다. 그때 그의 나이 열한 살. 핼리액스와 그 일당은 극단 모두를 살해하나 극적으로 그만 살아남는다. 그의 부모가 ‘란레의 노래’를 만들고 있다는 이유로 천애고아가 된 주인공.
거지소년이 되어 모르는 도시를 3년 동안 유랑하며, 남루하고 비천한 청소년기를 보낸다. 얼마나 많이 맞고, 쫒기고, 무시당하며 살아왔는지 그전의 총명함은 고요했고, 살아남기 위한 방어기제만 남아있었다. 읽으면서, 한순간에 부모와 자기가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터전을 잃은 11살 어린 아이가 어찌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나 싶었다.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잔혹한 배고픔과 추위에서 너무 일찍 알아버린 세상의 쓴 공격이 그를 바짝 살아있게 하지는 않았을까. 보호막 없는 긴장감 속에서 부모의 부재를 감상할 여유 없이 보낸 그 시절이, 오히려 그 어린 아이를 더 단단하게 살 수 있게 한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가 15살이 되고, 어느 할아버지의 ‘란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대학에 갈 결심을 하는 것으로 1권이 마무리된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아이의 아픈 경험들이 낱낱이 드러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나는 이 책이 판타지책임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된다. 해리포터도 프로도도 부모가 없었다. 그저 어느 판타지나라 영웅이건 혈혈단신부터 되고 봐야 할 일이다.
재밌다. 재밌게 넘어간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영상미가 탁월하게 진행된다. 저자의 필력덕에. 깨끗하다. 주인공도 순수하지만, 글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대체로 맑아서 좋다. 1편이라 판타지세계의 흐름이 미적지근한 면이 있다. 그러나 아직 2. 3권이 있지 않은가. 기대할 무언가가 많은 책이다. 일단 독자를 사로잡기는 성공한 1권이다. 2권을 바로 보고 싶게 만드는 장치 또한 훌륭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