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벌써 나왔는데 뒤늦게 역자 후기를 의뢰 받았다. 2쇄에 넣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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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많다. 우선, 우리 집은 종이가 너무 많아서 큰 문제다. 일단 책. 이사라도 갈라치면 종일 이삿짐업체 아저씨들의 한숨소리와 불평을 들으며 기 죽어 있어야 한다. (책은 부피에 비해 무겁기 때문에 작은 상자에 조금씩 담아야 하고 일일이 빼서 상자에 넣었다가 위아래 앞뒤를 구분해서 다시 꽂아야하기 때문에 운반하는 데 손이 무척 많이 가는 물건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식구들이 ‘장서가’라고 불릴 만한 레벨인 것도 아니다. 거실 한쪽 벽면과 방 두 개에서 한 면씩을 책이 차지하고 있는 정도니까 (책이 두 겹으로 꽂혀 있고 못 꽂은 책이 두 상자 있긴 하다) 이 정도면 4인가구의 장서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글래드스톤이 “아마추어 책 수집가”를 위해 제안한 서재(본문 96쪽) 같은 것을 따라가려면 멀고도 멀었다. 게다가 요즘은 공간 문제 때문에 책은 별로 안 사고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보거나 전자책으로 본다.
그런데 집에서 공간 문제를 일으키는 종이가 책만은 아니다. 우리 집 식구 가운데 한 사람은 전자기기를 사면 설명서와 보증서는 물론이고 물건이 들어 있던 종이 상자와 종이 완충재까지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 옷을 사면 옷에 붙어 있던 태그를 잘라서 모아 놓는다.
물론 종이로 된 증서가 물질성이 있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함에 실체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때가 있다는 걸 나도 안다. 책이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생각이나 지식을 물리적으로 변환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읽지도 않은/않을 책들을 지적재산마냥 버리지 못하고 모아 놓는 거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모아서 정리하거나, 가족관계증명서를 증빙 자료로 제출하거나, 현금지급기에서 예금을 인출하고 명세서를 받아서 확인한다거나 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한다. 디지털 세대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는 중요한 일정은 휴대전화에 입력하고 나서도 또 달력에도 써놓아야 안심이 된다.
추상적 사실이나 행위에 형체를 부여해 ‘육화(肉化)’하는 역할을 하는 종이 말고, 어떤 물건의 케이스나 보증서, 꼬리표 따위 ‘부속 종이’를 따로 보관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건의 원초적 상태, 가격, 규격 등의 정보를 기록으로 남겨 둠으로써 어떤 존재의 증명, 곧 출생증명서 같은 역할을 하게 하려는 걸까? 이언 샌섬은 왜 “종이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을까? 어쩌면, 우리가 ‘쓸모없는 종이쪽’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미 다른 곳에 (실제 물건이나 사람으로, 온라인 공간의 메모리로, 어딘가의 시스템에 남은 기록으로) 존재하는 것을 재입증 또는 재확인하는 불필요한 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 디지털화 이전 시대의 잔존물이고 곧 사라질 습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우리 존재의 없어서는 안 될 반쪽, 피터 팬의 그림자 같은 건 아닐까?
이런 미래 사회를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쓰는 펄프는 전량 수입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서 제지산업을 국유화한다. 정부는 무역수지 적자를 이유로 펄프 수입을 점점 줄여나간다. 정부에서는 ‘종이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종이에 높은 소비세를 매기고 종이 대체품 개발을 지원하는 한편 폐지를 재활용하는 공장을 폐쇄하는 등 강제적으로 변화를 주도한다. 종이 없는 사회로의 전환 기반은 이미 꽤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국민들도 어렵지 않게 적응한다. 없어도 되는데 습관적으로 썼던 종이들이 모두 사라진다. 우편물은 모두 이메일로, 책은 전자책으로, 뉴스나 광고는 전자기기를 통해서, 담배는 전자담배로, 붕어빵은 비닐봉지에, 글을 주고 받을 때는 전자문서로, 낙서를 하고 싶은 아이들은 태블릿에 수천 수만 장을 그리고 저장할 수 있다. 물건을 살 때나 계약을 할 때나 가입 신청을 하거나 할 때 불필요하게 종이를 주고 받는 관습은 이제 사라진다. 휴지나 포장용기 등은 다른 값싼 화학물질로 대체된다. 사람들은 종이 없는 삶에 쉽게 익숙해지고, 이제 전에 대체 왜 그렇게 종이를 많이 썼는지, 왜 쓸데없는 종이가 주위에 그렇게 많이 널려 있었는지 이상하게 생각될 지경이다. 가끔 향수에 젖어 옛날에 나온 종이책을 읽으려고 펼쳐 들면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글자 크기를 조절할 수도 없고 검색도 안 되고 무겁기도 하고 먼지도 많고 어쩐지 비위생적인 기분이다. 내용과 표현이 구식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에서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펄프와 종이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써야 하는 종이가 있기 마련이다. 아니 사람들은 무언가가 귀해질수록 더욱 그것에 집착하고 탐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정부의 감시를 피해 가내수공업으로 종이를 재활용하는 ‘밀지(密紙)’ 지하조직이 생긴다. 암시장에서 폐지가 비싼 값에 거래된다. 재생종이에 (이제 골동품이 된) 연필을 쥐고 손으로(!) 걸음마 하듯 삐뚤빼뚤 쓴 편지를 선물하는 게 연인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늘어난 폐지 수요를 어떻게 충당하나? 사람들은 창고에 먼지를 쓰고 쌓여 있는, 곰팡이 냄새 풍기는 책들, 아무도 읽지 않는 종이더미에 눈을 돌린다. 어차피 썩어 없어질 종이인데 깨끗하게 재활용해서 쓰면 좋지 않나. 내용은 전자문서로 다 남아 있으니까 아무 때나 필요할 때 불러서 보면 되지.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종이책은 쉽게 사그라지고 소멸하더라도 낡지도 썩지도 않는 전자책은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책이 모두 폐지가 되어 사라지고, 종이라는 것이 재활용하고 또 재활용해도 부족하여 거의 씨가 말라버린 때에 접어들어, 우리는 우리나 다른 것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생각을 표현하고 지식을 전달할 매체와 수단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제 진정한 디스토피아가 펼쳐진다(짐작했겠지만 여러분이 읽고 있는 것은 레이 브래드베리의 <화씨 451>과 샌드라 불럭이 나온 영화 <네트>가 종이죽처럼 뒤섞인 나의 악몽이다).
왜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가장 먼저 제지산업부터 장악했는지, 이제야 그 엄청난 음모와 개인성 말살의 계획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화씨 451>에서처럼 책이 발견될 때마다 소방대원이 출동하여 요란하게 책을 불에 태울 필요도 없다. 정부 정보요원이 단말기 앞에 앉아,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의 글은 지우거나 정부 입장을 옹호하는 글로 살짝 바꾸어 놓으면 된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가, 독재정권 관계자들만 편집할 수 있는 거대한 위키 문서가 되어버린 셈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도 종이가 없으니 글을 물질적인 실체로 남길 수가 없다. 온라인에 쓴 글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도 포기 못하고 조악한 재생용지에 인쇄한 전단으로 자기 생각을 전달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시스템에서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면 된다. ‘사유재산권’이라고 하는 개념도 생각만큼 튼튼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어느 날 국가 등록 시스템에서 내 존재가 지워졌다고 해 보자. 어떻게 나라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것인가? “이건 제 출생증명서고요, 이건 예방접종수첩, 유치원 졸업장, 초등학교 성적표, 친구들한테 받은 편지, 일기장, 고등학교 졸업앨범, 통장, 건강보험증, 계약서, 주민등록등본, 보험가입증서...” 다만 종이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종이가 우리의 그림자인 게 아니라 우리가 종이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종이’에서 시작된 나의 몽상은 여기까지 흘러갔다. 이제 왜 이언 샌섬이 ‘종이’라는 흔하디 흔한 재료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폭넓게 아우르면서도 종이가 빼곡 들어찬 듯 빽빽한 글을 써냈는지 짐작이 간다. 종이는 이언 샌섬의 말을 빌면 “모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핵심이자 진공인 “궁극의 맥거핀”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펼쳐낸다. 이제 여러분이 종이를 모티프로 이야기를 쏟아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