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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이 새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제목이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다. 제목을 듣는 순간 심금이 울렸다. 내가 어릴 적에 가장 좋아하던 공룡. 그런데 지금 아이들 공룡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공룡. 내가 신경 못 쓰는 사이에 아파토사우루스와 동일공룡임이 밝혀져 공룡계에서 퇴출되었다고 한다. 태양계의 행성들 이름을 읊을 때 저절로 흘러나오는 음절들을 마무리 못하고 입을 멈춰야 할 때 아쉬움처럼 뭔가 허전함으로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다. 


<쥬라기 공원>을 처음 극장에서 보았을 때 (지금 보면 아마 CG를 발로 했냐?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나는 물가에 초식동물 떼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었다. 지금도 뚜렷이 생각난다. 고3 때였고 신영극장이었다. 호박 안에 화석화되어 있던 어린 시절의 꿈이 현실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우리 애들 어릴 때에도 내가 공룡을 계속 밀었는데 애들 상상력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애니메이션, 게임, 장난감 등 다양한 형태로 접하는 포켓몬이 있는데 공룡 따위야 재미도 없고 밋밋하고 비현실적?으로 생각될 것도 같다. 공룡 뿐 아니라 내가 어린 시절에 푹 빠졌던 것들을 어떻게든 애들한테 들이대보았는데 번번이 별 반응이 없었다. 구니스, ET, 페르시아의 왕자(게임), 길창덕 만화, 플란더스의 개 이런 거. 처음에는 애들 취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것들을 다시 보니까 왜 재미없어 하는지 이해가 갔다. 실제로 상대적으로 재미가 없다. 요즘 세상이 30년 전에 비해 너무 재미가 있어서 어릴 때는 완전 재밌었던 것들도 지금 보면 재미가 없다. (요즘 애들한테 어릴 적 극장에서 재미나게 본 김청기 감독의 만화영화 틀어줘 봐라. 내가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요즘 애들은 참 불쌍하다. 재미있는 것 찾기가 힘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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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지않는나무 2015-04-09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란더스의 개나 소공녀 같은 건 지금도 재밌더만... 덜 자라서 그런 건지... 너무 자라 버린건지... 김청기 건 30년 전에도 별 느낌없더라... 문화 사대주의?
 

잘못 놓인 책 

도서관에 이 책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서관에 갈 때마다 찾아 보았지만 빌릴 수가 없었다도서관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분명히 도서관에 있다는데 청구기호를 보고 제자리를 찾아 보면 없는 거다그러다가 엉뚱한 자리에 꽂힌 걸 우연히 발견했다짐작대로 아무도 손 대지 않은 새 책이었다제자리에 있지 않은 책은 없는 책이나 다름없다

 

이렇듯 책이 물리적 실체에 매어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쉽게 불에 타고 썩어 없어지는 덧없는 물질로 이루어진 책이 사라지면 그 안에 담긴 생각도 사라지도록 할 수는 없다고책의 영혼을 육신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혹은 무한히 증식하는 텍스트에 (문자적으로비유적으로파묻히지 않고 그 가운데서 쉽게 항해하도록 하자는 것이 책의 디지털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책에 관한 책

<페넘브라의 24시 서점>은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여겨질 만큼 재미있는 '핫한 신상책이었다. 5년 전에 읽었다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으로부터 5년 뒤에 읽으면 촌스러워 견딜 수 없을지 모를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있는 듯한 책이었다재미난 트위터나 페이스북 메시지처럼 짧게 즐기고 순간 손가락질로 넘겨버릴 책그래서 '책에 관한 책'이지만 책을 찬미하는 책인지 책을 조롱하는 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자리에 꽂힌 책

이 책에서 과거와 미래를 각각 담당하는 것이 페넘브라 서점과 구글이다샌프란시스코에서 디자인 일을 하다가 실직한 클레이 재넌은 페넘브라 씨가 운영하는 24시간 서점 밤근무 점원에 지원한다. "좋아하는 책이 있느냐"는 페넘브라 씨의 면접 질문에 <용의 노래 연대기>를 세번 읽었을 뿐 읽은 책이 거의 없다고 솔직히 털어 놓았지만 페넘브라 씨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자리에서 클레이를 채용한다페넘브라 서점의 앞부분은 평범해 보이는 헌책방이다하지만 클레이가 근무하는 동안에 서점을 찾는 손님이 하루에 한 명 꼴이 될까 말까 할 지경이니 헌책 장사가 이 서점의 존재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해답은 뒤쪽의 비밀스러운 서가,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가득한 오래된 책이 가득 꽂힌 서가에 있다

이곳이 보통 서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클레이는 친구 닐, 맷과 구글에 근무하는 여자친구 캣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페넘브라 씨와 "부러지지 않은 책등"이라는 비밀결사의 비밀에 다가가고 쩜쩜쩜...

 

 

!스포일러 있음!

 

줄거리를 조금 더 밝히자면여기 꽂힌 책들은 그냥 희귀본 고서가 아니다유일본에 가까운 책이라고 한다.종이책의 원전성유일무이성물신성이 극대화된 책들인 셈이다

 

그런데 클레이는 "부러지지 않은 책등회원들이 이 책들을 대출해 간 시간 순서를 3D 모델링 방식으로 시각화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물신에 다름 없다고 여겨졌던 종이책들이어떤 위치를 표시하는 좌표였다면책이 꽂힌 자리가 무언가를 나타내는 기호일 뿐 책의 내용은 아무 의미가 없다면절대적이라고 느껴졌던 물성도 기호로 치환가능하다면

 

 

생명의 책

그렇다고 하더라도이 책들 가운데 단 한 권의 책창립자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코덱스 비테'(codex vitae, 생명의 책)만은 범접할 수 없는 비밀을 담고 있다고 한다수 세기 동안 아무도 풀 수 없었던 이 책의 암호를 풀기만 하면영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고 하니.

 

그런데 클레이는 이런 생각을 한다

"왜 암호를 손으로 풀려고 고생하지책을 스캔해서 활자를 비트로 바꿔서 컴퓨터가 퍼즐을 풀게 하면 되잖아?"

 

쉽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해결책인데물론 여기에 결사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러지지 않은 책등'의 제1독자이자 '페스티나 렌테'라는 기업의 수장인 코르비나는 코덱스 비테를 사슬로 묶어 지하 도서관에 감금해 놓고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그런데 '페스티나 렌테'라는 회사가 전자책의 무단복제를 막는 DRM의 수호자라는 것 또한 흥미롭다책의 복제를 막고 유일본을 유지하여 책과 독자의 1 1 관계를 지키는 회사다.

 

어쨌든 클레이는 코덱스 비테를 몰래 스캔하는 데 성공한다그래서 코덱스 비테의 텍스트를 추출해서 물성을 제거한 데이터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구글의 슈퍼컴퓨터와 최고 프로그래머들과 (노가다를 담당하는) 크라우드 소싱이 결합하면(세상에 이것을 능가할 두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어떤 암호라도 풀 수 있다

 

이렇게 되면폐쇄적인 비밀결사에 속한 극소수의 독자만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의 수호자에세상 모든 텍스트를 스캔해서 0 1로 이루어진 데이터로 만들어 한곳에 모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글의 민주적열망이 맞서는 것처럼 되어간다그렇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구글은 세상 모든 책을 가지고 돈벌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책과 독자가 1대 1이 아니라 1대 다로 만날 수 있게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거대기업이다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가 책을 접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것처럼 종이의 제약을 벗어난 전자책이 만인에게 혜택이 되리라는 건 섣부른 기대였던 것 같다.

 


다시 종이책

그리고 놀랍게도 구글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암호해독 프로젝트가 실패하고 만다비밀을 푸는 열쇠는 다시 원전으로 돌아가야 찾을 수 있었다정신은 물질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걸까.


소설 마지막에 클레이는 코덱스 비테를 스캔한 이미지를 프린트한 종이책을 만들어 2달러를 받고 사람들에게 판다종이-디지털-다시 종이로 한 바퀴 돌아왔다.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디에 발을 두어야 할까 망설이는 클레이나 우리는 결국 페넘브라 씨가 소설 초반에 한 말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물론 책과 독자의 관계는 사적인 것이야자네 친구가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이 책들을 진지하게 읽을 거라고 하면 자네 말을 믿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천천히 서두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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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노팅힐 미스터리>가 에밀 가브리오의 <르루즈 사건>보다 몇 년 앞서 나왔기 때문에 최초의 추리소설로 평가받는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도서관에 갔다가 가브리오의 작품 번역본이 작년에 재출간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르루주 사건>(페이퍼하우스, 2011)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신기하게도 번역자가 신소설작가 안국선의 아들인 안회남이고 번역연도가 1940년이다. 안회남은 김유정과 절친했고 소설도 많이 발표했는데, 월북한 뒤에 문단에서 잊힌 듯하다. 1940년이면 사실 원작보다 거의 한 세기 뒤의 번역이긴하나, 현대의 독자가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고색창연한 문체가 19세기 소설에, 더군다나 최초의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작품에 (<노팅힐 미스터리>에 그 타이틀은 내준다 하더라도 <르루주 사건>이 '최초의 탐정소설'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썩 잘 어울리는 듯했다. 첫 대목을 베껴 놓는다. 


일천팔백육십이년 봄도 아직 이른 삼월 육일, 바로 사순재의 참회 화요일에서 이틀 지난- 목요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파리 가까이 있는 부지바르라는 읍 경찰서에 그 근처 존셰르란 촌의 여자 사오 인이 심상치 않은 모양으로 달려 왔다. 

"큰일 났습니다. 살인이 났습니다."

하고 고하였다. 

내용을 들어 본즉 그 촌에 사는 르루주라는 과부의 집은 문이 잠긴 지 사흘이 되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을뿐더러 그 후로 마을에서 그 과부의 모양을 볼 수 없다는 것으로 필시 집 안에서 누구에게 피살을 당하였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책이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10년, 20년 전에 나온 책만 해도 요즘 책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르고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번역도 물론 마찬가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굳이 계속 새로 번역하기는 좀 뭣한, 고전이 되지 못할 책들의 경우는 어떨까? 시간이 얼마나 흐르면 읽을 만했던 번역이 낡게 느껴져 폐기해야 할 때가 되는 걸까? 아니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그 책의 수명이 다하거나 호소력이 약해지는 걸까? 그런 한편으로 나의 언어감각도 나이를 먹어, 현대인들이 쓰는 언어에 가깝지 않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번역의 시간에는 지금 현재와의 동시대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작품과의 동시대성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르루주 사건>은 원작과 번역이 동시대는 아니고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기에 '둘다 옛날'일 뿐이지만, 그래도 옛문체가 주는 느낌이 작품의 신파성과 잘 어울렸다. 오늘날의 건조한 문체로 옮겨 놓으면 맛이 덜할지 모르겠다. 또 그 작품이 처음 국내에 소개되던 시점, 대중에 주목받고 인기를 누릴 당시에 사람들이 읽던 형태로 책을 읽으면서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지금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도 (고전을 제외하면) 요즘 작가가 요즘 쓴 책을 번역하는 일이 대부분일 것이다. 내가 번역하는 책이 한 세대가 지난 뒤에도 잊히지 않고 읽힌다면, 내 번역이 낡고 촌스럽게 여겨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원저와 동시대성을 가졌다는 의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적어놓고 보니 별것도 아닌 생각을 했다.


사실, 번역에 시간성이 있다, 세대마다 달라져야 한다, 아니면 혹은 원저 생산연도와 비슷한 시기에 번역된 책이 그 책의 시대적 배경을 더 잘 반영할지도 모른다, 이런 주장들에 조금 깊게 들어가면 번역계의 영원한 논쟁, 직역주의냐 의역주의냐, 출발어우선이냐 도착어우선이냐, 충실성이냐 가독성이냐, 랑그냐 파롤이냐,... 기타 등등 여러가지로 변주되는 그 유명한 논쟁이 다시 나올 수도 있다. 후자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은 번역이 언어의 사회적 변화에 따라 끝없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할 것이고, 전자를 우선시하는 사람은 원저의 '정신'에 가장 가까운 원저-동시대 번역을 선호할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번역비평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내가 기억하기에, 번역가의 이름이 최초로 각인되었던 것, 작가나 장인에 걸맞는 취급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 1990년대가 아닌가 싶다. 안정효, 이윤기 선생 등이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그전에는 거의 투명한 존재였던 번역가가 실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훌륭한 번역과 그렇지 않은 번역이 있다는 개념이 대두한 게 그때가 아닌가? 안정효, 이윤기 선생이 번역가이기 이전에 소설가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때는 번역을 평가하는 데 있어 후자-가독성 쪽에 훨씬 무게가 실렸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 딱한 일이지만 이윤기 선생님은 여러 사람에 의해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내가 알기로 굳이 책까지 내서 이윤기 번역을 비판한 사람도 두 사람은 된다(강유원, 이재호). 요즘은 영어를 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원서를 손에 넣기도 쉬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독성-우리말 표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고 정해진 기준도 없고 꽤 주관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원문충실성만이 유일한 절대적 기준으로 군림하면서, 많은 번역가들이 아마추어 번역비평가들에게 쉽사리 까이는 일이 흔해졌다. 작년인가 올해 초인가 스티브 잡스 평전 번역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질 때 드는 생각은 이랬다. 여러가지 번역이 있을 수 있는데, 정확성이 미덕인 번역, 아름답거나 재치있거나 읽기 편하거나 아무튼 좋은 우리말 표현이 미덕인 번역, 빠른 속도로 나와서 독자들에게 빨리 안겨줄 수 있는 번역, 기타 등등...문학이건 이론서건 대중서건 정확성 하나의 잣대만 가지고 보는 건 무리다. (예로 든 세 가지 번역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뜻은 아니고. 특히 3번 미덕이 가장 취약하구나) 사실 완전히 정확한 번역이라는 것은, 이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도 하고. 


번역비평은 필요하나, 양쪽에 균형을 두지 않으면 반쪽 비평이 될 수밖에 없다. 번역비평에 뛰어들 분들은 그런 고민도 함께 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정확하냐?뿐 아니라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까지 가늠하고 평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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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종이 넘는다는 <위대한 개츠비> 번역을 두고 말이 많길래 나도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독자 입장에서는 구매 전에 포럼을 통해 누구 번역이 최고인지 판정이 내려지기를 바라는 게 당연할 거다. 그런데 아마도 번역자 입장일 내가 보기에는, 여기 저기에서 한두 문장씩 떼어 내어 비교하는 방식이 우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샘플링이 공평한 비교 방식이 될 수 없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글의 전체적 정조, 맥락의 연결, 문체, 인물의 성격과 관계 설정, 심지어 책의 물리적 형태까지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읽기 경험을 한두 문장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도 없을 터이니. 


그리고 이런 비교 방식에서 한 가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은 요소가, 시간 순서다. 

좋은 번역을 내놓고 싶은 번역가라면 당연히 이전 번역본이 있다면 그것들을 참고할 터이고, 따라서 나중에 나온 번역은 앞선 것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다. 번역 원고가 좋은 편집자의 손을 거치면서 품질이 개선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면 적어도 <개츠비> 번역에서 원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터무니 없는 오역이 나올 가능성은 이제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번역을 할 때 참고할 수 있는 다른 번역본이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으려고 노력할 테지만 이미 누군가가 좋은 단어/표현을 썼다면 그걸 (눈에 뜨이지 않게) 훔치고 싶은 충동을 굳이 억누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적당한 단어/표현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당연히 그걸 써야하지 않겠는가. 이런 경우에, 문장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으므로 표절은 아닐 테지만 다른 번역가의 아이디어를 훔쳤으니 정신적으로는 표절을 한 셈이다. 아니면 의미 파악에 도움을 얻는다거나, 혹은 반면교사로 쓰이더라도, 어쨌든 간에 다른 사람의 번역이 변증법적 발전의 토대로 쓰이게 된다. 그것에 대한 부채의식을 버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번역 작업도 (암묵적으로, 때로는 눈에 뜨이지 않는 표절을 통해) 축적, 계승, 발전이 이루어진다. 번역이건 창작이건 (혹은 그 사이의 무엇이건) 표절 혹은 모방/변용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시간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비교를 한다면, 극단적인 비유를 들자면 다빈치 그림과 피카소 그림을 놓고 누가 더 잘 그렸는지 비교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최근 판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츠비>처럼 꾸준히 수없이 많이 번역된 작품 가운데에서는 '오역이 적다는 의미에서 안전한' 번역본을 여럿 찾을 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오역 문제는 크게 고민하지 말고 취향에 따라 자기와 잘 맞는 번역가를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 전체적인 읽기 경험이 어떠할지는 말했듯이 한두 문장 맛보기로 미리 알 수 없을 테니, 적어도 몇 페이지 정도는 읽어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비교 논의 방식은 일단 번역자 입장에서 보기에 너무 불공평하고,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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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벌써 나왔는데 뒤늦게 역자 후기를 의뢰 받았다. 2쇄에 넣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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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많다. 우선, 우리 집은 종이가 너무 많아서 큰 문제다. 일단 책. 이사라도 갈라치면 종일 이삿짐업체 아저씨들의 한숨소리와 불평을 들으며 기 죽어 있어야 한다. (책은 부피에 비해 무겁기 때문에 작은 상자에 조금씩 담아야 하고 일일이 빼서 상자에 넣었다가 위아래 앞뒤를 구분해서 다시 꽂아야하기 때문에 운반하는 데 손이 무척 많이 가는 물건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식구들이 ‘장서가’라고 불릴 만한 레벨인 것도 아니다. 거실 한쪽 벽면과 방 두 개에서 한 면씩을 책이 차지하고 있는 정도니까 (책이 두 겹으로 꽂혀 있고 못 꽂은 책이 두 상자 있긴 하다) 이 정도면 4인가구의 장서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글래드스톤이 “아마추어 책 수집가”를 위해 제안한 서재(본문 96쪽) 같은 것을 따라가려면 멀고도 멀었다. 게다가 요즘은 공간 문제 때문에 책은 별로 안 사고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보거나 전자책으로 본다.

  그런데 집에서 공간 문제를 일으키는 종이가 책만은 아니다. 우리 집 식구 가운데 한 사람은 전자기기를 사면 설명서와 보증서는 물론이고 물건이 들어 있던 종이 상자와 종이 완충재까지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 옷을 사면 옷에 붙어 있던 태그를 잘라서 모아 놓는다.

  물론 종이로 된 증서가 물질성이 있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함에 실체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때가 있다는 걸 나도 안다. 책이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생각이나 지식을 물리적으로 변환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읽지도 않은/않을 책들을 지적재산마냥 버리지 못하고 모아 놓는 거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모아서 정리하거나, 가족관계증명서를 증빙 자료로 제출하거나, 현금지급기에서 예금을 인출하고 명세서를 받아서 확인한다거나 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한다. 디지털 세대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나는 중요한 일정은 휴대전화에 입력하고 나서도 또 달력에도 써놓아야 안심이 된다.

추상적 사실이나 행위에 형체를 부여해 ‘육화(肉化)’하는 역할을 하는 종이 말고, 어떤 물건의 케이스나 보증서, 꼬리표 따위 ‘부속 종이’를 따로 보관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건의 원초적 상태, 가격, 규격 등의 정보를 기록으로 남겨 둠으로써 어떤 존재의 증명, 곧 출생증명서 같은 역할을 하게 하려는 걸까? 이언 샌섬은 왜 “종이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을까? 어쩌면, 우리가 ‘쓸모없는 종이쪽’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미 다른 곳에 (실제 물건이나 사람으로, 온라인 공간의 메모리로, 어딘가의 시스템에 남은 기록으로) 존재하는 것을 재입증 또는 재확인하는 불필요한 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 디지털화 이전 시대의 잔존물이고 곧 사라질 습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우리 존재의 없어서는 안 될 반쪽, 피터 팬의 그림자 같은 건 아닐까?

 

  이런 미래 사회를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쓰는 펄프는 전량 수입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서 제지산업을 국유화한다. 정부는 무역수지 적자를 이유로 펄프 수입을 점점 줄여나간다. 정부에서는 ‘종이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종이에 높은 소비세를 매기고 종이 대체품 개발을 지원하는 한편 폐지를 재활용하는 공장을 폐쇄하는 등 강제적으로 변화를 주도한다. 종이 없는 사회로의 전환 기반은 이미 꽤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국민들도 어렵지 않게 적응한다. 없어도 되는데 습관적으로 썼던 종이들이 모두 사라진다. 우편물은 모두 이메일로, 책은 전자책으로, 뉴스나 광고는 전자기기를 통해서, 담배는 전자담배로, 붕어빵은 비닐봉지에, 글을 주고 받을 때는 전자문서로, 낙서를 하고 싶은 아이들은 태블릿에 수천 수만 장을 그리고 저장할 수 있다. 물건을 살 때나 계약을 할 때나 가입 신청을 하거나 할 때 불필요하게 종이를 주고 받는 관습은 이제 사라진다. 휴지나 포장용기 등은 다른 값싼 화학물질로 대체된다. 사람들은 종이 없는 삶에 쉽게 익숙해지고, 이제 전에 대체 왜 그렇게 종이를 많이 썼는지, 왜 쓸데없는 종이가 주위에 그렇게 많이 널려 있었는지 이상하게 생각될 지경이다. 가끔 향수에 젖어 옛날에 나온 종이책을 읽으려고 펼쳐 들면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글자 크기를 조절할 수도 없고 검색도 안 되고 무겁기도 하고 먼지도 많고 어쩐지 비위생적인 기분이다. 내용과 표현이 구식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에서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펄프와 종이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써야 하는 종이가 있기 마련이다. 아니 사람들은 무언가가 귀해질수록 더욱 그것에 집착하고 탐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정부의 감시를 피해 가내수공업으로 종이를 재활용하는 ‘밀지(密紙)’ 지하조직이 생긴다. 암시장에서 폐지가 비싼 값에 거래된다. 재생종이에 (이제 골동품이 된) 연필을 쥐고 손으로(!) 걸음마 하듯 삐뚤빼뚤 쓴 편지를 선물하는 게 연인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늘어난 폐지 수요를 어떻게 충당하나? 사람들은 창고에 먼지를 쓰고 쌓여 있는, 곰팡이 냄새 풍기는 책들, 아무도 읽지 않는 종이더미에 눈을 돌린다. 어차피 썩어 없어질 종이인데 깨끗하게 재활용해서 쓰면 좋지 않나. 내용은 전자문서로 다 남아 있으니까 아무 때나 필요할 때 불러서 보면 되지.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종이책은 쉽게 사그라지고 소멸하더라도 낡지도 썩지도 않는 전자책은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책이 모두 폐지가 되어 사라지고, 종이라는 것이 재활용하고 또 재활용해도 부족하여 거의 씨가 말라버린 때에 접어들어, 우리는 우리나 다른 것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생각을 표현하고 지식을 전달할 매체와 수단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제 진정한 디스토피아가 펼쳐진다(짐작했겠지만 여러분이 읽고 있는 것은 레이 브래드베리의 <화씨 451>과 샌드라 불럭이 나온 영화 <네트>가 종이죽처럼 뒤섞인 나의 악몽이다).

  왜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가장 먼저 제지산업부터 장악했는지, 이제야 그 엄청난 음모와 개인성 말살의 계획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화씨 451>에서처럼 책이 발견될 때마다 소방대원이 출동하여 요란하게 책을 불에 태울 필요도 없다. 정부 정보요원이 단말기 앞에 앉아,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의 글은 지우거나 정부 입장을 옹호하는 글로 살짝 바꾸어 놓으면 된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가, 독재정권 관계자들만 편집할 수 있는 거대한 위키 문서가 되어버린 셈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도 종이가 없으니 글을 물질적인 실체로 남길 수가 없다. 온라인에 쓴 글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도 포기 못하고 조악한 재생용지에 인쇄한 전단으로 자기 생각을 전달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시스템에서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면 된다. ‘사유재산권’이라고 하는 개념도 생각만큼 튼튼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어느 날 국가 등록 시스템에서 내 존재가 지워졌다고 해 보자. 어떻게 나라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것인가? “이건 제 출생증명서고요, 이건 예방접종수첩, 유치원 졸업장, 초등학교 성적표, 친구들한테 받은 편지, 일기장, 고등학교 졸업앨범, 통장, 건강보험증, 계약서, 주민등록등본, 보험가입증서...” 다만 종이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종이가 우리의 그림자인 게 아니라 우리가 종이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종이’에서 시작된 나의 몽상은 여기까지 흘러갔다. 이제 왜 이언 샌섬이 ‘종이’라는 흔하디 흔한 재료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폭넓게 아우르면서도 종이가 빼곡 들어찬 듯 빽빽한 글을 써냈는지 짐작이 간다. 종이는 이언 샌섬의 말을 빌면 “모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핵심이자 진공인 “궁극의 맥거핀”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펼쳐낸다. 이제 여러분이 종이를 모티프로 이야기를 쏟아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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