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협의 기구...교육기구 인  경연經筵,,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인 경연 經筵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경연經筵.....조선시대에 와서 지배 이념인 유교에 의해 더 중요한 기능은  한 걸로 알고 있다.  

경연은 유교정치의 이상 실현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터니......

조선시대에는 세종때 본격적으로 경연經筵 제도가 시행된걸로 또한 알고 있는데... 

조선시대 추구하던 왕도 정치.....그 핵심 역할을 했을듯한 경연經筵... 

세종때 매일 경연經筵을 열 정도로 활발히 제 역할을 하던 경연經筵이 세조때 뜸하다 다시 성종때 다시 활발해 졌다.   

난 왜 경연經筵하면 세종 그리고 성종만 생각나는지...... 

세종은 워낙 설명할 필요없는 분이시고...

경연經筵정치의 대표주자 성종을 보자면...................

성종은 왜 그렇게 죽기살기로 경연經筵을 열었을까?   성종은 25년 동안 매일 세 번씩 경연에 참석하여 정치를 논의했다.

숭유억불정책을 철처히 하던 유교정치를 펼쳤던 왕이기 때문에.....? 

그는 경연經筵이 마냥 즐겁고, 좋았을까?

하루 한번 열기도 힘든 경연經筵을 왜 여러차례 열면서 그는 왜 그렇게 경연經筵을 통해 성장했을까?

왕을 자문하면서 왕권을 견제시키던 경연經筵... ..  

 

 

이 책은 경연에서 왕이 무엇을 공부했는지, 어떤 교재로 공부했는지, 왜 공부했는지,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본다. 
 

궁금하다. 

왕은 어떤 사람(경연관) 에게 어떤 교재를 가지고, 어떤 목적으로  배워 어떤 올바른 

정치를 하기위해 노력했을까?? 

 

  

  

 

경연일기-국립중앙박물관

   
 

 왕이 신하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에서 강의하고 토론한 내용을 학봉(鶴峰) 김성일(1538-1593년)이 기록한 공식 일지이다. 강독(講讀: 뜻을 밝혀가며 글을 읽음)한 책의 제목, 범위, 왕과 신하들의 토론 등을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토론 내용은 강독한 부분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정치 전반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일지는 역사 기록을 담당하던 사관(史官)들이 작성해서 보관했다가, 왕이 죽은 후 실록(實錄: 임금 재위 시의 모든 사실을 적은 기록)을 펴낼 때 자료로 사용하였다.
이 유물은 각각 1571년과 1572년의 어느날에 이루어진 강연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표지에는 각각 그날의 날짜와 날씨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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