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놓인 책 

도서관에 이 책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서관에 갈 때마다 찾아 보았지만 빌릴 수가 없었다도서관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분명히 도서관에 있다는데 청구기호를 보고 제자리를 찾아 보면 없는 거다그러다가 엉뚱한 자리에 꽂힌 걸 우연히 발견했다짐작대로 아무도 손 대지 않은 새 책이었다제자리에 있지 않은 책은 없는 책이나 다름없다

 

이렇듯 책이 물리적 실체에 매어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쉽게 불에 타고 썩어 없어지는 덧없는 물질로 이루어진 책이 사라지면 그 안에 담긴 생각도 사라지도록 할 수는 없다고책의 영혼을 육신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혹은 무한히 증식하는 텍스트에 (문자적으로비유적으로파묻히지 않고 그 가운데서 쉽게 항해하도록 하자는 것이 책의 디지털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책에 관한 책

<페넘브라의 24시 서점>은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여겨질 만큼 재미있는 '핫한 신상책이었다. 5년 전에 읽었다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으로부터 5년 뒤에 읽으면 촌스러워 견딜 수 없을지 모를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있는 듯한 책이었다재미난 트위터나 페이스북 메시지처럼 짧게 즐기고 순간 손가락질로 넘겨버릴 책그래서 '책에 관한 책'이지만 책을 찬미하는 책인지 책을 조롱하는 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자리에 꽂힌 책

이 책에서 과거와 미래를 각각 담당하는 것이 페넘브라 서점과 구글이다샌프란시스코에서 디자인 일을 하다가 실직한 클레이 재넌은 페넘브라 씨가 운영하는 24시간 서점 밤근무 점원에 지원한다. "좋아하는 책이 있느냐"는 페넘브라 씨의 면접 질문에 <용의 노래 연대기>를 세번 읽었을 뿐 읽은 책이 거의 없다고 솔직히 털어 놓았지만 페넘브라 씨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자리에서 클레이를 채용한다페넘브라 서점의 앞부분은 평범해 보이는 헌책방이다하지만 클레이가 근무하는 동안에 서점을 찾는 손님이 하루에 한 명 꼴이 될까 말까 할 지경이니 헌책 장사가 이 서점의 존재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해답은 뒤쪽의 비밀스러운 서가,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가득한 오래된 책이 가득 꽂힌 서가에 있다

이곳이 보통 서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클레이는 친구 닐, 맷과 구글에 근무하는 여자친구 캣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페넘브라 씨와 "부러지지 않은 책등"이라는 비밀결사의 비밀에 다가가고 쩜쩜쩜...

 

 

!스포일러 있음!

 

줄거리를 조금 더 밝히자면여기 꽂힌 책들은 그냥 희귀본 고서가 아니다유일본에 가까운 책이라고 한다.종이책의 원전성유일무이성물신성이 극대화된 책들인 셈이다

 

그런데 클레이는 "부러지지 않은 책등회원들이 이 책들을 대출해 간 시간 순서를 3D 모델링 방식으로 시각화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물신에 다름 없다고 여겨졌던 종이책들이어떤 위치를 표시하는 좌표였다면책이 꽂힌 자리가 무언가를 나타내는 기호일 뿐 책의 내용은 아무 의미가 없다면절대적이라고 느껴졌던 물성도 기호로 치환가능하다면

 

 

생명의 책

그렇다고 하더라도이 책들 가운데 단 한 권의 책창립자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코덱스 비테'(codex vitae, 생명의 책)만은 범접할 수 없는 비밀을 담고 있다고 한다수 세기 동안 아무도 풀 수 없었던 이 책의 암호를 풀기만 하면영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고 하니.

 

그런데 클레이는 이런 생각을 한다

"왜 암호를 손으로 풀려고 고생하지책을 스캔해서 활자를 비트로 바꿔서 컴퓨터가 퍼즐을 풀게 하면 되잖아?"

 

쉽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해결책인데물론 여기에 결사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러지지 않은 책등'의 제1독자이자 '페스티나 렌테'라는 기업의 수장인 코르비나는 코덱스 비테를 사슬로 묶어 지하 도서관에 감금해 놓고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그런데 '페스티나 렌테'라는 회사가 전자책의 무단복제를 막는 DRM의 수호자라는 것 또한 흥미롭다책의 복제를 막고 유일본을 유지하여 책과 독자의 1 1 관계를 지키는 회사다.

 

어쨌든 클레이는 코덱스 비테를 몰래 스캔하는 데 성공한다그래서 코덱스 비테의 텍스트를 추출해서 물성을 제거한 데이터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구글의 슈퍼컴퓨터와 최고 프로그래머들과 (노가다를 담당하는) 크라우드 소싱이 결합하면(세상에 이것을 능가할 두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어떤 암호라도 풀 수 있다

 

이렇게 되면폐쇄적인 비밀결사에 속한 극소수의 독자만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의 수호자에세상 모든 텍스트를 스캔해서 0 1로 이루어진 데이터로 만들어 한곳에 모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글의 민주적열망이 맞서는 것처럼 되어간다그렇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구글은 세상 모든 책을 가지고 돈벌이를 하고 있지 않은가책과 독자가 1대 1이 아니라 1대 다로 만날 수 있게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은 거대기업이다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가 책을 접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것처럼 종이의 제약을 벗어난 전자책이 만인에게 혜택이 되리라는 건 섣부른 기대였던 것 같다.

 


다시 종이책

그리고 놀랍게도 구글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암호해독 프로젝트가 실패하고 만다비밀을 푸는 열쇠는 다시 원전으로 돌아가야 찾을 수 있었다정신은 물질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걸까.


소설 마지막에 클레이는 코덱스 비테를 스캔한 이미지를 프린트한 종이책을 만들어 2달러를 받고 사람들에게 판다종이-디지털-다시 종이로 한 바퀴 돌아왔다.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디에 발을 두어야 할까 망설이는 클레이나 우리는 결국 페넘브라 씨가 소설 초반에 한 말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물론 책과 독자의 관계는 사적인 것이야자네 친구가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이 책들을 진지하게 읽을 거라고 하면 자네 말을 믿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천천히 서두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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