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노팅힐 미스터리>가 에밀 가브리오의 <르루즈 사건>보다 몇 년 앞서 나왔기 때문에 최초의 추리소설로 평가받는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도서관에 갔다가 가브리오의 작품 번역본이 작년에 재출간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르루주 사건>(페이퍼하우스, 2011)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신기하게도 번역자가 신소설작가 안국선의 아들인 안회남이고 번역연도가 1940년이다. 안회남은 김유정과 절친했고 소설도 많이 발표했는데, 월북한 뒤에 문단에서 잊힌 듯하다. 1940년이면 사실 원작보다 거의 한 세기 뒤의 번역이긴하나, 현대의 독자가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고색창연한 문체가 19세기 소설에, 더군다나 최초의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작품에 (<노팅힐 미스터리>에 그 타이틀은 내준다 하더라도 <르루주 사건>이 '최초의 탐정소설'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썩 잘 어울리는 듯했다. 첫 대목을 베껴 놓는다. 


일천팔백육십이년 봄도 아직 이른 삼월 육일, 바로 사순재의 참회 화요일에서 이틀 지난- 목요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파리 가까이 있는 부지바르라는 읍 경찰서에 그 근처 존셰르란 촌의 여자 사오 인이 심상치 않은 모양으로 달려 왔다. 

"큰일 났습니다. 살인이 났습니다."

하고 고하였다. 

내용을 들어 본즉 그 촌에 사는 르루주라는 과부의 집은 문이 잠긴 지 사흘이 되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을뿐더러 그 후로 마을에서 그 과부의 모양을 볼 수 없다는 것으로 필시 집 안에서 누구에게 피살을 당하였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책이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10년, 20년 전에 나온 책만 해도 요즘 책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르고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번역도 물론 마찬가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굳이 계속 새로 번역하기는 좀 뭣한, 고전이 되지 못할 책들의 경우는 어떨까? 시간이 얼마나 흐르면 읽을 만했던 번역이 낡게 느껴져 폐기해야 할 때가 되는 걸까? 아니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그 책의 수명이 다하거나 호소력이 약해지는 걸까? 그런 한편으로 나의 언어감각도 나이를 먹어, 현대인들이 쓰는 언어에 가깝지 않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번역의 시간에는 지금 현재와의 동시대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작품과의 동시대성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르루주 사건>은 원작과 번역이 동시대는 아니고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기에 '둘다 옛날'일 뿐이지만, 그래도 옛문체가 주는 느낌이 작품의 신파성과 잘 어울렸다. 오늘날의 건조한 문체로 옮겨 놓으면 맛이 덜할지 모르겠다. 또 그 작품이 처음 국내에 소개되던 시점, 대중에 주목받고 인기를 누릴 당시에 사람들이 읽던 형태로 책을 읽으면서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지금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도 (고전을 제외하면) 요즘 작가가 요즘 쓴 책을 번역하는 일이 대부분일 것이다. 내가 번역하는 책이 한 세대가 지난 뒤에도 잊히지 않고 읽힌다면, 내 번역이 낡고 촌스럽게 여겨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원저와 동시대성을 가졌다는 의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적어놓고 보니 별것도 아닌 생각을 했다.


사실, 번역에 시간성이 있다, 세대마다 달라져야 한다, 아니면 혹은 원저 생산연도와 비슷한 시기에 번역된 책이 그 책의 시대적 배경을 더 잘 반영할지도 모른다, 이런 주장들에 조금 깊게 들어가면 번역계의 영원한 논쟁, 직역주의냐 의역주의냐, 출발어우선이냐 도착어우선이냐, 충실성이냐 가독성이냐, 랑그냐 파롤이냐,... 기타 등등 여러가지로 변주되는 그 유명한 논쟁이 다시 나올 수도 있다. 후자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은 번역이 언어의 사회적 변화에 따라 끝없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할 것이고, 전자를 우선시하는 사람은 원저의 '정신'에 가장 가까운 원저-동시대 번역을 선호할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번역비평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내가 기억하기에, 번역가의 이름이 최초로 각인되었던 것, 작가나 장인에 걸맞는 취급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 1990년대가 아닌가 싶다. 안정효, 이윤기 선생 등이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그전에는 거의 투명한 존재였던 번역가가 실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훌륭한 번역과 그렇지 않은 번역이 있다는 개념이 대두한 게 그때가 아닌가? 안정효, 이윤기 선생이 번역가이기 이전에 소설가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때는 번역을 평가하는 데 있어 후자-가독성 쪽에 훨씬 무게가 실렸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 딱한 일이지만 이윤기 선생님은 여러 사람에 의해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내가 알기로 굳이 책까지 내서 이윤기 번역을 비판한 사람도 두 사람은 된다(강유원, 이재호). 요즘은 영어를 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원서를 손에 넣기도 쉬워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독성-우리말 표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고 정해진 기준도 없고 꽤 주관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원문충실성만이 유일한 절대적 기준으로 군림하면서, 많은 번역가들이 아마추어 번역비평가들에게 쉽사리 까이는 일이 흔해졌다. 작년인가 올해 초인가 스티브 잡스 평전 번역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질 때 드는 생각은 이랬다. 여러가지 번역이 있을 수 있는데, 정확성이 미덕인 번역, 아름답거나 재치있거나 읽기 편하거나 아무튼 좋은 우리말 표현이 미덕인 번역, 빠른 속도로 나와서 독자들에게 빨리 안겨줄 수 있는 번역, 기타 등등...문학이건 이론서건 대중서건 정확성 하나의 잣대만 가지고 보는 건 무리다. (예로 든 세 가지 번역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뜻은 아니고. 특히 3번 미덕이 가장 취약하구나) 사실 완전히 정확한 번역이라는 것은, 이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도 하고. 


번역비평은 필요하나, 양쪽에 균형을 두지 않으면 반쪽 비평이 될 수밖에 없다. 번역비평에 뛰어들 분들은 그런 고민도 함께 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정확하냐?뿐 아니라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까지 가늠하고 평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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