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1994)을 -대략- 읽었다. 잘 모르는 분야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길래 생각나는 것만 적어 놓는다. 

스티븐 핑커는 물론 "화성인이 보기에는 지구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다 똑같게 보일 것"이라는 촘스키의 보편 문법론을 지지한다. 

이 책은 사피어-워프의 언어결정론/언어상대주의를 논박하면서 시작한다. 사피어와 워프는 1930년대에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제한한다, 언어에 따라 사고의 패턴이 달라진다고 하는 가설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으나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탓에 지금은 설득력을 거의 잃은 상태다. 

(그러고 보니 탈식민주의 담론에서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응구기-아체베 논쟁도 언어결정론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아체베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영어 같은 언어로 문학작품을 써서 식민지인들의 경험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했지만 응구기는 그것 자체가 식민화된 사고라면서 아프리카인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아프리카어로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상층 계급만 사용할 수 있는 지배자의 언어를 사용하면 토착어를 쓰는 하층민들이 이중으로 소외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어가 생각을 담는 틀이라는 이론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그런데 <언어본능>을 보면 언어상대주의를 뒷받침한답시고 나온 연구들이 (에스키모 언어에는 눈雪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백 종 있다든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실은 exoticism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하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언어결정론은 직관적 설득력은 있는 듯하나 입증하기가 불가능한 이론인가 보다.



그런데 작년에 읽은 기 도이처의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Through the Language Glass, 2010)은 내 기억에, 두 가지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던 것 같다. 언어결정론/언어상대주의를 논박하는 한편 언어가 본능이라는 관점에서도 거리를 두어, 언어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라고 했다. 

이 책 앞부분에서는 호머가 바다를 "와인색"이라고 한 것(한국어 제목이 여기에서 나왔다)을 비롯해 색깔을 가리키는 어휘의 가짓수가 시공간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점을 치밀하게 파헤친다. 호머의 표현 때문에 

1. 호머가 색맹이다.

2. 옛날 사람들은 지금만큼 시신경이 발달하지 않아서 몇 가지 색상밖에 구분하지 못했다. 

이런 설명들이 나왔지만, 기 도이처는 문화에 따라 색상을 나타내는 어휘의 개수는 다를 수 있으나 해당하는 어휘가 없다고 해서 그 색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진화에 따라 어휘가 다양해지는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왜 이야기를 하냐 하면, 고등학교 때인가 김소월의 "금잔디"를 배우면서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라는 구절을 들어 김소월이 적녹색맹이라고 주장한 학자가 있다고 들은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문학 연구를 하나 싶다. 


언어와 문화가 서로 주고니 받거니 함께 진화한다고 하는 게, 쉽고 빤한 설명이면서도 진리가 아닐까 싶다. 




사실 번역일을 하다보면 두 가지 언어 사이의 치환 작업을 계속 하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디에다 적어 놨다가 생각해 봐야지 하다가 진도가 급해 늘 잊어 버린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생각으로 옮겨 가니까 언어가 보편적이라는 말에 수긍이 간다. 그런데 어휘나 구문, 표현의 차이가 옮기는 과정에서 중화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때가 많다. 

오늘은 내가 번역해 놓은 문장에서 "깨진 요람"이라는 문구를 보고 놀랐다. 원문은 "broken cradle"이지만 요람이 깨지다니 어색하지 않나? 부서지거나 망가졌다고 해야 할 텐데 break의 1차적 의미가 "깨지다"로 떠오르기 때문에 이렇게 해놓은 거다.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았으면 그냥 무심코 넘어갔을 거라 자신감이 또 조금 떨어졌다. 원고를 아무리 봐도 번역투를 말끔히 제거할 수가 없다. 

한편 이런 딜레마도 있다. 번역투를 피하려고 영어스러운 표현을 거르다 보면 문장이 단순하고 표현이 유치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다고 해서 거기에 내 문장, 내 표현을 넣어 좀 멋을 내려 하면 그 부분이 너무 튀는 것 같다. 의미를 투명하게 전달하는 데 목표를 둘 것이냐, 아니면 글맛도 살려야 하느냐, 아무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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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감상을 나누고 평점도 올리고 하지만 책을 보고 나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쉽게 잊기도 하고 꼭 붙들어 두고 싶은 문장을 만나도 어디 구석에 들어있는지 기억해낼 수가 없다. 






얼마 전에 빌리에 드 릴라당(Auguste Villiers de L'Isle-Adam, 1838-1889)의 <잔혹한 이야기Contes Cruels>(물레, 2009)를 읽다가 눈이 번뜩한 순간이 있어 사진을 찍어 두었다. 




이 단편집(1883)은 호러, 풍자, 환상, SF, 역사 등 온갖 장르로 분류될 수 있는 단편을 모아 놓은 꽃다발 같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편, "우울한 이야기, 그보다 더 우울한 이야기꾼"은 그런 이야기성마저 뛰어넘는 탁월함을 보여 준다. 


D라는 사람이 자기 친구가 죽은 이야기를 매우 극적으로 벗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내'가 어떤 작가에게 들려준다. 그 작가가 이 이야기가 '소설감'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이제 이야기가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사실이 허구화되었다는 사실이 (그 사실이 주는 충격적 효과가 더해져) 다시 허구화된다. 이 단편집 제목은 <잔혹한 이야기>지만 유혈이 낭자한 이야기는 아니고, 현실이 냉혹하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최초 영어 번역본 제목은 <Sardonic Tales>였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허구가 던져주는 아이러니, 현실 담론의 허위성이 실존마저 위협하는 이야기("비엥필라트르 집안 아가씨들"), 낭만화된 허구 속 인물에 현실의 옷을 덧씌울 때 느껴지는 당혹스러운 낯설음("비르지니와 폴"), 환상이 가장 잔혹한 고통이 되는 반전("Torture of Hope", 이건 여기 안 실려 있다), 관념의 힘으로 죽은 아내를 되살려 내는 이야기("베라"), 그밖의 단편들 모두를 관통하는 주제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환상, 잔혹한 현실의 거울과 다름없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우울한 이야기, 그보다 더 우울한 이야기꾼"은 릴라당의 환상성은 우울한 현실, 더 우울한 이야기, 더 더 우울한 이야기꾼을 통해 완성된다고 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소외? 소격효과?가 일어나면서 우울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축하와 박수를 보내고 황당해 하기도 하지만, 그럼으로써 현실은 더욱 씁쓸해진다. 


릴라당의 <미래의 이브>가 작년말에 출간되었길래 도서관에서 찾아 보았는데 릴라당 책은 이 작품집밖에 없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뜻밖의 보물이라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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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잰 몬틸로의 <The Lady and Her Monsters: A Tale of Dissections, Real-Life Dr. Frankensteins, and the Creation of Mary Shelley's Masterpiece(귀부인과 괴물들해부실제 세계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메리 셸리의 걸작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William Morrow, 2013)를 읽었다.

 

메리 셸리와 주변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당대에 과학의술이 발전하면서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져 시체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벌어지는 일들도 같이 들려준다. (시체도굴업이 성업했을 뿐 아니라 시체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살인을 일삼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문제는메리 셸리 이야기와 시체 해부 이야기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시체를 꿰매어 괴물을 만들 때처럼 말끔하게 이어져 봉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두 가지 이야기가 각자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하나 왜 굳이 병치했는지 알 수 없게 끝까지 겉돌고 이야기가 깊어지지를 않는다재미있게 읽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우리의 '불쌍한 폴리도리'가 나오는 6장이다.

 

이름마저 귀여운 폴리도리가 누구인가 하면최연소로 명문 에딘버러 의대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젊은 의사였으나 스무 살 때 바이런 경을 만난 뒤로 인생의 내리막길을 죽 가게 된 불운한 사람이다얼마나 불쌍한 인생을 살았는지 이 사람에 관한 유일한 책의 제목이 <불쌍한 폴리도리Poor Polidori: A Critical Biography of the Author of "The Vampyre">일 정도다.

 

사실 폴리도리는 의학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역시 의사인 아버지의 강압에 따라 의대에 진학했기 때문에,의대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의료업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폴리도리에게는 의사보다는 작가가 되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그러니 그때 미모와 문재와 방탕함으로 이름 높은 바이런 경이 유럽으로 여행을 갈 때 같이 동반하여 바이런 경의 건강을 돌보아줄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런과 교류는 폴리도리에게 문필가가 될 길을 열어주기는커녕 주로 좌절감과 굴욕감을 안겨주었던 모양이다바이런 경은 오만하고 까탈스럽고 선병질적인 성격이고 폴리도리는 철이 없고 세련되지 못하고 짜증을 유발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니 두 사람이 잘 지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폴리도리의 문학적 야망의 행로에 대해서는 같은 범속한 인간으로서 서글픈 공감과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바이런은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퍼시 비시 셸리 일행과 합류한다셸리는 그때 연인인 메리 고드윈과 메리의 이복누이 클레어 클레몬트와 같이 있었다이름난 시인 셸리야 말할 것도 없고메리 고드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초의 페미니스트 저술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문필가 윌리엄 고드윈의 딸이며 나중에 셸리와 결혼하여 메리 셸리가 된다그러니 폴리도리의 말을 빌면그 사이에서 자기는 "달무리 안에 든 별"처럼 도무지 빛을 발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바이런은 아폴론셸리는 아도니스 같은 외모를 지녔으니 오징어가 되는 경험까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바이런이 셸리와 철학적인 대화를 나눌 때 폴리도리는 거기에 끼지 못했고 무시 당하고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다왕따가 된 폴리도리는 유곽이나 도박장을 찾아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간혹 작품을 써서 바이런셸리메리클레어와 같이 모인 저녁 시간에 낭독하기도 했지만 "무가치하다"는 가차 없는 평을 들었고 잔인한 천재들이 폴리도리의 작품을 가지고 두고 두고 놀려 먹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이런 일이 있었다폴리도리가 메리에게 푹 빠졌다는 것을 알고 바이런이 담을 넘어 셸리 일행이 걸어오는 길 쪽으로 뛰어내리라고 폴리도리를 부추겼다담을 훌쩍 뛰어 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메리가 반할 거라고 하면서폴리도리는 연애 전문가인 바이런의 충고를 받아들여 무용을 과시하려 했으나 생각만큼 멋지게 착지하지 못했고 롱에지에 그친 정도가 아니라 그만 발목을 삐어 망신살만 뻗치고 말았다.

 

폴리도리가 다리를 삔 날이 <프랑켄슈타인>이 태동한 그 운명적인 날이었던 것 같다일당이 저녁에 응접실에 모여 앉았고폴리도리가 자작 희곡을 읽자 사람들이 비웃었고바이런 경이 '우리 모두 저마다 유령 이야기를 하나씩 쓰자'고 제안한 날이다메리 셸리의 기록에 따르면 "불쌍한 폴리도리는(아마 폴리도리 전기 제목인 '불쌍한 폴리도리'가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구멍 안을 엿본 벌로 머리가 해골이 된 여자에 관한 끔찍한 아이디어를 냈다... 나도 이야기를 구상하는 데 몰두했다..." 그렇게 해서 <프랑켄슈타인>이 시작되었다그러니까 그 날바이런의 장난스러운 제안이 메리가 작가로서 첫발을 떼게 된 계기가 된 셈이다.

 

 그런데 그날은 메리뿐 아니라 폴리도리의 문학적 삶에서도 중요한 날이었다폴리도리도 (해골여인은 포기하고) <뱀파이어The Vampyre>라는 작품을 썼던 것이다이 작품이 빛을 보게 된 과정도 특이하다.

 

바이런과 씁쓸하게 헤어져 영국으로 돌아온 폴리도리는 어느 날 <뉴먼슬리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바이런 경이 쓴 <뱀파이어>"가 실린 것을 본다그런데 놀랍게도 그 작품이... 자기가 쓴 소설이었다누군가가 제네바에서 폴리도리가 쓴 소설 원고를 발견하고 바이런 경이 쓴 것이라고 착각하여 잡지사로 보낸 모양이었다바이런 경은 설마 내가 '그런글을 썼겠냐며 코웃음을 쳤고 잡지사에서는 바이런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하지만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는 바이런이 그랬던 것처럼 쉽게 코웃음을 쳐서 무시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작품성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고뱀파이어를 단순히 피 빨아먹는 괴물이 아닌 "섹시하고 매력적인 귀족"으로 설정한 선구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작가가 바이런이 아니라 폴리도리임이 인정된 뒤에도 <뱀파이어>는 인기를 누렸고 덕분에 여심을 흔들어 놓는 뱀파이어의 전통이 수립되고 계보가 이어져 브램 스토커의<드라큘라>에서 완성되어 오늘날 <트와일라잇>까지 줄곧 이어진 셈이다.

 

그뒤 폴리도리의 삶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제네바에 있을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도박장에 드나들었으나 워낙 허술한 사람이라 돈을 잃기 일쑤였고 큰 빚을 졌다의사로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환자가 죽어 나가 평판이 나빠졌고 병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결국 음독자살로 25세의 짧은 일기를 마감한다불쌍한 폴리도리.

 

폴리도리가 남긴 가장 큰 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육체적 매력을 지닌 시니컬하고 카리스마 있는 귀족 뱀파이어 캐릭터 '루스벤 경'은 바이런을 쏙 닮았다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생명의 신비에 관한 비전의 지식연금술 등에 탐닉하던 퍼시 셸리를 여러모로 닮았다('빅터'는 셸리가 어릴 적에 즐겨 쓰던 이름인 데다가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인데 프로메테우스는 퍼시 셸리의 자아이기도 하다. "결박이 풀린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라는 시가 있다). 후기 낭만주의의 최고봉이라는 두 시인그들의 이상주의낭만성감상성숭고함열정의 이면에 괴기스러움잔혹함파괴성공포어두운 욕망이낮과 밤이,꿈과 현실이 공존하는 백일몽 혹은 몽유병처럼샴쌍둥이처럼 함께 깃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메리 셸리의"괴물들"은 시체장사꾼들이 아니라 바이런과 셸리같은 빛과 어둠을 함께 지닌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 "파괴적 이상주의자"들일지 모르겠다여기저기 애를 만들어 놓고 책임은 지지 않는 남자들(셸리와 바이런은 둘 다 유부남이었고 클레어 클레몬트가 낳은 아기는 아버지가 바이런인지 셸리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저버리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이다그 괴물들과 사회적 생물학적 굴레에도 '불구하고'메리 셸리는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 괴물들 '덕분에쓸 수 있었던 걸까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집필에 퍼시 셸리는 손가락 하나도 거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그러나 셸리가 모델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그래서 메리 셸리는 낭만적 이상결박 풀린 상상력진보와 미래에 대한 기대감 이면의 무모하고 섬뜩한 광기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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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 on Trial: How Numbers Get Used and Abused in the Courtroom

by Leila Schneps, Coralie Colmez (Basic Books 2013.3.) 



우리 말로 하면 <법정에 선 수학>이라고 할까, 재판에서 수학이 증거로 사용된 사례에서 수학이 어떻게 오용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책이다. 


사법과 수학이라니 평소에 만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어울리지 않는 짝이다. 그런데 뭔가 싶어 별 기대 없이 펼쳐본 책이 빨려들 정도로 재미 있었다.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수학이지만 나의 삶과는 큰 관련이 없을 것 같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게 일상에 파고들어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웬만한 스릴러 저리 가라;;; 옛날에는 성직자들만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어서 거기에서 무한권위가 나왔다던데 오늘날에는 수학을 몰라서 억울한 꼴을 당할 수도 있는 건가!)


주로 사용된 수학은 일상생활과 관련이 많은 확률과 통계다. 수학교과서 가장 뒤쪽에 실려 있어 국민적으로 경시되지만 (내가 수능 볼 때는 확률과 통계가 아예 시험 범위에 없었다. 사과벌레씨한테 어제 들었는데 집합이 수학교과서 가장 앞에 나오는 것이 우선순위상 적당하지 않다고 하여 개정 교과서에서는 뒤로 밀렸다고 한다. 이참에 확률통계를 1장으로?) 직관적 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확률과 통계에 대해 우리가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수학적 결과는 다른 경우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책에 실린 영국, 미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있었던 열 가지 사건 가운데에는 몇 년 전 세계적으로 떠들썩했고 아직도 재판 중인 어맨더 녹스 사건, 폰지 사기의 원조 찰스 폰지 사건,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전설적인 수전노 헤티 그린의 유언장 위조 사건, 드레퓌스 사건(지문 감별법 이전에 범죄자 식별 시스템으로 널리 쓰였던 베르티용 시스템의 베르티용 씨가 부정확한 증언으로 드레퓌스의 유죄 판결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알게 되었다)처럼 잘 알려진 사건도 있고, 나머지 사건들도 증거가 부족해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학'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법률사적으로 중대한 사건들이다. 현대에 해당하는 앞부분은 답답한 사법 시스템, 억울한 누명, 편견에 물든 수학이 등장하는 재판 과정 이야기가 지금 겪는 것처럼 생생했는데, 폰지-헤티 그린-드레퓌스가 나오는 뒤쪽 이야기는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하나) 옛날 이야기 같아서 역사책 읽듯 조금 다른 기분으로 읽었다. 


사건의 발단과 전개, 결과를 세세히 전달하여 법정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치지만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책은 아니다. 단지 재판에 쓰인 수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내려진 판결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나중에 다른 의학적 증거나 증언 들이 추가되면서 진상이 좀 더 명확해진 사건도 있지만, 몇몇 사건에서는 수학적 증거 때문에 유죄 혹은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실제 범인인지 아닌지, 곧 판결 자체가 결과적으로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고 단지 과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정확한 계산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좀 맥 빠지는 감은 어쩔 수가 없다.) 결론이 나온 사건도 물론 있다. 소아병동 간호사였다가 환아들을 무더기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루시아 데 베르크 사건(7장)에서는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수년에 거친 조사와 재계산 끝에 판결을 반박하는 연구서를 발표했고 그 덕분에 무죄판결을 받게 되어 '수학적 정의'가 실현되기도 했다(재판이 끝나기까지 데 베르크가 이미 수년 복역했고 그 와중에 뇌졸중을 일으켰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책 중에서 다이애너 실베스터 사건(5장)을 조금 옮겨 본다. 

1972년에 다이애나 실베스터라는 여자가 강간 살해 당한 채로 발견된다. 피해자의 몸에서 정액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당시에는 DNA 감식법이 없었기 때문에 범인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미해결로 남았다. 2003년에 샌프란시스코 경찰은 과거의 미제 사건을 DNA 감식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해결해 보기로 한다. 30년 전에 보관해 두었던 다이애너 실베스터 살인범의 정액 샘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샘플이 변질되어, 변별에 사용하는 13쌍의 유전자좌 가운데 다섯 쌍을 확인하고 다른 두어 쌍에서는 일부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DNA 프로필과 일치하는 DNA를 가진 72세의 존 퍼킷 노인을 체포한다. (존 퍼킷은 성폭행 전과가 있으며, 나이, 당시 거주 지역, 당시 목격자의 증언 등과 외양도 일치했다.)


그런데 재판 중 변호인측에서 FBI가 사용하는 RMP(랜덤 매치 확률. 증거물과 임의의 사람의 DNA 프로필이 일치할 확률)에 의문을 제기한다. 


일단 유전자좌 일치 확률을 대략적으로 한번 계산해 보자. 13쌍의 유전자좌 각각이 특정 위치에 나타날 확률은, 통계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유전자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평균적으로 1/13(약 0.075) 정도 된다고 한다. 유전자좌 각각은 서로 독립적 요인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N개의 유전자좌가 일치할 확률은 0.075의 N승이다. 따라서 9개 유전자좌가 일치할 확률은 POWER(0.075,9)이다. 계산해 보면, 9개 일치 RMP가 130억분의 1로 명시되어 있는데 이것과 아주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변호인 측에서 최근 연구 결과를 들어 RMP의 신빙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트로이어라는 연구자가 2001년 DNA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조사한 바에 따르면, 65000명의 DNA 가운데에서 혈연관계가 없는데 9개 유전자좌가 일치하는 경우를 122쌍, 10개가 일치하는 경우를 10쌍이나 발견한 것이다. 

65000명 가운데 122쌍이라는 결과는 130억분의 1의 확률이라는 RMP와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난다.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고 둘 중에 어떤 게 옳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가지 다 옳을 수 있고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우선 13개 유전자좌 중에서 9개를 뽑는 경우의 수는 715개이다. (13C5)


또, N명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커플의 수는



이므로, 65000명이 만들 수 있는 커플의 수에, 9개 유전자 추출 경우의 수 715를 곱한 것이 서로 일치하는지 검증할 샘플의 개수가 된다. 계산해 보니



이나 된다. 


시료 개수 1조5천억에 일치 확률 130억분의 1을 곱하면 116이 나온다. 데이터베이스 연구에서 발견된 122쌍하고 큰 차이가 없는 수치다! 


이건 사실 생일 문제라고 하는 어디에선가 한두 번은 들어 봤을 패러독스다. 사람이 임의로 모였을 때 생일이 같은 두 사람이 있을 확률과 특정한 사람과 생일이 같은 사람이 있을 확률을 계산해 보았을 때 얼핏 비슷해 보이는 두 가지 경우의 확률이 크게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 존 퍼킷이 유/무죄일 확률은 아니다. (이 확률 계산은 뒤에 자세히 이어진다.) 



이 책에서는 엄밀하고 객관적이라고 하는 수학이 엉뚱하게도 편견이나 직관적 오해를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도구로 쓰인 사례들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통계청에서 정권에 유리하게 보이도록 통계의 발표 시기를 조절하거나 내용을 조정했다는 기사를 봤다. 한겨레 기사와 오마이뉴스에 실린 선대인의 글에 링크를 걸어 놓는다. 통계 자료의 항목이나 구간, 대상 기간 등을 조절해 전혀 다르게 보이는 통계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나 보통 사람들이 그걸 알아차리기는 힘들어서 (국정원은 본분이 정권의 개 노릇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통계청은 중립적으로 일해야 할 절대적 필요가 있다고 한다. "심슨의 패러독스"(6장)에도 그런 통계의 맹점이 나온다. 통계나 확률의 오용을 막기 위해서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책을 옮겨 적긴 했는데 맞게 베꼈는지도 확실히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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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김석희 번역 어린이를 위한 셜록 홈즈 시리즈를 여러 권 연달아 읽었다. 셜록 홈즈를 읽을 때면 피에르 바야르의 <셜록 홈즈가 틀렸다>가 꼭 생각난다. 문학 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연 책이라고 감히 평한다. 꼭 읽어 보길. 



추리소설은 범인의 이야기(A)와 범인의 이야기를 추적해 재구성하는 탐정의 이야기(B)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범인(또는 작가)이 만들어 놓은 원서사가 있지만 작품이 시작될 때에는 감추어져 있으므로, 탐정이 (독자를 끌고) 플롯을 전개해 가면서 범인의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마침내 각 단서가 가리키는 최종적 의미는 이런 것이라고 제시한다. A와 B가 하나로 매끈하게 합쳐지면 소설은 끝이 난다. 독자가 이렇게 이루어진 범인의 이야기(A)의 기상천외함에 감탄하고, 이런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꿰뚫어 본 탐정의 추리(B)에도 감탄하게 되면 그 추리소설은 성공했다고 할 것이다. 치밀한 독자들은 B의 추리과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허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A나 B가 거짓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떤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읽는다고 할 때에, 그 의미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작가가 의식적으로 이런 의미를 넣어야지 하고 넣은 걸까 아니면 텍스트가 짜이면서 무의식적으로 어떤 의미가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독자가 읽어냈기 때문에 있는 걸까? 사실 파고 들면 매우 복잡한 문제다(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비평의 갈래가 달라질 정도로). 그렇지만 작가-작품-독자가 서로 조금씩 다른 의미를 생산하여 논쟁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어딘가에는 진실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비평이 가능한 것일 거다. 그런데 여기에서 진실을 빼버리면, 비평이 불가능해질까? 아니다. 비평이 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영역으로 도약한다. 범인의 이야기를 쫓는 탐정, 탐정의 이야기를 쫓는 독자, 두 이야기를 함께 쫓는 비평가 모두 진실/진상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는데, 새로운 비평가(피에르 바야르)는 또 다른 이야기 C를 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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