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많음)


물론 이 계열 탐정의 원형은 셜록 홈즈다. 치밀한 관찰력, 사회성 부족, 순수한 논리력 등의 특징을 보이는 셜록 홈즈가 현대에 살았다면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았으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아이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작품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크 해던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이다. 이 책의 제목 자체가 셜록 홈즈 단편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한밤중>에서 주인공 크리스토퍼(15세)는 이웃집 개가 죽은 사건 수사에 착수하는데, 치밀한 관찰력과 논리력을 가졌을지는 모르지만 형편없는 탐정이다. 일단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과 주변사회에 대한 공포심이다. 또 단서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맥락에서 읽어낼 수 없기 때문에 실제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크리스토퍼는 개 사건도 해결하고, 혼자 힘으로 런던에 가는 모험을 감행하고, 가족 내의 문제도 어느덧 해결한다. 크리스토퍼 덕분에 (크리스토퍼가 의도한 바라기보다는 나비 효과에 가깝지만) 주변 세계에 평정이 찾아오긴 하지만 크리스토퍼에게는 그런 것보다도 수학 시험이 더 중요하다. '현실세계'에서는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대응을 이루지 않고(컨텍스트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크리스토퍼의 머리로는 인간들의 비논리적이고 자의적이고 복잡미묘한 행태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기호와 논리의 세계로 돌아와 크리스토퍼는 안정감을 되찾는다. 크리스토퍼에게 중대한 성장과 발견의 계기가 된 모험이기는 하였으나 크리스토퍼 입장에서는 정상에서 벗어난 일탈에 가까웠다. 


프란시스 X. 스토크의 <현실세계의 마르셀로>(2009)에서 마르셀로(17세)는 좀 더 적극적인 탐정이다. 처음으로 특수학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기 아버지 로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안면에 큰 상처를 입은 아이의 사진을 보게 되고 그것에 관한 비밀을 밝히는 데 착수한다. 마르셀로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타고난 의식이 있기 때문에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고 행동에 나선다. 문제 해결과정에서 마르셀로의 추리력도 도움이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상 밖으로 뚫고 나와 부당함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였다. 아스퍼거 증후군과 연관되는 '질서감'이 '정의감'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애쉴리 에드워드 밀러, 잭 스텐츠의 <콜린 피셔>(2012)의 콜린 피셔(14세)는 가장 성공적인 탐정이고 시리즈 탐정물의 주인공이 될 예정이다. 

콜린도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읽지 못하고 사회적 관계나 관습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비꼬는 말이나 비유적인 표현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런데 콜린에게는 강한 탐구심이 있다.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콜린에게 의문과 탐구의 대상이 된다. 콜린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녹색노트를 늘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행동과 옷차림 등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는 "조사할 것."이라는 문구를 남겨 놓는다. 마치 화성에 온 인류학자처럼, 아이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조사 탐구 대상으로 삼고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무심코 지나칠 만한 행동까지도 빼놓지 않고 모두 노트에 적어 놓고, 그래서 학교에서 총기가 격발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조각들을 짜맞추어 퍼즐을 해결할 수 있었다. 콜린의 동기는 순수한 지식욕에 가깝다. 콜린을 평소에 괴롭히던 웨인이라는 아이가 총기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았을 때 콜린은 바로 수사에 착수하는데, (웨인을 도와주면 더 이상 자기를 괴롭히지 않을 거라는) 자기보존욕구 때문도, 도덕적 정의감 때문도 아니고, 단순히 '웨인이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진상을 밝혀 사실을 바로잡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현실적으로 아스퍼거 증후군 탐정이 성공할 수 있을까? 

세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는 TMI(too much information) 경보가 아닐까 싶다. ASD(Autism Spectrum Disorder)에 속하는 사람들의 공통적 증상 가운데 하나가 감각 과민 증상이다. 너무 많은 정보량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감각에 과부하가 걸릴 때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한다. 탐정이라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 처리해야 할 텐데?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문제는? 텍스트를 컨텍스트 안에 놓고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는? 그런데 콜린에게는 제한적인 정보만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듯하다.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읽지 못하는 것도 자폐증의 증상 가운데 하나인데, 콜린은 그래서 사람들의 무수히 많은 얼굴 표정을 그려 놓고 그게 무슨 감정을 나타내는지(슬픔, 기분 좋음, 화남, 잔인함, 당황함...)를 매치시켜 놓은 종이쪽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흘긋흘긋 컨닝을 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대체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이야?) 그런데 콜린은 러시아 영화감독 쿨레쇼프의 몽타주 효과를 들어, 자기 방식이 다른 사람(neurotypical)보다 우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뒤에 필름이 부족하자 쿨레쇼프는 필름 조각을 가지고 이리저리 짜맞추어 감정적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실험해 보여주었다. 닭고기 장면 뒤에 무표정한 얼굴의 클로즈업을 보여주면 관객들은 "배고파 보이네."라고 생각한다. 관을 보여주고 똑같은 얼굴을 보여주면 '슬퍼 보인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다음에 보여주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결국 보통 사람들은 컨텍스트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텍스트를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숲만 보고 나무는 보지 못한다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총기가 발견되자 당연히 문제아인 웨인에게 의심의 눈길이 쏠리지만, 그런 컨텍스트/편견과 무관하게 사물을 직시할 수 있는 콜린만은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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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 2015-03-3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스퍼거 증후군인 사람들이 논리적이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니까 유능한 탐정이 될 수도 있겠네요. <이미테이션 게임> 보면서 앨런 튜링도 아스퍼거 증후군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고비 2015-03-31 20:1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튜링도 유명인 가운데 아스퍼거증후군인 사람으로 잘 꼽히더라고. 아인슈타인이나.. 글렌 굴드도 그렇다고 하고. 아무튼 천재는 대부분..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1994)을 -대략- 읽었다. 잘 모르는 분야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길래 생각나는 것만 적어 놓는다. 

스티븐 핑커는 물론 "화성인이 보기에는 지구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다 똑같게 보일 것"이라는 촘스키의 보편 문법론을 지지한다. 

이 책은 사피어-워프의 언어결정론/언어상대주의를 논박하면서 시작한다. 사피어와 워프는 1930년대에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제한한다, 언어에 따라 사고의 패턴이 달라진다고 하는 가설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으나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탓에 지금은 설득력을 거의 잃은 상태다. 

(그러고 보니 탈식민주의 담론에서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응구기-아체베 논쟁도 언어결정론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아체베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영어 같은 언어로 문학작품을 써서 식민지인들의 경험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했지만 응구기는 그것 자체가 식민화된 사고라면서 아프리카인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아프리카어로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상층 계급만 사용할 수 있는 지배자의 언어를 사용하면 토착어를 쓰는 하층민들이 이중으로 소외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어가 생각을 담는 틀이라는 이론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그런데 <언어본능>을 보면 언어상대주의를 뒷받침한답시고 나온 연구들이 (에스키모 언어에는 눈雪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백 종 있다든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실은 exoticism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하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언어결정론은 직관적 설득력은 있는 듯하나 입증하기가 불가능한 이론인가 보다.



그런데 작년에 읽은 기 도이처의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Through the Language Glass, 2010)은 내 기억에, 두 가지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던 것 같다. 언어결정론/언어상대주의를 논박하는 한편 언어가 본능이라는 관점에서도 거리를 두어, 언어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라고 했다. 

이 책 앞부분에서는 호머가 바다를 "와인색"이라고 한 것(한국어 제목이 여기에서 나왔다)을 비롯해 색깔을 가리키는 어휘의 가짓수가 시공간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점을 치밀하게 파헤친다. 호머의 표현 때문에 

1. 호머가 색맹이다.

2. 옛날 사람들은 지금만큼 시신경이 발달하지 않아서 몇 가지 색상밖에 구분하지 못했다. 

이런 설명들이 나왔지만, 기 도이처는 문화에 따라 색상을 나타내는 어휘의 개수는 다를 수 있으나 해당하는 어휘가 없다고 해서 그 색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진화에 따라 어휘가 다양해지는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왜 이야기를 하냐 하면, 고등학교 때인가 김소월의 "금잔디"를 배우면서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라는 구절을 들어 김소월이 적녹색맹이라고 주장한 학자가 있다고 들은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문학 연구를 하나 싶다. 


언어와 문화가 서로 주고니 받거니 함께 진화한다고 하는 게, 쉽고 빤한 설명이면서도 진리가 아닐까 싶다. 




사실 번역일을 하다보면 두 가지 언어 사이의 치환 작업을 계속 하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디에다 적어 놨다가 생각해 봐야지 하다가 진도가 급해 늘 잊어 버린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생각으로 옮겨 가니까 언어가 보편적이라는 말에 수긍이 간다. 그런데 어휘나 구문, 표현의 차이가 옮기는 과정에서 중화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때가 많다. 

오늘은 내가 번역해 놓은 문장에서 "깨진 요람"이라는 문구를 보고 놀랐다. 원문은 "broken cradle"이지만 요람이 깨지다니 어색하지 않나? 부서지거나 망가졌다고 해야 할 텐데 break의 1차적 의미가 "깨지다"로 떠오르기 때문에 이렇게 해놓은 거다.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았으면 그냥 무심코 넘어갔을 거라 자신감이 또 조금 떨어졌다. 원고를 아무리 봐도 번역투를 말끔히 제거할 수가 없다. 

한편 이런 딜레마도 있다. 번역투를 피하려고 영어스러운 표현을 거르다 보면 문장이 단순하고 표현이 유치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다고 해서 거기에 내 문장, 내 표현을 넣어 좀 멋을 내려 하면 그 부분이 너무 튀는 것 같다. 의미를 투명하게 전달하는 데 목표를 둘 것이냐, 아니면 글맛도 살려야 하느냐, 아무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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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감상을 나누고 평점도 올리고 하지만 책을 보고 나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쉽게 잊기도 하고 꼭 붙들어 두고 싶은 문장을 만나도 어디 구석에 들어있는지 기억해낼 수가 없다. 






얼마 전에 빌리에 드 릴라당(Auguste Villiers de L'Isle-Adam, 1838-1889)의 <잔혹한 이야기Contes Cruels>(물레, 2009)를 읽다가 눈이 번뜩한 순간이 있어 사진을 찍어 두었다. 




이 단편집(1883)은 호러, 풍자, 환상, SF, 역사 등 온갖 장르로 분류될 수 있는 단편을 모아 놓은 꽃다발 같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편, "우울한 이야기, 그보다 더 우울한 이야기꾼"은 그런 이야기성마저 뛰어넘는 탁월함을 보여 준다. 


D라는 사람이 자기 친구가 죽은 이야기를 매우 극적으로 벗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내'가 어떤 작가에게 들려준다. 그 작가가 이 이야기가 '소설감'이라고 말하는 순간, '내'가 이제 이야기가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사실이 허구화되었다는 사실이 (그 사실이 주는 충격적 효과가 더해져) 다시 허구화된다. 이 단편집 제목은 <잔혹한 이야기>지만 유혈이 낭자한 이야기는 아니고, 현실이 냉혹하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최초 영어 번역본 제목은 <Sardonic Tales>였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허구가 던져주는 아이러니, 현실 담론의 허위성이 실존마저 위협하는 이야기("비엥필라트르 집안 아가씨들"), 낭만화된 허구 속 인물에 현실의 옷을 덧씌울 때 느껴지는 당혹스러운 낯설음("비르지니와 폴"), 환상이 가장 잔혹한 고통이 되는 반전("Torture of Hope", 이건 여기 안 실려 있다), 관념의 힘으로 죽은 아내를 되살려 내는 이야기("베라"), 그밖의 단편들 모두를 관통하는 주제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환상, 잔혹한 현실의 거울과 다름없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우울한 이야기, 그보다 더 우울한 이야기꾼"은 릴라당의 환상성은 우울한 현실, 더 우울한 이야기, 더 더 우울한 이야기꾼을 통해 완성된다고 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소외? 소격효과?가 일어나면서 우울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축하와 박수를 보내고 황당해 하기도 하지만, 그럼으로써 현실은 더욱 씁쓸해진다. 


릴라당의 <미래의 이브>가 작년말에 출간되었길래 도서관에서 찾아 보았는데 릴라당 책은 이 작품집밖에 없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뜻밖의 보물이라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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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잰 몬틸로의 <The Lady and Her Monsters: A Tale of Dissections, Real-Life Dr. Frankensteins, and the Creation of Mary Shelley's Masterpiece(귀부인과 괴물들해부실제 세계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메리 셸리의 걸작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William Morrow, 2013)를 읽었다.

 

메리 셸리와 주변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당대에 과학의술이 발전하면서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져 시체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벌어지는 일들도 같이 들려준다. (시체도굴업이 성업했을 뿐 아니라 시체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살인을 일삼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문제는메리 셸리 이야기와 시체 해부 이야기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시체를 꿰매어 괴물을 만들 때처럼 말끔하게 이어져 봉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두 가지 이야기가 각자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하나 왜 굳이 병치했는지 알 수 없게 끝까지 겉돌고 이야기가 깊어지지를 않는다재미있게 읽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우리의 '불쌍한 폴리도리'가 나오는 6장이다.

 

이름마저 귀여운 폴리도리가 누구인가 하면최연소로 명문 에딘버러 의대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젊은 의사였으나 스무 살 때 바이런 경을 만난 뒤로 인생의 내리막길을 죽 가게 된 불운한 사람이다얼마나 불쌍한 인생을 살았는지 이 사람에 관한 유일한 책의 제목이 <불쌍한 폴리도리Poor Polidori: A Critical Biography of the Author of "The Vampyre">일 정도다.

 

사실 폴리도리는 의학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역시 의사인 아버지의 강압에 따라 의대에 진학했기 때문에,의대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의료업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폴리도리에게는 의사보다는 작가가 되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그러니 그때 미모와 문재와 방탕함으로 이름 높은 바이런 경이 유럽으로 여행을 갈 때 같이 동반하여 바이런 경의 건강을 돌보아줄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런과 교류는 폴리도리에게 문필가가 될 길을 열어주기는커녕 주로 좌절감과 굴욕감을 안겨주었던 모양이다바이런 경은 오만하고 까탈스럽고 선병질적인 성격이고 폴리도리는 철이 없고 세련되지 못하고 짜증을 유발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니 두 사람이 잘 지낼 수 있을 리가 없다.

폴리도리의 문학적 야망의 행로에 대해서는 같은 범속한 인간으로서 서글픈 공감과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바이런은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퍼시 비시 셸리 일행과 합류한다셸리는 그때 연인인 메리 고드윈과 메리의 이복누이 클레어 클레몬트와 같이 있었다이름난 시인 셸리야 말할 것도 없고메리 고드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초의 페미니스트 저술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문필가 윌리엄 고드윈의 딸이며 나중에 셸리와 결혼하여 메리 셸리가 된다그러니 폴리도리의 말을 빌면그 사이에서 자기는 "달무리 안에 든 별"처럼 도무지 빛을 발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바이런은 아폴론셸리는 아도니스 같은 외모를 지녔으니 오징어가 되는 경험까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바이런이 셸리와 철학적인 대화를 나눌 때 폴리도리는 거기에 끼지 못했고 무시 당하고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다왕따가 된 폴리도리는 유곽이나 도박장을 찾아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간혹 작품을 써서 바이런셸리메리클레어와 같이 모인 저녁 시간에 낭독하기도 했지만 "무가치하다"는 가차 없는 평을 들었고 잔인한 천재들이 폴리도리의 작품을 가지고 두고 두고 놀려 먹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이런 일이 있었다폴리도리가 메리에게 푹 빠졌다는 것을 알고 바이런이 담을 넘어 셸리 일행이 걸어오는 길 쪽으로 뛰어내리라고 폴리도리를 부추겼다담을 훌쩍 뛰어 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메리가 반할 거라고 하면서폴리도리는 연애 전문가인 바이런의 충고를 받아들여 무용을 과시하려 했으나 생각만큼 멋지게 착지하지 못했고 롱에지에 그친 정도가 아니라 그만 발목을 삐어 망신살만 뻗치고 말았다.

 

폴리도리가 다리를 삔 날이 <프랑켄슈타인>이 태동한 그 운명적인 날이었던 것 같다일당이 저녁에 응접실에 모여 앉았고폴리도리가 자작 희곡을 읽자 사람들이 비웃었고바이런 경이 '우리 모두 저마다 유령 이야기를 하나씩 쓰자'고 제안한 날이다메리 셸리의 기록에 따르면 "불쌍한 폴리도리는(아마 폴리도리 전기 제목인 '불쌍한 폴리도리'가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구멍 안을 엿본 벌로 머리가 해골이 된 여자에 관한 끔찍한 아이디어를 냈다... 나도 이야기를 구상하는 데 몰두했다..." 그렇게 해서 <프랑켄슈타인>이 시작되었다그러니까 그 날바이런의 장난스러운 제안이 메리가 작가로서 첫발을 떼게 된 계기가 된 셈이다.

 

 그런데 그날은 메리뿐 아니라 폴리도리의 문학적 삶에서도 중요한 날이었다폴리도리도 (해골여인은 포기하고) <뱀파이어The Vampyre>라는 작품을 썼던 것이다이 작품이 빛을 보게 된 과정도 특이하다.

 

바이런과 씁쓸하게 헤어져 영국으로 돌아온 폴리도리는 어느 날 <뉴먼슬리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바이런 경이 쓴 <뱀파이어>"가 실린 것을 본다그런데 놀랍게도 그 작품이... 자기가 쓴 소설이었다누군가가 제네바에서 폴리도리가 쓴 소설 원고를 발견하고 바이런 경이 쓴 것이라고 착각하여 잡지사로 보낸 모양이었다바이런 경은 설마 내가 '그런글을 썼겠냐며 코웃음을 쳤고 잡지사에서는 바이런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하지만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는 바이런이 그랬던 것처럼 쉽게 코웃음을 쳐서 무시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작품성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고뱀파이어를 단순히 피 빨아먹는 괴물이 아닌 "섹시하고 매력적인 귀족"으로 설정한 선구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작가가 바이런이 아니라 폴리도리임이 인정된 뒤에도 <뱀파이어>는 인기를 누렸고 덕분에 여심을 흔들어 놓는 뱀파이어의 전통이 수립되고 계보가 이어져 브램 스토커의<드라큘라>에서 완성되어 오늘날 <트와일라잇>까지 줄곧 이어진 셈이다.

 

그뒤 폴리도리의 삶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제네바에 있을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도박장에 드나들었으나 워낙 허술한 사람이라 돈을 잃기 일쑤였고 큰 빚을 졌다의사로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환자가 죽어 나가 평판이 나빠졌고 병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결국 음독자살로 25세의 짧은 일기를 마감한다불쌍한 폴리도리.

 

폴리도리가 남긴 가장 큰 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육체적 매력을 지닌 시니컬하고 카리스마 있는 귀족 뱀파이어 캐릭터 '루스벤 경'은 바이런을 쏙 닮았다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생명의 신비에 관한 비전의 지식연금술 등에 탐닉하던 퍼시 셸리를 여러모로 닮았다('빅터'는 셸리가 어릴 적에 즐겨 쓰던 이름인 데다가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인데 프로메테우스는 퍼시 셸리의 자아이기도 하다. "결박이 풀린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라는 시가 있다). 후기 낭만주의의 최고봉이라는 두 시인그들의 이상주의낭만성감상성숭고함열정의 이면에 괴기스러움잔혹함파괴성공포어두운 욕망이낮과 밤이,꿈과 현실이 공존하는 백일몽 혹은 몽유병처럼샴쌍둥이처럼 함께 깃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메리 셸리의"괴물들"은 시체장사꾼들이 아니라 바이런과 셸리같은 빛과 어둠을 함께 지닌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 "파괴적 이상주의자"들일지 모르겠다여기저기 애를 만들어 놓고 책임은 지지 않는 남자들(셸리와 바이런은 둘 다 유부남이었고 클레어 클레몬트가 낳은 아기는 아버지가 바이런인지 셸리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저버리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이다그 괴물들과 사회적 생물학적 굴레에도 '불구하고'메리 셸리는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 괴물들 '덕분에쓸 수 있었던 걸까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집필에 퍼시 셸리는 손가락 하나도 거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그러나 셸리가 모델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그래서 메리 셸리는 낭만적 이상결박 풀린 상상력진보와 미래에 대한 기대감 이면의 무모하고 섬뜩한 광기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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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 on Trial: How Numbers Get Used and Abused in the Courtroom

by Leila Schneps, Coralie Colmez (Basic Books 2013.3.) 



우리 말로 하면 <법정에 선 수학>이라고 할까, 재판에서 수학이 증거로 사용된 사례에서 수학이 어떻게 오용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책이다. 


사법과 수학이라니 평소에 만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어울리지 않는 짝이다. 그런데 뭔가 싶어 별 기대 없이 펼쳐본 책이 빨려들 정도로 재미 있었다.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수학이지만 나의 삶과는 큰 관련이 없을 것 같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게 일상에 파고들어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웬만한 스릴러 저리 가라;;; 옛날에는 성직자들만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어서 거기에서 무한권위가 나왔다던데 오늘날에는 수학을 몰라서 억울한 꼴을 당할 수도 있는 건가!)


주로 사용된 수학은 일상생활과 관련이 많은 확률과 통계다. 수학교과서 가장 뒤쪽에 실려 있어 국민적으로 경시되지만 (내가 수능 볼 때는 확률과 통계가 아예 시험 범위에 없었다. 사과벌레씨한테 어제 들었는데 집합이 수학교과서 가장 앞에 나오는 것이 우선순위상 적당하지 않다고 하여 개정 교과서에서는 뒤로 밀렸다고 한다. 이참에 확률통계를 1장으로?) 직관적 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확률과 통계에 대해 우리가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수학적 결과는 다른 경우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책에 실린 영국, 미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있었던 열 가지 사건 가운데에는 몇 년 전 세계적으로 떠들썩했고 아직도 재판 중인 어맨더 녹스 사건, 폰지 사기의 원조 찰스 폰지 사건,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전설적인 수전노 헤티 그린의 유언장 위조 사건, 드레퓌스 사건(지문 감별법 이전에 범죄자 식별 시스템으로 널리 쓰였던 베르티용 시스템의 베르티용 씨가 부정확한 증언으로 드레퓌스의 유죄 판결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알게 되었다)처럼 잘 알려진 사건도 있고, 나머지 사건들도 증거가 부족해 판결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학'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법률사적으로 중대한 사건들이다. 현대에 해당하는 앞부분은 답답한 사법 시스템, 억울한 누명, 편견에 물든 수학이 등장하는 재판 과정 이야기가 지금 겪는 것처럼 생생했는데, 폰지-헤티 그린-드레퓌스가 나오는 뒤쪽 이야기는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하나) 옛날 이야기 같아서 역사책 읽듯 조금 다른 기분으로 읽었다. 


사건의 발단과 전개, 결과를 세세히 전달하여 법정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치지만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책은 아니다. 단지 재판에 쓰인 수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내려진 판결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나중에 다른 의학적 증거나 증언 들이 추가되면서 진상이 좀 더 명확해진 사건도 있지만, 몇몇 사건에서는 수학적 증거 때문에 유죄 혹은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실제 범인인지 아닌지, 곧 판결 자체가 결과적으로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고 단지 과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정확한 계산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좀 맥 빠지는 감은 어쩔 수가 없다.) 결론이 나온 사건도 물론 있다. 소아병동 간호사였다가 환아들을 무더기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루시아 데 베르크 사건(7장)에서는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수년에 거친 조사와 재계산 끝에 판결을 반박하는 연구서를 발표했고 그 덕분에 무죄판결을 받게 되어 '수학적 정의'가 실현되기도 했다(재판이 끝나기까지 데 베르크가 이미 수년 복역했고 그 와중에 뇌졸중을 일으켰으니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책 중에서 다이애너 실베스터 사건(5장)을 조금 옮겨 본다. 

1972년에 다이애나 실베스터라는 여자가 강간 살해 당한 채로 발견된다. 피해자의 몸에서 정액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당시에는 DNA 감식법이 없었기 때문에 범인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미해결로 남았다. 2003년에 샌프란시스코 경찰은 과거의 미제 사건을 DNA 감식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해결해 보기로 한다. 30년 전에 보관해 두었던 다이애너 실베스터 살인범의 정액 샘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샘플이 변질되어, 변별에 사용하는 13쌍의 유전자좌 가운데 다섯 쌍을 확인하고 다른 두어 쌍에서는 일부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DNA 프로필과 일치하는 DNA를 가진 72세의 존 퍼킷 노인을 체포한다. (존 퍼킷은 성폭행 전과가 있으며, 나이, 당시 거주 지역, 당시 목격자의 증언 등과 외양도 일치했다.)


그런데 재판 중 변호인측에서 FBI가 사용하는 RMP(랜덤 매치 확률. 증거물과 임의의 사람의 DNA 프로필이 일치할 확률)에 의문을 제기한다. 


일단 유전자좌 일치 확률을 대략적으로 한번 계산해 보자. 13쌍의 유전자좌 각각이 특정 위치에 나타날 확률은, 통계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유전자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평균적으로 1/13(약 0.075) 정도 된다고 한다. 유전자좌 각각은 서로 독립적 요인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N개의 유전자좌가 일치할 확률은 0.075의 N승이다. 따라서 9개 유전자좌가 일치할 확률은 POWER(0.075,9)이다. 계산해 보면, 9개 일치 RMP가 130억분의 1로 명시되어 있는데 이것과 아주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변호인 측에서 최근 연구 결과를 들어 RMP의 신빙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트로이어라는 연구자가 2001년 DNA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조사한 바에 따르면, 65000명의 DNA 가운데에서 혈연관계가 없는데 9개 유전자좌가 일치하는 경우를 122쌍, 10개가 일치하는 경우를 10쌍이나 발견한 것이다. 

65000명 가운데 122쌍이라는 결과는 130억분의 1의 확률이라는 RMP와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난다. 직관적으로 생각하기에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고 둘 중에 어떤 게 옳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가지 다 옳을 수 있고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우선 13개 유전자좌 중에서 9개를 뽑는 경우의 수는 715개이다. (13C5)


또, N명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커플의 수는



이므로, 65000명이 만들 수 있는 커플의 수에, 9개 유전자 추출 경우의 수 715를 곱한 것이 서로 일치하는지 검증할 샘플의 개수가 된다. 계산해 보니



이나 된다. 


시료 개수 1조5천억에 일치 확률 130억분의 1을 곱하면 116이 나온다. 데이터베이스 연구에서 발견된 122쌍하고 큰 차이가 없는 수치다! 


이건 사실 생일 문제라고 하는 어디에선가 한두 번은 들어 봤을 패러독스다. 사람이 임의로 모였을 때 생일이 같은 두 사람이 있을 확률과 특정한 사람과 생일이 같은 사람이 있을 확률을 계산해 보았을 때 얼핏 비슷해 보이는 두 가지 경우의 확률이 크게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 존 퍼킷이 유/무죄일 확률은 아니다. (이 확률 계산은 뒤에 자세히 이어진다.) 



이 책에서는 엄밀하고 객관적이라고 하는 수학이 엉뚱하게도 편견이나 직관적 오해를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도구로 쓰인 사례들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통계청에서 정권에 유리하게 보이도록 통계의 발표 시기를 조절하거나 내용을 조정했다는 기사를 봤다. 한겨레 기사와 오마이뉴스에 실린 선대인의 글에 링크를 걸어 놓는다. 통계 자료의 항목이나 구간, 대상 기간 등을 조절해 전혀 다르게 보이는 통계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나 보통 사람들이 그걸 알아차리기는 힘들어서 (국정원은 본분이 정권의 개 노릇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통계청은 중립적으로 일해야 할 절대적 필요가 있다고 한다. "심슨의 패러독스"(6장)에도 그런 통계의 맹점이 나온다. 통계나 확률의 오용을 막기 위해서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책을 옮겨 적긴 했는데 맞게 베꼈는지도 확실히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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